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집 : 이편한 세상은 언제나 푸르지요
엘리베이터 옆에는 계단이 있다
최근 들어 아랫배가 심상치 않게 부풀었다. 반면에 허벅지는 점점 가늘어지는 바람에 외계인 ET의 형상을 닮아가고 있었다. 따로 운동할 시간도 없으니 18층인 우리 집까지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 걸어 올라가기로 했다. 5층 8층 사이가 고비인데 이를 넘기니까 걸어 올라갈 만했다. 퇴근할 때 최소 매일 한 번은 가능할 것이고 가끔 아내 몰래 담배 피우러 갔다 오거나 쓰레기 버리는 날도 있으니 대충 일주일에 10번 이상은 짧은 등산을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두 달 정도 꾸준히 실천했더니 배가 좀 들어가는 것 같기도 했고 허벅지와 종아리에는 분명 근육이 붙기 시작했다. 이제는 각 층마다 계단에 내다 놓은 자전거며 생활용품 같은 것들이 몇 층 것인지 외울 지경에 이르렀고 15층과 16층 사이에는 센서등이 고장 났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계단실과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복도 사이에는 철문이 있는데 어떤 층은 열어 둔 곳이 있긴 해도 대체로 공간분리의 효과가 있어 내가 유심히 보지 않는 이상 혹시나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주민들과 눈이 마주칠 일은 없었다. 이 아파트에 이사와 3년이 넘게 살다 보니 같은 동에 사는 사람들을 엘리베이터에 마주치며 대충 몇 층 아저씨다 몇 층 할머니다 정도는 알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손쉽게 소리 내어 안녕하세요 라는 말이 잘 나오지 않았고 그저 하는 둥 마는 둥 뻘줌히 목례나 눈인사를 나누는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회사에서 갑작스레 생긴 회식을 마친 후 술에 취해 대리기사를 불러 집으로 왔다. 그냥 엘리베이터를 탈법도 한데 습관이 무서운지 굳이 계단실로 오르기 시작했다. 술기운 때문에 나는 내 몸의 상태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 생각보다 숙취는 강했고 14층인가 올랐을 즘 참을 수없는 구토가 밀려왔다. 나는 몇 계단을 좀 더 오르다가 계단 턱에 앉아 백팩을 가슴팍과 무릎에 안아 기댄 채 숨을 골랐다. 여기서 토할 순 없다는 강한 의지로 나는 고개를 백팩에 처박고 속을 안정시켜 보았다. 그러는 와중에 스르르 잠이 들었던 것 같다. 마침 센서 등이 고장 난 15층 16층 사이었다. 사방이 컴컴하고 고요했고 시간도 벌써 11시를 훌쩍 넘어가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는 주민도 거의 없었기에 잠시의 숙면을 방해할 것은 없었다. 잠에서 깬 것은 누군가가 전화를 하는 소리 때문이었다. 뭔가 소리를 죽여서 속삭이듯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계단실의 울림 때문에 그 쇳소리처럼 속삭이는 소리가 증폭되어 울렸다. 30대 여자의 목소리였다. 들으려고 한 것은 아닌데 자연스럽게 통화 내용이 머릿속에 박혔다.
“당분간은 전화하지 말라고 했잖아. 내가 알아서 한다고. 다 된 일에 코 빠뜨릴 있어. …. 글쎄 걱정 마 영감 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한다고…. 그래 알았어. 나도 보고 싶어. 근데 지금은 아냐 ……. 나도 내가 이러고 싶어서 이러고 있는 줄 알아… 이게 다 누구 위해서 그런 건데… 조용히 있어 …일 정리되면 우리 당분간 어디 해외에 가 있자. 응 응. 나도.. 나도 사랑해. “. 그리고 잠시 후 복도와 계단실 사이문을 쾅 여닫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발이 저려왔지만 마치 무슨 범죄 현장을 목격한 사람처럼 잠시 동안 움직일 수가 없었다.. 현관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이내 계단 복도의 점멸 등이 꺼지자 그제야 조심스럽게 계단을 절뚝이며 올라 집으로 들어갔다. 1701호 여자일 것이다. 1702호는 70대 노부부가 살고 계시니까. 근데 통화내용은 뭐지. 왜 복도에 나와서 몰래 전화를 했을까. 나는 숙취가 다 날아가 버리는 것 같았다. 잠시 멍하니 소파에 앉아 전화의 내용을 곰곰이 되내어 보고 있었는데 거실등이 켜졌다, 순간 놀라 소리를 지를 뻔했다. 아내가 잠자다 깼는지 눈을 비비며 몽유병 환자마냥 정수기로 걸어가서는 물을 따랐다. “차 들어오는 알람 소리는 아까 울린 것 같았는데. 왜 이제와. 차에서 자다 왔냐. 빨리 씻고 자” 아내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물을 마시고는 곧장 다시 침실로 들어가려 했다.
“ 아래층 1701호 말이야 거기 아저씨랑 부인이랑 사이가 안 좋은가?” 아내는 내 말에 쓰윽 고개만 돌리더니 “ 너랑 내가 사이가 안 좋지 누가 안 좋아. 씻고 작은방에서 자. 술냄새 싫어 “ 라며 내 질문엔 대꾸도 앉고 불을 끄고는 안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다시 어두워진 거실에 놓였다. 그리고 이런저런 추리가 이어졌다. 사실 평범한 부부처럼 보이진 않았다. 아내의 설명을 듣기 전까지는 난 그들이 부부가 아니라 부녀 관계인 줄 알았다. 남편인 아저씨는 백발이 성성하여 누가 봐도 환갑을 얼마 남기지 않은 50대임이 분명했고 여자는 늘 방금 미용실에서 만지고 온 머리처럼 컬이 분명하고 윤기가 흐르는 머리에 언제나 세련되면서 상당히 화려한 화장을 하고 마트를 갈 때도 외출복 같은 옷을 잘 차려입고 다녀 얼핏 보면 20대 후반의 잘 나가는 처녀처럼 보였다. 게다가 남편을 부르는 호칭도 여보나 오빠가 아니라 ‘아빠’였다. 나중에 초등학교 이삼 학년쯤으로 보이는 약간 비만의 악동처럼 생긴 아들 녀석과 셋이 나란히 엘리베이터에 탔을 때에야 나는 그 아빠가 애 아빠를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한 번은 1701호 부부와 1702호 할머니와 그리고 내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탔던 적이 있다. 1702호 할머니는 점잖고 지긋한 말투로 1701호 여자에게 말을 건넜다. “어쩜 그렇게 젊어 보여. 늘 곱고 예쁘고. 그냥 내가 다 기분이 좋다니까. 봄이 다 느껴지네. 옆집 아저씨는 참 좋겠네요. “ 1701호 아저씨는 약간 겸연쩍은 듯 어색한 미소를 보였고 1701호 여자는 방긋 웃으며 싹싹하게 말했다. “호호, 고마워요. 제가 어디 가서 좀 어리단 소리는 많이 들어요. 그래서 우리 아저씨 염색 좀 하고 다니래도 말을 안 들어요. 사람들이 자꾸 딸이래요. 호호” 하며 할머니의 말을 능숙하고 기분 좋게 받아쳤다. 사실 나이 차이가 좀 있을 수도 있고 1701호 여자는 조금 과하다 싶을 만큼 꾸미고 다니는 부분이 있긴 하지만 대체로 아파트에서 마주치는 사람들한테 인사도 잘하고 붙임성도 좋은 편이었다. 그래서 나 같은 오해를 하는 사람들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대체로 호감을 주는 주민중 하나였다. 그렇지만 도대체 그 전화의 내용은 그리고 그 말투는 뭐란 말인가. 이건 누가 봐도 내연남에게 몰래 전화를 걸던 상황 아닌가. 게다가 ‘영감 일을 처리’한다느니 ‘해외’로 뜨자느니 이런 말들은 어떤 치정극에서나 들을 수 있는 레퍼토리였다.
다음날 아침 나는 숙취 때문에 늦잠을 자고 허겁지겁 웃을 챙겨 입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그리고 엘리베이터는 바로 다음 층에서 멈췄다. 정말 그 짧은 순간 나는 슬로모션처럼 천천히 엘리베이터 문이 미끄러지듯 열리고 1701호 여자가 웨이브 진 머리를 흩날리며 영화의 한 장면처럼 유유히 들어서는 것을 보았다. 마치 연쇄살인의 장면을 우연히 보게 된 목격자가 그 범인을 마주치기라도 한 것처럼 나는 바짝 긴장해서 아주 조심스럽게 꼴깍 침을 삼켰는데 왠지 그 소리가 엘리베이터 안을 가득 채우는 듯했다. 한두 층 내려갔을 때 갑자기 그녀가 말을 걸었다. “요즘도 계속 걸어서 올라오세요.? 운동하시나 봐요. 엘리베이터 타려고 기다리다가 몇 번 그러시는 거 뵀어요”. 분명 뭔가를 떠보는 말투였다. 난 당황해서 아 아니요 이제 안 해요라고 더듬거리며 말했다 “어 며칠 전에도 본 거 같은데 “ “아, 아 오, 오늘부터 안 해요.”. 이런, 그게 말이냐 방귀냐. 1701호 여자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돌렸다. 아마 그때 5층에서 사람이 타지 않았다면 나는 하마터면 어제 전 아무 말도 듣지 못했어요라고 변명을 할 뻔했다.
그 이후로 며칠 동안 내 머릿속에는 한 편의 분륜 드라마가 제멋대로 둥지를 틀고 자라나기 시작했다. A 씨는 40이 넘도록 결혼도 안 하고 연애도 안 하고 부지런히 돈을 모아 두세 채의 부동산과 거액의 주식을 소유하고 스포츠센터를 운영하고 있지만 검소함으로 무장한 그는 남들에게 재산가라는 이미지를 주기 싫어 서울 외곽의 평범한 중형평수의 아파트에 혼자 지낸다. 그러다가 그의 가게 손님으로 오던 미모의 여성인 B는 뒷소문으로 그의 재산을 가늠해 보고 그를 남편감으로 점찍어 둔다. 원래 사귀던 남자는 그야말로 사고만 치고 다니는 한량이었고 그녀의 계획을 눈치채고는 처음엔 화를 냈다가 이내 공범이 되기로 한다. 그런데 결혼을 한 여자는 마음이 바뀌었다. 굳이 내가 왜 다시 진흙탕으로 돌아가야 하나. 지금의 남편하고 아이까지 낳았는데 가만히 있으면 어차피 나와 아들놈 재산이 되는데.. 그 아이가 정말 그놈 아들 맞는 거냐. 모든 걸 밝히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전 남자 친구에게 아직 유산을 받기로 유언장에 도장을 찍지 못했으니 기다려 달라는 말로 회유한다. 그러다 급기야… 그만 거기까지. 나는 아침 드라마에서 볼법한 진부한 스토리에 너무 쉽게 빠져 드는 나 자신을 책망하며 이웃을 음해하는 스스로의 졸렬한 상상을 멈추려 애썼다. 그러나 왠지 며칠 동안 1701호 아저씨를 엘리베이터에서 본 적이 없고 이상하리만큼 아파트 어디서도 마주친 적이 없다는 사실에 자꾸만 뭔가 불안하고 석연치 않은 마음이 증폭되어 갔다. 잠을 자려고 누우면 왠지 아래층에서 뭔가 계속 물을 흘려보내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며칠 뒤 퇴근을 하고 지하 주차장에서 차를 주차할 때였다. 뒷열 주차구역에 나보다 먼저 주차한 차의 해치백이 열렸다. 나는 자동차 버튼을 눌러 시동을 끄고 짐을 챙겨 문을 열려다 백미러로 해치백 안을 보았다. 대용량 락스 통 같은 것이 얼핏 보였다. 운전자가 나와 해치백 앞에 서서 물건을 챙겼다. 아랫집 여자였다. 나는 반사적으로. 시트에서 엉덩이를 앞으로 빼며 상체를 움추렸다. 잠시 후 여자는 한손에는 커다란 락스통과 다른 한 손에는 빨간 비닐 노끈과 대용량 쓰레기 봉투가 남긴 흰 비닐 봉지를 들고 내 차를 지나 아파트 출입구로 걸어갔다.
나는 혹시라도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칠까 몇분 차에서 나오지 않고 기다렸다. 도대체 왜 락스를 구입했을까. 그것도 저렇게 큰 용량을 . 아니, 와이프도 가끔 욕실 청소를 할때 락스를 사용한다, 그게 뭐가 이상한가? 집에 엄청난 곰팡이가 피었을 수도 있지. 아마 내가 요즘 딸아이가 보는 명탐정 코난 따위의 만화를 너무 많이 본 까닭일 거다. 그 뒤로도 나는 그 날의 전화통화 소리를 자꾸 떠올리고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는 나를 볼때가 종종 있었다.
결국 일은 터지고 말았다. 비가 그야말로 억수로 쏟아지는 일요일 밤이었다. 나는 여느 때처럼 분리수거를 마치고 담배 한 대를 피우고는 계단을 올라가고 있었다. 16층을 지나 17층으로 오르는데 17층 복도에 불이 들어와 있었다. 나는 한껏 긴장을 하며 복도와 계단실 사이의 반쯤 열린 철문 쪽으로 고개를 살짝 돌렸다. 아랫집 여자가 분홍색 우비를 입고 가정용 수레 위에 종량제 봉투를 가득 실은 채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인기척이 나자 그녀는 우비의 후드 속에 감추었던 두 눈을 번뜩이며 내 눈과 마주쳤고 예의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눈인사를 하는 듯하더니 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 안으로 수레를 밀어 넣고 올라탔다. 나는 재빠르게 고개를 돌리고 계단을 마저 오르는 시늉을 했다. 무슨 종량제 봉투를 한꺼번에 저렇게 많이 방출하는 거지. 분리수거를 아예 안 하나. 도대체 뭐가 들어있는 거지.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그렇게 허술할 리가. 뭐야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엘리베이터는 어느새 1층에 도착했고 나 역시 어느새 방향을 바꾸어 계단을 다시 내려가고 있었다. 왠지 무슨 꼴랑 꼬랑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생선 썩은 냄새 같기도 하고 배추 썩은 내 같기도 하고. 계단을 내려가는 나의 발걸음은 점점 빨라졌다. 나중에는 거의 뛰다시피 했는데 4층쯤에서 하마터면 빗물에 젖었던 슬리퍼가 미끄러지면서 넘어질 뻔했다 간신히 난간을 잡고 버텼다. 그때 아래쪽에서 띵동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열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4층 복도로 보이는 엘리베이터 표시판엔 1층 2 층 3 층 4층.. 일정한 간격으로 숫자가 바뀌었고 17층에 머무르자 띵똥하는 소리를 내며 멈추었다. 그 여자다. 나는 다시 뛰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어느 틈에 내 손에 들려져 있던 우산이 없다. 대차게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우리 동 입구에서 분리수거장까지 뛰어갔다. 초록색 페인트가 칠해진 종량제 봉투 수거함에는 방금 1701호가 버리고 간 여러 뭉치의 파란 종량제 봉투들이 안에 검은 비닐봉지로 한 번 더 결박된 채 던져져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폈다. 아무도 없었다. 천천히 수거함으로 다가가서는 다시 주변을 살피고 단단하게 묶인 봉투의 매듭을 풀기 시작했다. 그냥 확인하는 거뿐이야. 내가 궁금한 걸 잘 못 참는 병이 있어서 그런 것뿐이야. 누가 올까 봐 긴장한 데다가 빗물로 손이 자꾸 미끄러져 봉투는 좀처럼 풀리지가 않았다. 다급해지자 매듭사이로 살짝 나 있는 틈을 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안의 검은 비닐봉지를 거의 완력으로 찢다시피 했다. 그 안에는 또다시 이상한 비닐 뭉치와 축축한 헝겊 조가리들이 잔뜩 들어 있었다. 그때 분리수거장의 감지등이 꺼졌다. 나는 한 손으로는 비닐 구멍을 쥐어 잡고 한 손을 크게 휘저어 감지등을 다시 켰다. 그 헝겊 조가리들 사이로 무언가 단단한 것이 참을 수 없는 악취와 함께 만져졌다. 바로 그때 누군가 뒤에서 소리쳤다. “거기서 뭐 하세요 “ 그 순간 만약 천둥소리라도 함께 쳤다면 나는 그 자리에서 심장이 멎었으리라. 엉겁결에 뒤돌아선 내 앞에는 1701호 여자가 마치 가엾은 유기견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 전 이걸 두고 가서..” 여자의 옆엔 좀 전에 잊고 두고 간 것 같은 가정용 수레가 비를 맞고 서 있었다. 여자는 마치 누군가의 절대 보아서는 안 되는 비밀스러운 치부의 순간을 눈감아주듯 “ 그럼 저 먼저 올라갈게요 “ 라며 얼른 수레를 끌고 사라졌다. 어쨌든 그녀가 분리수거장을 떠나자 나는 뒤로 감춘 손에 아까 그 정체 모를 녀석이 들려져 있음을 깨달았다. 천천히 쥐어진 물건을 올려다보았다. 손에는 커다란 보리굴비가 들려져 있었다. 나는 한동안 녀석의 희멀건한 눈알과 마주하고 있었다. 내 머리에서 빗물인지 땀인지 모를 것들이 뺌을 타고 녀석의 입으로 뚝뚝 떨어졌다. 도대체 왜 음식물을 종량제 봉투에 버리냐고 나는 속으로 원망 아닌 원망을 했다.
며칠뒤 모처럼 일찍 퇴근을 한 저녁상에 아내는 떡하니 굴비를 구워 내왔다. 순간 나는 구역질이 올라왔지만 간신히 참아내며 빨래를 개고 있는 아내에게 물었다.
“웬 굴비야?”.
“ 음 먹어봐. 진짜 영광 굴비야. 정말 맛있어. 지안이도 한 그릇 뚝딱했어..”
아내가 턱을 내밀어 소파에 엎드려 누워 책을 읽고 있는 딸을 가리켰다
“아니 이거 어디서 났냐고?”
“음 아래층 언니가 얼마 전에 먹으라고 두 접이나 줬는데 오늘에야 꺼냈네. 참 그 옆에 있는 김치도 언니가 직접 담가서 준거야 “
“자 잠깐 머. 누구라고 아래층? 1701호 말이야? “
“ 응. 왜?”
“ 그 집 안사람? 그 사람이 언니야? 당신보다 5살은 젊어 보이던데 “
옷을 개던 아내의 손이 멈칫했고 소파에 있던 딸 지안이 읽고 있던 책 때문인지 대화를 엿들어서인지 짤막하게 키득거렸다.
“ 나보다 2살 많아. 왜? 나도 옷 좀 사줘 봐 화장품도 바닥에 눌어붙은 거 겨우 떼내 쓰고 있구먼. 나도 이런 츄리닝 말고 명품으로 치장하면 절대 애 엄만 줄 모를 걸”
아내의 말투가 다소 뾰루퉁해졌다.
“근데 둘이 친했어?”
“ 음 작년까지는 사실 나도 데면데면했는데 올해 그 집 막내 애랑 지안이랑 같은 반 됐잖아. 이래저래 만나서 이야기하다 보니까 좀 통하는 게 많고 아침에 운동도 같이 하다 보니 찐 친해졌다니까. 매일 꾸미고 다니는 것도 부담스럽고 왠지 나랑 딴판일 것 같았는데 언니 되게 털털한 사람이야. 완전 화끈한 전라도 깽깽이 언니”
“ 근데 왜 나한테 얘기 안 했어 “
“ 당신이랑 그런 얘길 뭐 하려 해 내 사생활인데 그리고 언제 얘기할 시간이나 줬고. 가만 말 끊지 말고. 그리고 언니랑 나 고향도 비슷해. 내가 고창 살았었쟎어. 언니네 친정이 영광 이래. 그 굴비도 친정엄마가 보내준 거래. 근데 아저씨 아니 형부가 생선이라면 질색을 한대. 얼마 전에 너무 오래되어 못 먹게 된 굴비를 다 싸다 버렸는데 이튿날 또 보내셨다지 뭐야. 그래서 내가 달라고 했지 뭐, 하. 근데..”
아내는 이야기 봇다리가 터졌는지 개던 빨래를 내려놓고 식탁으로 올라와 마치 이제부터 본론이라는 듯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보고 마주 앉았다. ‘그래 그럼 그렇지 뭔가 있는 거야’라고 생각한 나는 그 순간 까지도 그 망신을 당하고도 아직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던 거다.
“근데 자기야 언니랑 그 집 형부 “ 아내는 호들갑을 떨며 말을 꺼냈다.
“ 어, 응 , 그래 어떻게 됐어 “ 나는 아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끼어들었다. 아내는 이 사람이 뭘 잘못 먹었나 하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 뭘 뭐가 어떻게 돼?”.
“ 아 , 아니야 계속 말해봐”
“ 응. 두 사람 만난 얘기 알아?”.
내가 알 턱이 있니. 계속 말해봐 나는 속으로 지꺼렸다.
“ 형부가 10단지 상가에서 꽤 큰 학원 하는 건 알지?”
스포츠 센터만 아니면 됐지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 사실 언니가 어려 보이는 부분도 있지만 원래 나이 차이도 꽤 나잖아. 언니가 이제 마흔이고 형부가 그래도 쉰은 훨씬 넘어 보이지? 그럼 몇 살 차이야 … 어쨌든 원래 선생님 하고 제자 사이었대. 언니가 재수하게 되면서 친척 집이 있는 서울로 올라왔었나 봐. 그때 형부는 목동인가 어디 학원에서 강사를 하고 있었고.. 근데 언니가 학원에서 왕따를 좀 당했나 봐. 지방에서 올라온 데다가 어쩌다 영광에서 조기잡이를 하는 집 딸이란 소문이 나면서 애들이 언니 보면 괜히 코 틀어막고 다니고.. 아 그래서 언니는 지금도 화장 열심히 하고 늘 꾸며 입고 다닌대. 왠지 자기 몸에서 정말 냄새가 나는 거 같아서. 어쨌든 그 사실을 알고 형부가 꽤 신경을 써줬나 봐. 그렇게 언니도 의지하게 되고 대학도 들어가고 나중에도 언니가 자꾸 찾아가게 되면서 제자하고 그렇고 그런 사이 되는 게 부담스러웠던 형부는 이래저래 피해 다녔는데 그렇게 완강하게 저항하는 형부를 무지 흔들었나 봐. 뭐 인정하기 싫지만 언니가 사실 한 미모 하긴 하잖아. 10년을 그렇게 쫓아다니면서 형부 혼삿길 자기가 다 망쳐놓고.. 아, 중간중간에 다른 여자 하고 만날라 치면 무댓보로 달려들어 방해하고 그랬대. 어쨌든 이렇게 결국 자기가 책임지게 됐대. 음 너무 재밌지. “
그러고도 아내는 계속 남의 집 일에 혼자 흥분해서 조잘조잘 이야기를 이어갔지만 내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언니의 친정엄마가 최근에 혼자되었다느니. 시골일을 정리하고 언니가 모실지도 모른다느니 그런 이야기를 했던 거 같기도 하다. 나는 그저 또다시 눈이 마주친 굴비의 초점 없는 눈알만을 바라보며 속으로 한 단어를 계속 중얼거리고 있었다. ‘영광.. 영광… 영감… 영감…. 영감 일 … 영감 일.. 영광 일…”
오늘도 나는 회식을 했다. 나는 점점 술이 약해진다. 그리고 어김없이 아파트 계단을 오른다. 10층에서 어떤 학생들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 변성기를 지난 중학생들의 걸걸거리는 음성은 도무지 무슨 단어를 내뱉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다만 그들이 무슨 말을 하든지 그 말보다 훨씬 많이 등장하는 ‘씨발’,’ 좆나’라는 단어만이 명확히 들렸다. 또 그들이 욕을 하는데 그게 화가 난 건지 즐거운 건지 두려운 건지 재밌는 건지 어떤 기분인지 파악할 수도 없었다.
한층 한층 올라가도 계단은 똑같은 구조가 나온다. 씨발 좆나, 이 집 자전거나 저 집 자전거나 다 똑같아 보인다. 나는 이 아파트란 주거공간을 한동안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어쩌면 평생을 벗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는 것도 모르는 것도 아닌 이웃주민들을 또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칠 것이다. 같으면서도 다른 이 사람들을 보며 나는 또 다른 오해와 이해와 적당한 무관심 속에서 살아갈 것이다. 어쩐지 그 와중에 ‘찐친’을 만든 아내의 기술이 부러울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