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겐슈타인에서부터 땅콩이까지
비트겐슈타인은 "의미를 인간 내면의 정신 활동이라고 부르는 것만큼 그릇된 생각은 없다"라고 했습니다. 아마도 주체(subject)란 시공을 초월한 정신이 아니라, 공동체와 사회 속에 축적된 전통 속에서 살아가는 종속된 존재(subject)라는 뜻일 겁니다.
나는 언제부터 환경과 동물에 '의미'를 두게 되었는지 돌아보았습니다. 대학 시절부터 윤리에 관심이 많았기에 환경 윤리도 다른 윤리 분과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했더랬습니다. 그것은 자연 세계에 대한 관심이라기보다는 외부 세상에 대한 관심이었습니다. '나 홀로' 사는 세상이 아닌, '너'와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을 향한 관심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결혼을 통해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는 말도 결코 과장이 아닐 것입니다.
인간 아닌 동물과 한 집에서 잠을 자고 밥을 먹는 일도 매일이 새로운 배움의 연속이었습니다. 부끄럽게도 긴 시간 동안 나는 인간만이 꿈을 꿀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잠든 땅콩이가 악몽을 꾸는 듯 낑낑대며 허공에서 뜀박질하는 모습을 보고 놀랄 수밖에요. 인간과 하등 다른 게 없는 강아지를 관찰하고 살펴보며 그들의 결핍을 채워주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던 건 우연이 아닙니다.
오늘도 나는 여러 사람들을 만나 사업에 대해 논하고,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며 그 세상으로 한걸음 더 다가갑니다. 지난 시간, 내가 보낸 시간과 역사는 환경과 동물에 관심을 기울이도록 나 자신을 인도해 왔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스스로 선택한 것 같지만, 의미와 목적을 '무의식적으로' 선택했다는 점은 경이롭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나는 시간에 의해 형성된 '역사적 자아'일 것입니다. 문득 내가 왜 이 일을 하고 있는지 묻게 됩니다. 우연처럼 보이지만, 사건을 초월해 있는 의미와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