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자신에게도 가지치기가 필요하진 않은가
나는 계획을 하는 것을 좋아한다.
매년 단순한 디자인의 다이어리를 골라 구매하는데, 구매 기준은 일간 계획표의 페이지가 넉넉해야 하며 매달 월간 계획표와 일간 계획표가 붙어있어야 한다. 달이 바뀌면 내게 있는 몇 안 되는 큼직한 약속을 미리 작성해 두고 일간 계획표 페이지를 펼친 채 거실 테이블에 올려둔다. 그러면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커피를 내리고 청소기를 돌린 후 바로 하루의 계획을 작성할 수 있다.
내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거의 다 '어떻게 그러고 살아?!'라는 반응을 내놓지만, 나는 하루 일과표를 작성하지 않으면 몸이 전혀 움직이지를 않는다. 온종일 노래만 들으면서 공상에 잠겨있거나 침대 위에서 뒹굴뒹굴하기 십상이라 사소한 것도 다 계획표를 작성해야 하루를 허투루 보내지 않을 수 있다.
그런 나와는 정반대의 성향을 가진 분이 나의 시어머니다. 어머니는 번개모임을 좋아하시는데, 사실 극심한 계획형이며 내향인인 나에게는 조금 부담스럽기도 하다. 다행인 것은 어머니께서는 나를 배려해 그리 자주 연락을 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내가 죄송할 정도로 연락을 하지 않으셔서 가끔은 내가 먼저 나서서 남편에게 주말에 어머님과 식사 약속을 잡으라고 할 정도다. 내심 며느리와 종종 점심도 먹고 카페에 가서 수다를 떨고 싶으시다는 것을 모를 정도로 내가 눈치가 없지는 않다.
일을 그만두고 나는 어머니를 따라 지역문화원에서 열리는 소묘 수업을 신청했다. 일주일에 한 번, 2시간의 수업. 그렇게 나의 스케줄러에는 매주 소묘수업을 가는 날이 표기되기 시작했다. 잠시 소묘 수업에 대해서도 이야기해보자면, 나는 그림을 단 한 번도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었기에 첫날에 2시간 내내 켄트지에 선만 그었는데도 기분이 좋았다. 커다란 B4 켄트지에 오른팔을 부지런히 움직이며 가로로, 세로로, 대각선으로 선을 그으면 하얀 도화지가 점점 "내"가 그린 선으로 채워지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느릿한 수업 진도도 참 마음에 든다. 늘 조급한 마음을 가지고 나 자신에게 쫓기듯 살아왔던 터라, 4번의 수업을 들으면서도 아직 네모난 상자의 채색을 끝내지 못했지만 불만은 손톱만큼도 없다. 느긋하게 그림을 그리는 과정 역시 선생님이 '계획'하신 초보자를 위한 과정이라는 사실이 내심 흡족하다.
그날 계획에 없었던 어머니와의 외출이 내가 반드시 기록해야 하는 날이 되리라는 것을, 수업이 끝난 후 차를 몰고 어머니를 모시러 갈 때까지는 알지 못했다. 어머니와 점심으로 정말 맛있는 코다리 냉면을 먹고, 작년에 추천받았지만 아직 가보지 않은 카페로 이동했다. 커다란 저수지 옆에 있는, 시골의 풍경에 둘러싸인 카페였다. 사실, 이 카페에 오는 길 또한 나에게 큰마음의 울림을 주었지만 그것에 대한 기술은 나중으로 미루겠다.
2층까지 있는 거대한 규모의 카페에 들어가자 저수지를 향해 나있는 커다란 창이 눈길을 사로잡았고, 바깥쪽 담벼락에 창틀을 의식해 키운 듯한 나무가 가지를 아치형으로 늘어뜨리고 있어 창문은 마치 커다란 액자처럼 보였다. 굉장히 신경을 많이 쓴 인테리어에 감탄하며 카페를 둘러본 후, 주문한 커피와 디저트가 나오면 가지고 2층으로 올라가자는 어머니의 말에 잠시 벽 쪽으로 붙어 분주히 커피를 내리는 바리스타를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께 카톡이 온 것은 상자에 명암을 채우는 두 번째 단계를 막 배워 내 나름 열심히 손에 힘을 줬다가 뺏다 하며 부지런히 연필을 움직이고 있을 때였다. 소묘 수업이 끝난 후 점심으로 냉면을 먹으러 가자는 어머니의 말에 나는 '네!'하고 간결하게 답을 보냈고, 곧이어 '우리 집 주차장으로 와라~'하고 답이 왔다. 일부러 소묘 수업을 듣는 날을 골라 불러주신 건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그 순간 어머니께 감사했다. 아마 집에서 뒹굴거리고 있었다면 나는 계획에 없던 외출에 꽤 괴로워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외출이 예정된 날이었고, 그렇기에 나는 다행히 이 정도 돌발 상황은 그나마 가볍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커피나무 정말 잘 키웠다!
어머니께서 굉장히 신난 목소리로 감탄하시기에 나도 따라 고개를 돌려 눈앞에 있는 커다란 화분을 바라보았다. 굵직한 가운데 기둥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가지를 뻗은 커피나무는 내 키보다 좀 더 높았다. 커피 열매가 많이 맺혀있다고 하셔서 자세히 들여다보니 녹색의 동글동글한 열매들이 옹기종기 매달려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커피나무에 대한 나의 감상은 '우와, 진짜 잘 키웠다.' 정도의 창의력 없는 심심한 말 뿐이었다. 언젠가 베란다에서 키울만한 작은 나무를 하나 들여오고 싶다는 생각만 속으로 삼키는, 아직 제대로 꽃화분 하나 키우지 못하는 사람이기 때문일까. 내 눈에는 밖에 있는 나무와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하지만 베란다에 자신만의 화단을 가지고 계신 어머니께서는 나와는 커피나무를 보는 시각이 완전히 상이했다. 잘 관리된 커피나무를 찬찬히 훑어보는 어머니의 눈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이사 오시기 전 키우셨던 커피나무에 대해 이야기하시면서, 커피나무를 잘 키운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이 나무를 이만큼 키워내기까지 얼마나 노력했을지에 대해 이야기하시며 가지치기를 신경 써서 해서 그런가- 하고 덧붙이셨다.
그제야 내 눈에 사방으로 뻗어나간 가지들이 서로 부딪히지 않도록 층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 보였다. 가지를 따라 나무의 몸통 쪽으로 시선을 옮겨 자세히 들여다보자 중간중간 가지치기 된 흔적이 보였다. 오밀조밀 모여서 익어가는 커피나무 열매가 다시 보였다. 잘 관리된, 이 생명력 넘치는 식물이 만들어낸 열매라는 결과가 내 마음을 흐붓하게 만들었다.
문득 열심히 계획만 세우는 나 자신에게도 '가지치기'가 필요하진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계획만 많이 세운 것은 아닐까. 계획대로 일이 흘러가는 것은 참 흡족하지만, 시간에 쫓기거나 예상치 못한 일로 인해 계획에 차질이 생기면 감당하기 힘든 스트레스가 나를 덮치곤 한다.
당연히 목표하는 바가 있다면 적절한 계획과 꾸준한 실천, 인내심, 끈기가 필요하다. 잘 세운 계획이라는 지도를 가지고 목적지를 향해 힘차게 발을 옮겨야 한다. 하지만 그 목표에 도달하기까지 거쳐가야 할 수많은 단계들, 어느 것 하나 쉽지 않은 그 단계들을 거쳐갈 때 계획대로만 할 수 있을까? 삐뚤빼뚤한 나의 시행착오를 돌이켜보면 계획대로 된 것은 거의 없다. 그런데도 나는 상황에 맞춰 계획을 수정하거나 딱히 중요하지 않은 일을 적절히 솎아내기보다는 나 자신을 게으르다고 탓하며 닦달하기 바빴다.
분명 내가 커피나무를 키운다면 열매를 단 하나라도 맺게 하기는커녕 이파리가 생기기도 전에 말려 죽일 것이 뻔하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나도 모르게 바쁘게 일할 때 작성했던 계획표를 펼치고 있었다. 빼곡하게 적혀있는 하루일과, 형광펜이 그어져 있는 완수된 일들 (그중에는 굳이 할 필요가 없는 일도 있다), 결국 물리적으로 시간이 없어 포기해야만 했던 일들 (차라리 이 일이 내 인생에 더 중요했을지도 모른다), 그로 인해 내 몸에 나타난 스트레스의 흔적들 (이석증, 잦은 두통, 위염). 정녕 가지치기의 흔적은 거의 보이지 않는 계획표가 눈앞에 펼쳐졌다.
그래서 이 글을 쓰기 위해 찍어온 커피나무의 사진을 다시 천천히 보며, 나는 일단 되든 안 되든 나 자신을 커피나무를 키우듯 키워보자고 다짐해 본다.
잘 짜인 나의 하루 일과에서 때로는 집중이 되지 않아 유독 버거운 일은 덜어내 보고,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나에게 충격을 줄 우연한 계획을 더해보자고.
예정에도 없었던 시어머니와의 데이트에서 우연히 커피나무를 만나 뜻하지 않게 나의 계획에 대한 고찰을 하게 된 것처럼.
예상치 못한 만남 또는 사건을 좀 더 너그러이 받아들여보며, 목적지로 향하는 길을 좀 더 단단하고 다채롭게 만들어 보자고.
그렇게 계획의 가지치기를 통해 이로움만 얻어 열매를 맺을 가지를 뻗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