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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글이 Oct 21. 2023

#18 '우울증 치료 일지' 17회차.

17회차. 불안을 냠냠

지키는 것과는 별개로 계획 짜기를 굉장히 좋아하는 나는 매년 플래너를 산다.

그리곤 일주일을 넘기지 못하고 흐지부지 되기 일쑤인 상황을 반복한다.

지키지 못하는 계획에 금세 좌절하기 때문이다.

그런 내가 다시 플래너를 쓰기 시작했다.

크게 하는 일이 없어서 쓸 내용도 없지만 그래도 새로운 시작이니 반가웠다.

반가웠다... 한 줄 사이에 과거형으로 끝난 걸 보면 알겠지만 이번 플래너도

금방 끝이 났다. 끈기란 찾아볼 수 없는 형상이다.

하지만 그런 나에게도 꾸준한 것이 있는가 하면 

바로 '냠냠 노트'를 소개할 수 있겠다.

내 친구들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는 이 냠냠 시리즈는 유명하다.

SNS도 하지 않는 나는 누구한테 보여주는 일은 절대 없지만

혼자만의 예술혼을 불태워가며 예쁜 음식 사진 찍기에 진심이다. 

1년 동안 내가 먹는 모든 것을 사진으로 촬영하고 

컴퓨터로 옮겨 연도별로, 월별로 나눈 냠냠 폴더에 넣어둔다.

그리고 휴대폰 메모장에 기록을 한다.

단, 중복된 음식은 빼고 말이다.

그리곤 12월 31일이 되면 휴대폰 메모장을 꺼내 

1년 동안 먹었던 음식 전부를 노트에 기록한다.

냠냠 폴더를 만든 지는 10년이 지났고,

냠냠 노트를 만든 지는 5년이 지났다.

올해도 이제 한 해를 마무리하는 의식으로 냠냠 노트를 꺼내 들었는데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졌다.

이걸 언제 다 적고 있지? 이거 왜 하고 있지? 같은 생각이 들면서...

이 노트를 다시 들춰보는 일은 여태 한 번도 없었고,

누구를 보여줄 것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런 찝찝한 생각이 들면서도 꼬박 하루를 다 써서 완성했다.

잡곡밥, 현미밥, 쌀밥 등 밥을 1년 동안 몇 종류 먹었는지.

국, 반찬, 배달음식, 음료수, 과자, 아이스크림 등

세세하게 나눠서 정리해 두었다. 

처음으로 팔도 아팠고, 올해를 마지막으로 이제 그만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작업이었다. 마음은 먹었는데 이미 시작한 탓에 

올해까지는 마무리. 정말 꼬박 하루가 걸리는 탓에

마지막날을 되게 쓸데없이 보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내년부터는 냠냠 폴더만 만들고 냠냠 노트는 접을 생각이다.

휴대폰에 목록을 남기는 것도 마찬가지로 접어야겠다.

그렇게 나는 오래된 이상한 강박 하나를 버렸다.


-> 버렸네요.

-> 본인이 가지고 있는 강박을 하나 깨고 

-> 이걸 내가 왜 하고 있지? 이런 생각이 든 건 좋은 반응이에요.


하지만 불안에 대한 강박은 여전하다.

하루는 갑자기 아빠가 눈에 실핏줄이 터져서 눈이 벌겋게 난리가 난 적이 있었다.

일요일이라 문을 연 병원도 멀리 있었는데 통증은 전혀 없다고 하지만

보는 사람이 어찌나 걱정이 되는지 혹시 아빠가 실명되진 않을까,

죽는 건 아닐까, 무슨 병에 걸린 건 아닐까. 불안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실핏줄 하나에 죽음까지 이어지는 생각을 끊어낼 수 없었다.

병원에 간 사이 너무 초조해서 견딜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병원을 다녀온 아빠는 본인도 아무렇지 않아서 괜찮고,

의사 선생님도 별 일 아니라고 약을 처방해 주셨다길래

그제야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울렁거리던 속이 진정되고 있었다.

가족들이 죽으면 어떡하지, 내가 가족들 없이 어떻게 살지.

내가 죽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한 동안 죽음에 대한 불안이 또 머릿속을 휘젓고 다녔다.

불안이 나를 좀 먹고 있다.


-> 죽음에 대한 두려움, 강박이 아직 너무 많은 상태라

-> 우리가 갈 길은 조금 많이 남았네요.

- 죽음, 죽음과 관련된 생각이 너무 무서워요. 생각 자체만으로도.

-> 보통 그래서 그런 생각을 잘 안 하고 살죠.

-> 죽음을 생각하면 당연히 다 무섭죠. 본능적으로 살고 싶죠 사람이.

-> 누군가 죽는다는 생각을 하면서 살지는 않고

-> 내일 뭐 하지? 이런 생각하면서 살아요. 보통은요.


보통 사람들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사는구나.

나는 보통 사람들처럼 생각한 지 얼마나 됐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살던 때가 있었나 싶은 지경이다.

무조건 죽음으로 통하는 뇌 구조가 너무 단순해서 슬펐고,

다른 사람들처럼 그런 소소한 생각을 하면서 살지 못함에 또 슬펐다.

약 부작용으로 손까지 조금 떨리고 있는데

이 떨리는 손이 내 불안한 마음을 대신 표현해 주는 것 같다.

그래도 긍정적으로 보자면 난 오래된 강박 하나를 버렸다.

그것도 스스로 이상함을 알아채고 말이다.

혹 누구나 자신만의 강박이 있다면 한 번쯤은 그것을 깨 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추천해 본다.

매번 음식을 앞에 두고 메뉴명을 일일이 찾아서 적지 않아도 되는

수고스러움이 없어졌다. 

가끔 사진 찍어 둔 걸 보면서 추억여행하는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싶은 요즘이지만, 훗날 이 음식 사진 강박도 지칠 때가 오면 

음식 영정사진을 찍는 일도 끝이 나겠지.

또 다른 강박을 부시러 갈 준비를 해야겠다.

나와의 싸움에서 이긴다는 말을 조금을 알 것 같다.


17회차. 불안을 냠냠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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