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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성순 Jul 06. 2024

눈의 섬, 홋카이도(2)

노보리베츠 료칸 이야기

식사 후 역 앞으로 돌아와 예약한 료칸에서 나온 셔틀버스를 탔다. 다른 일행 없이 달랑 우리 둘만 태운 자그마한 밴은 역 앞의 소읍을 벗어나 눈 쌓인 산길을 달린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강원도의 겨울 풍경과 비슷하지만 묘하게 다른 느낌이다. 산세가 다르고 서 있는 나무들이 달라서인 것 같다. 마치 비슷하게 생겼지만, 분위기는 전혀 다른 두 사람을 보는 것 같다. 

버스는 점점 깊은 산 속을 향해 들어가니 산은 높아지고 계곡은 깊어진다. 길옆 낭떠러지 아래에 까마득히 보이는 눈 쌓인 계곡을 걱정스레 살피며 가다 보니 어느덧 어둠이 밀려온다. 오는 동안 집은 한 채도 보이지 않고 오가는 차도 별로 없는 적막한 도로다. 운전기사는 한마디 말이 없다. 산모롱이를 돌 때마다 불안감이 점점 더해간다. 달리는 차의 문을 열고 뛰어내리는 상상을 할 때쯤, 사진에서 잠깐 본 듯한 건물이 나타났다. 작은 마을 정도를 예상했으나 료칸은 인적조차 없는 길가에 혼자 서 있다. 료칸의 뒤편은 큰 산자락 아래에 면해있고 맞은 편에는 산속으로 가는 길이 있는데 눈이 쌓여 길이 잘 보이지도 않는다. 아무래도 지나치게 조용한 곳으로 온 듯하다. 

어둠 속에 서있는 료칸의 간판

료칸은 예상보다 규모가 작았다. 현관에서 신발을 벗고 들어가면 프런트와 작은 로비가 있고 계단 옆에는 엘리베이터도 있다. 료칸 안은 지나치게 따듯하고 노곤한 분위기다. 

데스크 직원은 친절하고 긴 설명을 한 후 방으로 안내했다. 엘리베이터는 3명이 탔는데도 좁게 느껴질 정도로 작다. 규모도 작은 3층 건물에 엘리베이터가 있는 것도 이상하고 맨발로 엘리베이터를 타는 것도 특이한 경험이었다. 

오리 눈사람이 누군가를 기다리는듯 현관 창가에 앉아있다
입구는 자동 미닫이문이다. 들어가자마자 신발을 벗는 구조

3층의 좁은 복도에는 몽롱한 음악이 흐르고 있다. 오르골 소리처럼 단조롭고 졸리는 듯, 혹은 졸음을 유도하는 듯한 음악이 끊일 듯 느리게 이어지고 있다.

방은 생각보다 넓다. 커다란 검은 좌탁이 방 한가운데 자리 잡고 빈백 소파 2개, 작은 응접세트, 그리고 미닫이 벽장이 있는 다다미방이다. 방 한쪽에는 폭이 1m가 안 되는 벽감이 있다. 벽감 안에는 표면을 거칠게 손질해서 아직 살아있는 듯한 나무를 기둥처럼 천장에 닿게 세워두고 작은 선반이 제단처럼 붙어 있다. 선반 위에는 작은 항아리가, 바닥에는 큰 항아리가 있다. 족자가 걸려있고 조명등까지 별도로 설치되어 있다. 각별히 신경 쓴 인테리어인가 싶기도 하지만 종교적인 느낌의 묘한 분위기를 풍긴다.


벽감 한가운데 세워진 생나무 기둥이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아침, 저녁 식사는 방으로 가져다준다. 전채, 메인, 디저트로 세 차례에 걸쳐 나오는데 다양한 모양의 그릇에 소꿉장난처럼 두어 개의 음식이 예쁘게 놓여있다. 한참을 감상하고 품평하고 사진 찍은 후 한 개씩 먹는다. 몇 조각 되지 않는데도 이것저것 먹다 보면 배가 부르다. 그러나 우리 식으로 푸짐하게 먹고 난 후의 배부름과는 다르다. 


                             다양한 모양의 그릇과 쟁반에 음식이 담겨 나온다


식사와 함께  음식 순서와 설명이 적힌 종이를 주는데  '영화6년 겨울'이라고 적힌 걸로 봐서 매년 새로 만들어 사용하는듯하다  


노보리베츠의 민속놀이 세츠분 행사

저녁 식사 후 료칸 1층에서 민속놀이인 세츠분 행사가 있었다. 잡귀를 쫓기 위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해 주는 공연이란다. 우리의 지신밟기와 비슷한 풍속으로 보인다. 내가 어릴 적에는 시내에서도 정초에 골목을 돌아다니는 놀이꾼이 있었다. 골목 초입에서 신명 나는 농악 소리가 들리면 애, 어른 할 것 없이 대문을 열고 골목을 내다본다. 6~7명의 놀이꾼이 탈을 쓰고 농악을 울리며 다니는데 집집마다 들어가 마당에서 신나게 놀고 갔다. 지금은 농촌에서도 거의 사라지고 있다고 하니 이제 옛 추억을 되짚어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성행위 흉내 후 임신을 확인하는 동작을 반복한다
빨강, 파랑 오니가 춤추고 나면 진행자들이 땅콩이나 부적을 뿌려준다. 손에 든 방울은 우리의 무속신앙을 떠올리게한다.

이곳에서는 시간 맞춰 조용히 료칸 로비로 들어와 공연을 시작한다. 먼저 사회자 역할을 하는 사람이 공연 소개를 하고 나서 단소보다 짤막한 관악기를 불며 흥을 돋운다. 음악에 맞추어 남녀 탈을 쓴 한 쌍이 큰 남근 모형을 들고나와 성행위 하는 흉내와 임신이 되었는지 남자가 여자의 배에 귀를 대는 단순한 동작을 여러 번 반복한다. 원시적 남근 숭배 의식과 노골적이고 원색적인 표현 방식은 이질감을 느끼게 한다. 

이어서 파란 탈과 붉은 탈을 쓴 오니(도깨비) 둘이 나와 방망이를 들고 큰 소리를 내며 춤을 춘다. 끝날 때쯤 땅콩과 부적을 던져주기도 하고 손에 쥐여 주기도 한다. 그들은 떠나면서 센겐공원에서 본 공연이 있을 예정이니 오라고 한다. 

센겐공원의 위치를 물어보고 료칸을 나서니 앞 도로는 텅 비어있고 사방이 어둡다. 흐릿한 가로등에 의지하여 산길을 걸어가다 보니 건물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좀 더 올라가자 편의점이나 식당, 기념품 가게, 호텔들이 줄지어 서 있다.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산속에 이런 동네가 형성되어 있다는 게 좀 놀랍다. 내가 묵는 료칸이 혼자 그렇게 뚝 떨어져 있는 게 의아했는데, 이 지옥 계곡 관광 촌의 초입에 있는 거였다. 좀 많이 떨어져 있긴 하지만….


떡치는 퍼포먼스와 나누어준 동그란 떡

공원에는 꽤 많은 사람이 운집해 있다. 대부분이 관광객들이다. 처음 공연은 료칸에서 본 것과 같은 남녀 한 쌍과 도깨비가 등장하는 공연이 재연되었다. 이어서 떡메치기 공연인데 네 명의 남자가 큰 나무망치 모양의 떡메를 들고 절구의 떡을 치면서 춤을 춘다. 한참을 치고 나서 준비된 떡을 나눠준다. 줄이 너무 길어 차례를 기다릴 엄두도 못내고 어떤 떡인가 궁금해 하는데 귀에 익은 한국어가 들려 돌아다보니 떡그릇을 들고 있다. 떡은 새알심 모양으로 조청을 뿌렸다. 양해를 구하고 사진을 찍었다.

이들의 공연을 보면, 내용은 우리와 비슷하지만 표현하는 방식은 사뭇 다르다. 우리의 민속놀이는, 신명 나게 놀면서 흥을 끌어 올리고 그 흥겨움이 구경꾼들에게 전달되어 놀이꾼과 구경꾼이 함께 어우러져 한바탕 즐기는 것이다. 반면에 이들의 놀이는 단순하게 반복되는 몇 개의 동작으로 절제되고 각을 맞춘 듯한 느낌이다. 관객들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요즘 공연장에서 한국인들은 떼창을, 일본인들은 조용한 관람을 즐기는 게 이 때문인가 싶다.


한적해보이는 산골마을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이 참여하는 행사가 해마다 치뤄지다고 한다


2부 공연은 한 무리의 훈도시 차림 남자들이 등장하면서 시작되었다. 꽤 추운 날씨인데도 흰 천으로 앞을 가리고 허리에 흰 띠만 둘렀다. 구호를 외치며 공원 밖에서 열을 지어 달려온 남자들은 장대 위로 온천물을 던져 횃불을 끄거나 기마전을 하고 서로에게 김이 나는 온천물을 뿌리면서 한참을 뒤섞여 노는데 공연이라기보다는 어른들의 물놀이 같다. 마지막으로 2m 정도 되는 거대한 남근 모형을 정(井)자형 나무 의자에 태워서 공연장을 돌면서 온천물을 끼얹어 주는데 공원은 온통 김으로 뿌옇게 앞이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올 때처럼 열을 지어 달려 나가고 공연이 끝난다.

이 행사는 공연 내용보다 긴 기간에 걸쳐 유지되고 있다는 게 놀랍다. 노령사회라는 일본에서 70~80명 정도의 사람이 동원되는 이런 행사를 해마다 하는 게 대단하다. 어쩌면 단순한 형태의 공연이기에 이렇게 오랫동안 유지되었을지도 모른다. 간단한 가락과 동작이 반복되니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어 이어질 수 있었나 싶기도 하지만 단지 그것만으로 설명하기엔 부족하다. 전통에 의미를 부여하고 계승하려는 사람들이 있고 그것을 가치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회적 분위기가 긴 시간 유지되어야 가능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향토 문화를 이어나갈 여지도 없이, 붕괴하고 있는 향촌 사회의 구조적 위기와 문화적 황폐화 현상이 안타까울 뿐이다. 서민들의 삶 속에 스며있던 놀이문화는 도시의 공연장이나 무대로 옮겨져 전문적이고 상업적인 공연으로 탈바꿈해 버렸다. 함께 어울려 떠들썩하던 정서는 사라진지 오래라 이들의 공연을 보며 아쉬움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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