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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글이 Oct 21. 2023

#28 '우울증 치료 일지' 27회차.

27회차. 마지막 진료

나는 참 복이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평생을 살면서 그런 생각은 해본 적 없었는데 요즘의 나는 그런 생각이 마구 든다.

취업에 도전하는 것도 자꾸 아쉽게 뭐가 안 되니까 내가 운이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인가 싶어서 우울하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무기력해진다. 다이어트도 성공하고 힘내서 잘 버텨야 하는데 쉽지가 않다.

1년짜리 계약직에 들어가는 것도 쉽지가 않고, 

그렇다고 막연하게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지 않나.

그것도 나의 큰 욕심일까. 지금 이 몸 상태로는 어디서도 적응할 수 없을 것 같다.

겁이 난다. 갑자기 일을 하려는 것도 사회에 나가려는 것도 겁이 난다.

공무원 공부를 하기에도 막막하고, 시작하는 것이 어렵다.

부담감에 밤에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악몽을 꾼다.


백수 생활 중이라 엄마와 붙어있는 시간이 하루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엄마는 성격이 조용하고 부드러운 편인데, 아프고 난 후부터는 자꾸 앓는 소리를 하곤 한다.

내가 옆에서 보살펴 줘야 할 존재로 보호자 역할이 바뀐 지는 좀 됐다.

가끔은 엄마의 말에 가슴이 철렁하기도 한다.

자존감도 많이 떨어지고 아프기도 하니 삶이 얼마나 슬플까.

종종 엄마가 이제 살면 얼마나 더 살겠냐는 말을 하는데 그럴 때면 가슴이 무너져 내린다.

나도 진짜 애써서 힘내고 있는데 엄마가 그런 소리를 하면 힘이 빠질 수밖에 없다.

그런 나는 최선의 힘을 다해서 엄마를 달래고 있다. 맛있는 것도 먹으러 다니고,

좋아하는 가수의 콘서트를 보러 다니고, 재밌는 영화도 보러 다니면서

하루하루 즐거운 일들로 채워가자고 말하며, 일상에서 행복을 찾아나가고 있다.

엄마랑 나는 대화가 끊이지 않는 편인데 어제는 3시간을 넘게 소파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눴다. 주 내용은 엄마는 이제 20년도 더 못 살 것 같다는 이야기...

그게 무슨 소리냐며 누가 50대에 그런 소리를 하냐 엄청 뭐라고 했다.

그럴 때마다 계속 죽음의 공포가 몰아쳐서 내가 얼마나 불안하고 무서운지

엄마는 모르는 걸까. 차마 엄마한테 그걸 말할 수는 없었다.

여러 가지로 머리가 아픈 상황이다.


더 이상의 힘은 남아있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또 일이 터졌다.

아빠가 사기를 당한 것이다. 돈을 떼였다. 돈을 받아올 수 있다고 말은 하지만 너무 막막하다.

엄마는 정기검사에서 간에 혹이 발견되었다. 정밀 검사를 받아야 해서 또 검사를 진행하고

결과를 기다리는 중이다. 너무 걱정된다. 인생이 이렇게 재수 없어도 되는 일인가.

가족들 앞에서는 괜찮은 척하고 있지만 너무 걱정돼서 진짜 돌아버릴 것만 같다.

자꾸 안 좋은 생각을 하게 되고, 차라리 내가 먼저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브런치스토리 글쓰기도 완전 중단, 세상에 나올 수 있을 글일지 조용히 묻힐지 모를

글을 쓰는 것에 대해 회의감이 들고 부정적인 생각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약도 안 먹고, 며칠을 씻지도 못하고 아예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듯한 느낌까지 들었다.

그냥 다 신경 쓰기도 싫고, 엄마 아픈 게 가장 큰 걱정인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

굉장한 스트레스로 다가온다. 솔직히 돈을 떼인 것은 그 돈이 없다고 당장 죽는 건 아니니까

말 그대로 기다려볼 수 있다고 치는데 큰돈이기에 돈에 관련된 스트레스도 은근 장난 아니게 힘들었다.

하루하루가 평화롭거나 내일이 궁금해야 하는데 나는 지금 되게 억지스럽다는 느낌이 든다.

억지로 뭔가 행동하고, 먹는 것도 억지스럽고, 자는 것도 억지스럽고 힘들다.


-> 우울증이 다시 심해졌네요.

-> 막연하게 있기보다는 할 수 있는 걸 찾아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 면접 보러 다니고 지원서 넣고 하면 다 떨어질 것 같아요.

- 딱히 해 놓은 것도 없고 하니까 자신 없고요.

-> 근데 너무 도전을 안 했어요.

-> 미리 성급히 생각하고 안 될 거다 하지 말아요.

-> 뭐든지 어디에 소속이 되고 일을 하고, 돈을 벌고 하면서 뿌듯한 느낌이 들어야 하는데

-> 계속 기다리기만 하는 걸로는 한계가 있어요.

-> 일단 약을 증량해서 다시 볼게요. 이 기간 동안에는 빠트리지 말고 잘 챙겨 먹어요.


진료 후 말 그대로 겨우 겨우 버티고 있다.

버티면서 문제들을 하나씩 풀어가고 있다.

억지로 힘을 내면서 책을 읽는다던지, 글을 좀 써본다던지 하면서 말이다.

매일 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꾸준히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사기를 당한 아빠 때문에 열불이 터져 화병이 날 것만 같았다.

가장 속상한 사람은 아빠겠지만 피가 말라가는 듯한 기분이다.

이후에 돈을 조금 돌려받을 수 있었고,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야 

나머지 돈을 다 돌려받을 수 있어 사건이 종료되었다.

엄마의 건강은 괜찮은 듯 괜찮지 않다. 검사를 해보면 이게 문제가 된다 그러면

다음엔 저게 말썽이고, 또 다음에는 이게 문제, 저게 문제, 검사를 할 때마다

좋은 소리를 듣는 날이 없다. 검사를 하러 갈 때마다 마음이 쓰이고

결과를 들으러 가는 날에는 긴장이 돼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다.

간에 혹이 나서 정밀검사를 해보니 괜찮단다. 다행이다.

근데 간 수치가 너무 높아서 간 약을 먹어야 하는 상황이고,

콩팥에도 혹이 났는데 일단 괜찮고, 추이를 지켜봐야 하는 상황이다.

자궁근종, 비타민D 부족 등 별별 문제들이 줄 지어 기다리고 있다.

나까지 슬픈 티를 내면 집안 전체가 너무 우울해질 것 같아서 

억지로 기운을 내고 있다. 

진짜 조금씩 정말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돈을 돌려받았고, 엄마도 크게 이상이 있는 건 아니라고 하니까 한결 안심할 수 있겠다.

나는 내가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분야를 선택해 한 곳에 지원서를 넣었다.

결과는 합격.

합격을 했다. 나에게 드디어 회사 생활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이다.

급여가 많진 않아도, 사무실과 내 책상을 가질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잘 해낼 수 있을까 걱정이 되긴 하지만

언제까지고 집에서 엄마와 둘만의 시간을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도 이제는 사회인으로서의 활동을 해야만 한다.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하겠다고 했다.

일하다 보면 남들처럼 좀 평범하게 잘 살 수 있지 않을까 싶은 기대를 하게 된다.

오늘이 백수로서의 마지막 진료였다.

다음 진료 때는 또 다른 우울하고 불안한 이유들을 잔뜩 들고 올 것인가.

아니면 많은 부분들이 회복되어 평범한 회사원의 길로 들어가게 된 상황을 들고 올 것인가.


27회차. 마지막 진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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