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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성순 Jun 28. 2024

눈의 섬, 홋카이도(1)


홋카이도의 첫인상

눈 덮인 세상이 아름다워 보이는 건 단순함의 미학이다. 어지럽고 평범한 일상이 하얗게 가려지고 불분명한 윤곽선만으로 세상이 표현될 때, 우리는 상상을 한다. 눈밭 위를 달리는 상상의 날개 짓은 동화 속 세계를 향하곤 한다.


신치토세 공항에 내려 노보리베츠로 가는 길.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흐뭇해지는 드넓은 눈밭이 끝도 없이 펼쳐지고 차창 너머 휙휙 지나가는 소박한 집들도 하얀 눈 이불을 덮고 있다. 조그맣게 드러난 문들은, 이 풍경 속에서도 일상이 꾸려지고 있음을 알려준다. 이번 여행 동안 눈은 실컷 보겠구나 싶다.

차창 밖 풍경은 그림책처럼 조용하다.

미나미 치토세역에서 노보리베쓰츠 가는 특급열차를 기다렸다. 특급이라는 호칭이 무색하게 열차는 십여 분이 지나도록 나타나질 않는다. 나는 수시로 전광판을 쳐다본다. 플랫폼 번호와 열차표를 번갈아 확인하며 안절부절못한다. 마음이 편칠 않다. 지하철조차 조금만 늦으면 안내방송을 하고, 실시간 열차 도착 시각을 보여주는 전광판에 익숙해진 탓일까? 느긋하게 기다리는 여유로움이 퇴화한 것인지 혹은 성질 급한 국민성에 맞춰 우리나라 철도 시스템이 진화한 것인지 모르겠다. 십여 분을 지각한 열차는 한마디 사과도 설명도 없다. 투덜거리며 차에 올라 자리를 찾아 앉고 난 후에야 나의 조급함을 잠시 반성한다. ‘느긋하게 쉬러 온 여행이야’ 하며.


노보리베츠의 식당에서

노보리베츠 기차역을 나오니 건장한 붉은 오니(일본 도깨비)가 역 앞 회전교차로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다. 험상궂은 얼굴을 하고 커다란 방망이를 들었다. 바로 옆에 ‘환영한다’는 표지판이 있는 걸 보고 나니 부릅뜬 눈과 커다란 송곳니가 조금은 덜 위협적으로 보인다.

노보리베츠 역을 나오자마자 만난 오니


늦은 점심을 먹으러 근처 식당을 찾았다. 식당에 들어서자마자 눈에 들어오는 것은 2m 정도의 만화 캐릭터 조형물이다. 벽에도 내 어릴 적 추억 속 아톰 피규어가 매달려있다. 노부부가 반갑게 맞이한다. 만화 캐릭터 장식들은 이들 노부부와 이질적인 듯하지만, 그들과 함께 긴 세월을 지내온 듯하다. 어린 시절 좋아하던 만화들도 나이가 들면 시들해지기 마련인데 나이가 든 지금도 여전히 애지중지하는 게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일본인들의 만화사랑이 대단한 것인지 아니면 한번 좋아한 것에 대한 애착이 강한 건지 모르겠다. 식당의 다른 실내장식들도 그들만큼이나 오래된 세월을 간직하고 있어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만화캐릭터로 보이는 대형 피규어와 고목장식


벽시계 옆을 지키고 있는 아톰과 아롱이는 옛 추억을 일깨운다

할머니는 주방에서 음식을 만들고 할아버지는 홀에서 서빙을 한다. 주방 창을 통해 가끔 주고받는 나지막한 대화는 미소가 스며있는 듯 다정하다. 할아버지는 70대 정도로 꼬장한 건강과 성격 좋은 웃음을 가진 분이다. 음식에 관해 물으니 몹시 진지하게 열심히 설명하며 야끼나베우동이 맛있다며 추천해 준다. 

우리가 식사하는 동안 그 식당 단골로 보이는 부부가 들어왔다. 할아버지가 유쾌한 수다와 함께 그들과 인사를 주고받으며 주문을 받고 주방으로 향하는 모습이 우리나라 여느 소읍의 식당 풍경과 흡사하다. 다만 70이 훌쩍 넘은 할아버지가 노동을 꺼리지 않고 자기 삶에 자족하며 일상을 보내는 모습은 잔잔한 감동을 준다. 게다가 추천해 준 야끼나베우동은 기대 이상으로 맛있었다.


버섯, 유부, 어묵,야채가 들어간 야끼나베우동. 고추가루가 살짝 뿌려져 매콤한 맛도 있다


식탁 위 소품들은 아기자기하면서 깔끔하다


식당의 외관은 평범하면서도 일본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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