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회차. 왜 살아야 하나요?
하루종일 몇 시에 병원을 가야 할지 기다렸다.
오늘은 꼭 물어보고 싶은 질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신과 선생님은 내 질문에 과연 어떤 대답을 해주실까?
나는 지금 데자뷔라고 해야 할지 예지몽이라고 해야 할지
과대망상증이라고 해야 할지의 것들에 시달리고 있다.
시달리고 있다는 표현을 써야 하는 걸 보니
병의 증상에 더 가깝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상상의 대부분은 거의 생의 마지막 모습.
검은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내 모습을 타인의 모습처럼 지켜본다.
죽기 일보 직전에 병실에 누워서 가족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습.
울음바다가 된 상태에서 내가 눈을 감는 아주 슬프고 고통스러운 모습이다.
그 상상이 너무 생생해서 현실에서도 몸이 굳고 눈물이 나고 먹먹하다.
이렇게는 도저히 잠을 잘 수 없는 지경이다.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프고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생각을 안 해야지 안 해야지 하지만 이미 생각을 한 후에 남은 잔상이
떠돌아다니면서 머릿속을 너무 괴롭히기 때문에 굳게 다짐을 해봤자
별로 도움이 되고 있지 않다.
또 다른 상상은 마찬가지로 엄마가 죽는 모습, 아빠가 죽는 모습.
계속 뭘 하던지 간에 모든 질문과 상상의 끝이 결국은 죽음과 공포다.
무섭고 슬픈 느낌이 계속된다.
이런 상상을 많이 한다고 해서 죽고 싶다거나 하는 마음이 드는 것도 아닌데
난 정말 죽고 싶지 않은데 왜 이런 기분에 휩싸여 고통스러워하는 걸까.
가족들이 죽는 건 내가 죽는 일보다 더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다.
그게 너무 싫어서인지 머릿속에 더욱더 각인되어 버린 것 같기도 하다.
생각이 줄지 않는다. 아무리 마음을 먹어도 좋아지지 않는다.
사람이 좋은 생각을 할 수도 있지 않나? 다들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살지?
뭐 로또에 당첨되는 상상을 한다던지, 더 큰 집으로 이사를 가는 상상을 한다던지,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는데 나는 왜 그런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생각을
조금도 할 수 없을까. 부정의 기운을 의식적으로 전환시킬 수도 없다.
왜 항상 죽음, 슬픔, 우울한 생각을 할까?
이게 지금 내가 우울증이라는 병을 앓고 있기 때문에 그런 걸까?
한참을 뜸을 들이다 준비해 간 질문을 던졌다.
- 우리는 그럼 왜 살아야 하나요?
- 정신과에서는 뭐라고 대답을 해줄 수 있나요?
-> 하하하 사람마다 다르죠. 왜 살아야 되는지에 대해서... 왜 사는 것 같아요? 어차피 다 죽는데...
- 그러니까요. 모든 끝은 결국 죽음으로 가니까 이럴 바엔 차라리 그냥 고통스럽지 않게 죽는 게 낫겠다.
- 죽음 이후의 고통을 경험할 바에야 가족들보다 내가 먼저 죽는 게 낫겠다.
- 근데 또 막상 죽자니 그것도 너무 슬프고, 남아있는 가족들도 슬프고, 죽는 나도 억울하고,
- 아직 못 해 본 것도 많은데, 안 해 본 것도 많고... 그래요.
-> 원래 죽음은 공포스럽고 두렵고 슬프게 만들어져 있어요.
-> 안 그랬으면 다 죽었죠.
-> 죽는 거 생각하면 다 무섭잖아요. 그래서 쉽게 죽지 않도록 하죠. 생명의 본질이에요.
-> 살고 싶은 본능, 죽음은 무섭고 살고 싶게 끔 하는 것도 본능.
-> 본능적으로 배가 고프면 우리가 뭔가 먹고 졸리면 잠을 자잖아요?
-> 수면, 식욕이 본능인 것처럼 생명에 대한 본능이 있어요. 살고자 하는 본능.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정신과 선생님은 뭐라고 답을 해주실지 기대했는데
질문 이후 의외로 가벼운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왜 사는 것 같은지는 스스로의 단단함에 차이가 있을 듯 보였다.
지금의 나는 죽지 못해 사는 수준...
그 의미 또한 사람마다 다르겠지.
나는 어떤 생각을 하며, 어떤 마음으로 이 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다시금 인생을 한 번쯤은 돌아봐야 할 때가 지금이라면 꼭 짚고 넘어가고 싶다.
언젠가 우연히 보게 된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에서 왜 사는 거냐? 는
질문이 나온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때 스님은 단 번에 '왜 사느냐' 하는 것은 답이 아니라고 하셨다.
'그냥 산다.'
사는데 이유가 있어서 사는 게 아니라는 거다.
이유가 있어야 산다?
사는데 이유가 있나?
태어나는 데 이유가 있었나?
왜?라는 의문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는 것.
존재 자체가, 사는 게 먼저라는 결론이었다.
법륜 스님의 말씀도 선생님의 말씀도 내 질문의 무게보다
훨씬 가벼운 질문이자 답으로 돌아왔다.
나는 그저 살아 있기 때문에 살고자 하는 본능이 발동하는 중이다.
끝으로 가면 결국 죽음 밖에 남지 않기 때문에
질문을 해서도 답을 찾으려 해서도 안 되는 결론이 나왔다.
이왕 사는 거 멋지게 살아도 보고, 하고 싶은 것도 도전해 보고,
베풀기도 하면서, 몸도 마음도 건강하고 풍요롭게 지내면 좋은 것 아니겠는가.
죽음의 공포에 혼란스러웠지만 역설적으로 나는 누구보다 열심히 살고 싶어 했다.
그래서 그 공포를 어쩌지 못하고 공포에 파묻혀 버렸던 것인데
역시 회복하는 데는 적정량의 약과 시간이 필요할 듯 보인다.
-> 동글씨에게 이걸 증상이라고 얘기하는 이유는 너무 그 생각이 과도해서
-> 일상생활을 방해하기 때문이에요.
-> 내가 지금 태어났으니까 뭔가를 하고 생산적인 일을 하고 내가 나를
-> 계발시키고 사람들도 만나고 돈도 벌고 그런 어떤 일상생활을 해야 되는데
-> 본인은 그 시기에 그런 일상생활을 하지 못하고 생각에만 몰두하고 있는 거예요.
-> 그래서 치료를 하는 거죠. 약을 먹고 그 생각을 줄이려고.
왜 사느냐? 하는 문제보다 왜 치료를 하느냐? 하는 문제가 더 중요한 지금이다.
하루 일과 계획을 세워도 한 가지도 집중하지 못한다.
아침에 몇 시에 일어나고,
일어나면 바로 씻고,
가볍게 운동하고,
균형 갖춘 식사를 하고,
내가 하고 싶은 거 하루에 하나씩 해보고,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려 보고,
친구들을 만나 수다를 떨어 보고,
이 어떤 사소한 계획도 성공시키지 못한다.
하지만 사소하고 조그마한 거라도 일상에서 즐거움을 찾는다면
머릿속에서 떠다니는 죽음과 공포가 차지할 자리가 있을까.
긍정의 힘과 즐거움은 부정의 힘을 몰아낸다. 분명 그럴 수 있다.
지금 내가 누릴 수 있는 것들이 어마어마하게 많은데
느낄 수 있는 감정들이 어마어마하게 많은데
너무 많은 것을 놓치고 있는 지금이 아깝지 않나.
현재의 삶에 집중해야 할 때이다.
괴로움 없이 살고 싶다는 내 마음은 절대 불가능한 일에 도전하는 일일 것이다.
괴로움 없이 사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대신 괴로움을 견디는 힘을 키우며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고통 없는 삶을 없을 테니. 언제든 내가 마주할 고통을
견디고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있다면 어떤 것도 더 이상 무섭지 않게 될 것이다.
이 정도쯤이야! 하고 금방 넘기는 날이 올 수 있는 날을 기다린다.
15회차. 왜 살아야 하나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