도전자의 얘기 II
같은 시기에 입사를 한, 같은 연배의 벗들을 만날 때면 영락없이 처음 그 시간으로 돌아간다. 무려 35년이 지났지만 사용하는 용어, 태도, 몸짓은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 대화의 주제마저 그때로 돌아간다. 과거의 숨어 있던 기억들을 다 끄집어내고 ‘이제는 말할 수 있다’라는 수식 문장을 앞세워 기억할 수 있는 사건들을 펼쳐 놓는다. 뒤늦은 발견, 특종 뉴스라도 보도하듯이 큰 목소리로 사건의 특정 부분을 반복하여 얘기한다. 기억에 없던 얘기를 들을 때는 흥미, 관심이 높아진다. 그러다 짓궂게 한 친구를 코너로 몰아세우기도 한다. 이렇게 뒤섞여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격은 더욱 허물어지고 서로 지지 않으려 말 수는 늘어난다.
그런데 (공감하겠지만) 무척 재미있는 부분은 대화가 이어지면서 35년 전, 그때의 서열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35년 동안 사회의 일원으로서 각기 다른 영역에서, 다른 역할을 하면서 성공, 실패, 평탄의 과정을 거쳤고 어떤 이는 글로벌 기업의 최고 경영자로서, 어떤 이는 자가 기업의 대표로서, 어떤 이는 전문인으로, 어떤 이는 자유인으로 역할이 다른데, 한자리에 모이면 자연스럽게 그때의 서열로 재편이 된다. 조기 퇴임한 벗이 현직 글로벌 은행의 최고 경영자를 그때의 모습으로 대하고, 사업이 망해 자유인이 된 벗도 전문직인 변호사 벗에게 그때의 모습으로 대한다. 그럼에도 서로 간에는 불편함이 없다. 속으로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겉으로 나타난 모습에는 서로 간에 불편함이 없이 그때로 돌아간다.
얼굴에도 여전히 그때의 모습이 남아있다. 세월은 속일 수 없어, 흰머리가 검은 머리수 보다 많고 목주름은 드러나고 군데군데 검버섯이 보이나 관록, 경륜의 깊이가 느껴진다. 그렇지만 얼굴 한 모퉁이에서 순간순간 나타나는, 숨길 수 없는 짓궂은 끼는 여전히 남아 있다. 물리적은 나이는 들어가지만 얼굴은 여전히 젊어 보인다. 30대 때 봤던 50~60대의 얼굴과는 크게 다르다. 30년 전 대비하여 중위 나이가 17년이 높아졌다고 하는데 딱 그만큼 젊어 보인다. 40대 초반으로 보인다는 말은 격식을 차린 칭찬이 아니라 실지로 그렇게 보인다는 솔직한 표현이다. 게다가 젊어 보이지만 중후한 멋도 보인다.
한 벗, 상철이는 젊어 보인다는 말이 달콤했는지 나이가 들수록 숨었던 멋이 드러나는 게 좋다는 얘기와 함께 이를 위해 어떻게 일상을 만들어 가는 게 좋은지 경험을 얘기한다. 성공한 사람, 멋을 아는 사람, 향이 나는 사람은 아침에 일어나서, 꾸준히 하는 자신만의 한 가지가 있다고 얘기한다. 어떤 이는 매일 냉수로 샤워를 한다. 어떤 이는 매일 새벽 5시에 책을 읽는다. 어떤 이는 매일 아침 여러 신문의 경제란을 읽는다. 어떤 이는 아침에 명상부터 한다. 그리곤 이들은 꾸준히, 어떠한 일이 생겨도 자신만의 한 가지는 잊지 않고 행한다고 얘기한다.
한 무리의 벗들에게서 발견하는 자화상 모습이다. 중년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여 재잘거리는 얘기 속에 이들의 자화상이 담겨 있다. 지나간 과거의 허물을 즐거운 에피소드 마냥 끄집어내어 얘기하고, 그 허물 얘기를 꺼냄에 주저함이 없고, 그 허물이 드러남에도 언짢음이 없는 모습부터, 서열이 재정리되어도 딱히 기분 나쁘지 않고, 중년의 멋을 알아야 한다는 말에 예외 없이 공감, 동의하는 자화상 모습이다. 이들은 이치를 아는 듯, 좋은 것만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추잡하고 지저분한 얘기도 숨기지 않는다. 마치 “ 많은 것을 알아서 악해지는 사람은 별로 없고, 멍청하기 때문에 정의로워진 사람도 별로 없다” (주 1)의 얘기처럼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다 봐야 세상 전체를 볼 줄 알고 현명한 판단을 하는 것이니, 나쁜 것을 가리고 못 보게 하거나, 얘기를 안 하는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프랑스 시인의 얘기를 아는 듯, 자신의 나쁜 면, 부족한 면을 얘기함에 주저함이 없다. 이들은 서로 간에 벽을 느끼지 않으니 이러한 대화가 가능하다. 부인할 여지도 없이 이들은 서로 같은 부류임을 알기 때문에 자신 얘기를 하는 것을 망설이지 않는다.
그러면 이들의 격이 없는 대화, 허물없는 뒤섞임이 가능하도록 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아마도 오랜 기간 동안 같이 고생하면서 성장한 세대이기 때문이고, 점점 중년의 세계로 깊이 들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허물을 볼 수 있는 눈이 생기기 시작했고, 자신의 무지함을 알기 시작했고,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기 시작했으며 그래서 뭘 해야 할지를 깨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가고자 하는 목표를 세우는 것과 목표에 집중해야 함을 알기 때문이다. ‘지나온 긴 시간 속에서 제대로 알고 한 것이 얼마나 될까?’에 대한 답도 알기 때문이다. 부족한 것을 감추려고 했던 젊은 시절에 대해 ‘안타깝다’는 말의 의미를 알기 때문이다.
주제 없이 이 얘기 저 얘기로 이어진 수다는 끝이 없고 누구 하나 질세라 자기 말하기에 재미를 더하지만 반면 우리 모두의 성숙함은 '듣는 행위'를 통해 느껴진다. 말하려 하다가도 누군가가 얘기하면 듣는다. 맞장구를 치든 핀잔을 주든... 참 잘 들어준다. 들리니 더 잘 들리고 더 잘 보이고 더 잘 이해되고 더 잘 공감된다. 외적 얼굴은 나이가 들었지만 내적 얼굴인 지혜는 이렇게 차곡차곡 나이테처럼 쌓이나 보다.
우리들의 자화상은 충분히 성숙한 모습이다. 그리고 아직 청춘이고, 할 일이 많다. 상황이야 각기 다르지만 같이 갈 수 있는 곳이 많다. 자화상의 모습처럼 편안함으로 그대로 이어 나아가면 모두가 자아내는 멋과 맛, 향이 넘칠 듯하다.
자화상... 나의 얼굴은 어떠할까. 아직도 마음은 청춘이고 해야 할 일, 하고 싶은 일이 많은 나다. 절대 나이가 내 앞길을 막지는 못할 것임을 안다. 나의 자화상은 아직 청춘의 나를 그린다. 내 삶의 유일무이한 저자이자 화가는 나다. 나는 여전히 나를 그려간다. 우기 때만 생겨나는 건천과도 같은 시기도, 폭포수와 같은 엄청난 기운도, 모두 내 인생에 담겨 내 자화상의 한 줄 주름이 되었다. 지금부터 5배, 5가지의 일을 더 한들 내 나이 100이다. 대다수가 산다는 그 노년의 시기. 내가 지금부터 살아갈 인생은 마음은 청춘이지만 인생의 중노년을 걸으며 삶에 남겨야 할 것들, 더 짙게 그려야 할 주름들, 더 많고 깊은 사랑과 감사와 잃어버린 그 무언가를 찾아내는 시간들이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진한 멋과 맛, 향이 넘칠 시간들이어야 한다.
젊게 살되 젊은이가 되지 못하고 열정적으로 살되 신체적으로 열세일 수밖에 없는 시작점에서 나는 무엇을 빼고 무엇을 넣어야 내 삶의 깊이를 더하고, 나다운 나로 채울까 고민을 한다.
(주 1) “악의 어머니는 지식일 수가 없고, 정의는 무지함의 딸일 수 없다” – Agrippa d’Aubigne, 프랑스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