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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성순 Nov 01. 2023

길고 하얀 구름의 섬, 뉴질랜드(5)

거울 호수와 호머 터널 - 자연을 빌려 쓰는 사람들

퀸스타운에서 밀포드사운드까지는 긴 시간 이동을 해야 한다.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산의 모습이 우람하고 거칠어진다. 아침 햇살에 붉게 물들며 깨어나고 있는 거인들 같다. 높고 가파른 경사를 가진 산은 대부분 거대한 바윗덩이로 형성되어있다. 푸르게 숲이 우거진 곳이 있는가 하면 황량하게 바위가 드러난 곳도 많다. 

버스를 달려가다 거울 호수에 들렀다. 반영(反影)이 아름다운 곳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그다지 크지 않은 호수가 몇 개 연이어 있고 좁은 데크를 걸으며 볼 수 있다, 데크 주변은 나무들이 무성한 데다 아침 산 그늘이 드리우고 있어 반영이 한눈에 들어오지는 않는다. 우거진 나무의 짙은 그늘 속에서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상태로 호수는 이른 아침의 신선한 습기를 머금고 있다. 마치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간직한 채 깊은 산 속에 숨어있는 거울 조각처럼 흐릿한 물그림자를 만들고 있다.


거울호수의 반영
남쪽으로 가는 길 어딘가에서


거울 호수를 거쳐서 밀포드사운드를 향해간다. 정지 신호를 받은 차가 한참을 서서 기다린다. 호머 터널 앞이다. 이 터널은 한 개 차선밖에 없어서 내려가는 차선의 초록 신호등이 켜지면 터널 맞은편에서 올라오는 차들은 대기하고 있어야 한다.

호머 터널은 바위산을 수작업으로 쪼아 만든 터널이다. 그래서인지 거칠게 떨어져 나간 자연석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구간도 있다. 터널 내부는 흐릿한 조명뿐이고 마감되지 않은 건물 내부처럼 거칠고 축축하다. 어두운 데다 완만한 경사까지 있으니 오래된 갱도를 달리는 것 같다. 1950년대에 만들어진 것인데 관광객이 늘어나 차량통행량이 많아졌음에도 확장하지 않고 예전의 모습을 거의 그대로 유지한 채 사용한다.

호머 터널을 나오면 지척으로 다가온 거대한 산을 볼 수 있다. 버스에서 고개를 한껏 젖혀야 산 정상을 볼 수 있다. 차창 바로 옆으로 보이는 산이 워낙 크고 숲이 울창해서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면 거인이라도 나타날 듯한 분위기라 감탄을 하며 보고 있는데 바로 '킹콩' 영화를 촬영한 곳이라 한다.

이곳은 비가 많아 식물들이 빨리 자란다. 그러다 보니 바위산인데도 이끼를 토양 삼아 나무가 순식간에 자라나 울창한 숲을 이룬다. 폭우가 쏟아지면 지반이 약해 나무들이 뿌리째 뽑히는데 큰 나무들이 쓰러지며 도미노 현상으로 나무 사태가 난다. 그로 인해 도로가 막혀 교통통제가 잦다고 한다. 수직 절벽을 이루고 우뚝우뚝 서 있는 산들의 행렬을 보면 그럴만하다 싶다. 

 강수량이 많아서 폭포도 많다. 깎아지른듯한 바위산과 초록으로 뒤덮인 거대한 산 중턱에 흰 비단실 타래를 늘어뜨린 듯 가느다랗고 긴 폭포 줄기가 그림처럼 떨어지고 있다. 판타지 영화의 배경 같다.

자연의 원시적 모습을 그대로 지키려는 이 나라 사람들의 의지는 존경할만하다. 오래된 터널이나 좁은 도로를 확장하지 않는다. 이 일대 국립공원 대부분 지역을 출입금지지역으로 정해놓고 제한적으로 트래킹을 허용한다. 대표적 토종 식물인 마누카 군락지를 보호하고 광고판 하나도 허투루 세우지 않는다. 자연은 원래의 모습 그대로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할 자산이며 현세대는 잠시 빌려 쓰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당장의 관광 수입보다 원시의 자연을 훼손시키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남섬의 원시림과 웅장한 산맥의 장관은 이들의 이런 태도와 노력으로 잘 보존될 수 있었다. 이곳에서 촬영된 '반지의 제왕'은 신비롭고 환상적인 고대 판타지 세계를 실감 나게 구현해 많은 관객을 매료시켰다. 그리고 현재 뉴질랜드 관광 수입의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반지의 제왕'과 관련된 것들이라 한다.

     

밀포드사운드 - 그들도 우리와 나란히 살아가야 한다.

밀포드사운드 해안을 제대로 즐기기 위해 크루즈선을 탔다. 선상에서 제공하는 뷔페식 점심 식사를 후딱 해치우고 갑판으로 나간다. 갑판에 서면 휘청일 정도로 바람이 불고 햇살이 강한데도 다들 기대에 찬 표정으로 나와 있다.

선착장은 내륙 깊숙이 들어온 만에 자리 잡고 있다. 만의 양쪽에는 수직으로 높게 솟은 산들이 이어져 두 팔을 벌려 안듯 길쭉한 만을 만들고 있다. 해안 절벽을 이루고 있는 바위산들은 설악산의 울산 바위를 떠올리게 한다. 울산바위가 기품 있는 노인이라면 이곳 바위산은 거칠고 황량하지만 씩씩한 청춘의 모습이다.

배는 느린 속도로 해안선을 따라 바다를 향해 나아간다. 곳곳에서 만국 공통의 감탄사가 터져 나온다. 한 곳에 시선이 쏠려 유심히 살펴보니 물개 가족 세 마리가 바위 위에서 한가로이 일광욕을 즐기고 있다. 사람들의 흥분된 관심에도 일상이라는 듯 지나가는 배를 무심히 쳐다본다. 

갑판 맞은편에서 나직한 탄성과 웅성거림이 들려 달려가 보니 돌고래 두 마리가 물 위를 오르내리며 배와 나란히 수영한다. 사람들의 관심을 아는지 모르는지 우아한 몸짓으로 물살을 가르던 녀석들은 순식간에 물속으로 사라진다. '손님맞이는 이 정도로….'라고 하는 듯하다.

이곳은 인간과 동물이 나란히 살아가고 있다. 모든 배는 자연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항해하며 자연을 변형시키는 어떤 구조물도 설치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빙하가 흘러내리면서 만든 U자곡의 거대하고 우아한 곡선과 뽀얀 물방울을 흩날리며 쏟아져 내리는 폭포는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그 풍경 속 동물들도 자연 속의 삶을 누리고 있다. 인간이 야생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기로 마음먹었기에 서로의 만남은 덤덤하지만, 함께 행복할 수 있다. 야생은 인간의 놀잇감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존중되어야 한다. 

만의 끝에서 바라 본 난바다

배가 만의 끄트머리까지 나아가자 앞이 탁 트인 난바다가 펼쳐지고 쏟아지는 햇살에 반짝이는 물비늘이 수평선까지 이어져 마음이 아득해진다. 배는 뱃머리를 돌려 맞은 편 해안선을 따라 돌아오며 새로운 풍경을 보여준다.

U자곡의 우아한 곡선과 폭포

 만의 북쪽은 모양도 크기도 제각각인 폭포가 좀 더 많다. 수량이 많아 바다로 곧장 쏟아지는 것도 있고, 가늘고 길게 내려오다 산 중턱 숲속으로 사라져 버리는 것도 있다. 문득 여산 폭포를 노래한 한시(漢詩) 한 구절이 떠오른다.

   飛流直下三千尺 疑是銀河落九天

날아가듯 흐르는 물이 삼천 척을 쏟아져 내리니

하늘 저 멀리서 은하수가 떨어지는 게 아닌지     

이백은 폭포 주변에 뽀얗게 일어나는 물안개를 보며 은하수를 상상한 것일까? 

햇빛에 반사되어 나타났다 사라지곤 하는 무지개와 아침 안개처럼 훅 밀려와 몸을 감싸는 폭포의 습기를 느낀다. 늘 자연을 사랑하고 노래한 이백이 이곳을 봤다면 선경(仙境)이라 하지 않았을까? 풍경뿐만 아니라 사람과 자연이 어우러져 사는 모습이 아름답다 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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