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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파수꾼> 리뷰: 권력의 우리(cage)에서

권력투쟁의 사슬을 끊는 생활운동을 꿈꾸며

by 후추 Feb 14. 2025

  얼마 전, 김포행 비행기 안에서 혼자 영화를 보았더랬죠. 넉넉히 1시간은 좁은 의자에 엉덩이를 끼워 앉아 있을 테니, 영화만큼 좋은 게 없습니다. 가끔은 어떤 이와도 연락을 주고받을 수 없고, 모든 세상사와 순전히 단절된 고독이 좋을 때가 있습니다. 나의 의도와 무관하게 그물에 갇힌 물고기처럼 온라인 그물(web)에 갇혀 꼼짝할 수 없을 때가 많기 때문이죠. 무의식적으로 보는 메신저와 유튜브, 뉴스에서 벗어나 가부좌를 틀고 오롯이 나에게만 집중하는 느낌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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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파수꾼>을 봤습니다. 이제는 스타가 된 이제훈 배우와 박정민 배우의 신인 시절의 연기를 볼 수 있는 영화입니다. <파수꾼>은 남자 고등학생 3명의 우정을 그린 내용입니다. 2011년에 개봉한 작품이기에, 비슷한 어간에 남고생이었던 저로서는 공감되는 장면이 참 많았습니다. 남고 특유의 학교 분위기와 친구 관계까지 그때의 기억이 소환되었죠. 하지만 유쾌한 분위기는 아니었습니다. 눈에 보이진 않지만, 친구 사이에도 늘 긴장은 존재했으니까요. 야간 자율학습까지 12시간 넘게 사춘기 남학생들이 좁은 교실에서 지내다 보면 미묘한 갈등이 일어나기 십상입니다. 좁은 우리에 갇혀 스트레스를 받다 보니 권력을 둘러싸고 서열 경쟁을 하는 짐승처럼, 야수처럼 변합니다. 좁은 동물원 사육장에 갇힌 맹수가 우리 주위를 빙빙 돌며 정형행동을 하는 것처럼, 학생들도 이상행동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고, 아주 사소한 행동 하나가 트리거가 되어 폭력으로 번지기 일쑤입니다. 쌍욕과 멱살잡이는 일상이 됩니다.


  사실 <파수꾼>에서 다루는 주제도 그와 같습니다. 그건 권력과 폭력의 관계이며, 소통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세 친구는 서로를 애정하지만, 세 친구는 평등한 관계 위에 세워진 게 아닙니다. 그들 사이에도 보이지 않는 힘의 관계는 늘 존재합니다. 극중 이제훈은 박정민의 머리를 자주 쓰다듬습니다. 머리를 쓰다듬는 행위는 상위에 위치한 권력자가 아랫사람에게 할 수 있는 행동입니다. 마치 우두머리 알파독이 약한 개에게 마운팅을 하면서 서열 관계를 확실히 정리하는 것처럼요.


  힘에서 우위를 가진 자가 대장 노릇을 할 수 있는 또 다른 집단은 군대입니다. 이런 남초사회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한 가지뿐입니다. 선후임 서열관계를 확실하게 체화하여 A급 군생활을 하면서 짬밥을 먹는 것입니다. 선후임 관계를 명징하게 하고 선임의 심기를 거슬리지 않게 하는 방법을 후임에게 전수하며 대우를 받습니다. 그렇게 체제질서에 순응하며 군 생활을 하다 A급으로 불리고, 그렇지 않으면 폐급, 고문관이 됩니다. 빠르게 권력서열을 체화하고 습득하며, 이 사회 시스템을 무너뜨리지 않는 게 중요합니다. 헌병대 수사과에서 근무하며 병내 부조리에 대해 분노하면서도, 속내로는 "요즘 애들은 개념이 없어."라는 하던 제 모습도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어려서부터 남자들은 권력과 힘을 향한 확고한 의지를 배웁니다. 사회생활을 하는 동안, 늘 그런 방식의 사고와 체계를 신앙하고 숭배합니다.


  그런 면에서 지난 12.3. 계엄도 권력과 폭력을 숭배하는 의식의 일환입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누구보다 권력욕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무지막지한 검찰 조직의 꼭대기에 있던 사람이었고, 왕(王)을 지향하며 대통령이 된 사람이니까요. 그가 권력을 숭배하는 독실한 신앙인이었다는 게, 계속 밝혀지고 있습니다. 자신의 실력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총칼을 들이댄 것을 두고, 여전히 계엄령이 정당한 대통령의 권한행사라고 주장하는 게 명백한 증거입니다.


출처: 연합뉴스/AFP출처: 연합뉴스/AFP


  하지만 그건 남성 세계의 문제만은 아닐 겁니다. 어떤 젠더를 막론하고 무기는 다양합니다. 어떤 이들은 아름다운 미모로, 또 다른 이들은 탁월한 지적 능력으로 그런 우위관계의 정점에 서기를 바랍니다. 젠더를 떠나 인간과 비인간 동물 사이에서도 그런 힘의 불균형이 일어납니다. 반려동물에 대한 애정은 훈련이나 사회화 학습과도 별개로 나타납니다. 애정이 있다고 한들, 그 방식마저 옳은 것은 아닙니다. 반려인의 심기를 반려동물의 거슬리는 행동 하나하나를 제지하고, 통제하는 모습은 제게는 너무나도 흔하게 목격됩니다. 우린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요?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우리는 갖가지 권력 아래 노예처럼 살아간다. 그 권력은 아버지이고 형이고, 선생이고 상관이고, 사장이고 과장이고, 대통령이고 시장이다. 그것은 모두 불평등한 권력관계의 지배자이다. 그 아래 피지배자는 권력관계를 없애 평등한 관계를 만들고자 하지 않고, 자신이 언젠가 지배자가 되기만을 기다렸다가 자기에게 권력이 돌아오면 더욱 더 엄청난 권력을 행사한다.

- 박홍규, <신의 나라는 내 안에 있다> 해제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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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기 때문에 톨스토이는 성서를 읽었다고 합니다. 톨스토이에게 있어서 성서는 아나키즘의 정수인데, 아나키즘이 권력의 해체를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톨스토이는 예수가 오래전부터 반권력을 지향했고, 비폭력 운동을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간디가 성서를 읽은 후, 비폭력(무)저항 운동을 했다는 건 너무나도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예수가 헤롯 왕가의 폭정, 로마의 거짓 평화(Pax Romana)의 폭력을 폭로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렸다는 건, 존 요더의 <예수의 정치학>에도 잘 나온 이야기입니다. 아나뱁티스트, 퀘이커 교파에서 예수의 비폭력(무)저항을 생활운동으로 실천했다는 사실은 무척이나 인상 깊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종교개혁을 하나의 신앙운동으로 이해했지만, 아나뱁티스트가 생활운동으로 받아들였다는 얘기를 마음에 이따금씩 되새기고는 합니다.


  이러한 생활운동을 비인간 동물을 위해서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준비 중인 반려동물 사업도 하나의 작은 생활운동이 될 수 있기를 꿈꿉니다. 우리 교회의 목회도 그런 방향성을 갖고 있습니다. 목사의 사목활동은 인간 신자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생명을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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