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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성순 Nov 21. 2023

길고 하얀 구름의 섬, 뉴질랜드(6)

남섬 퀸스타운에서 북섬 오클랜드까지는 비행기로 두 시간 정도 거리다. 밀포드사운드의 장대한 자연경관이 머릿속에 남아서인지 오클랜드 공항에 내리자 산속 생활을 하다 도시로 돌아온 느낌이다. 북으로 한참 올라와 온화한 기후를 만나니 ‘아, 이곳 사람들은 따듯한 북쪽 나라라는 표현을 쓰겠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때에서야 잠시 사람들 각각의 머릿속에 얼마나 다른 생각들이 들어있는지를 깨닫게 된다.

북섬 첫 여행지는 와이토모 반딧불 동굴이다.

    

와이토모 동굴 - 동굴 천장에 걸린 은하수

동굴 출구 모습( 동굴 안에서는 불빛이 허용되지 않아 사진을 찍을 수 없다. )

와이토모 동굴 입구는 여느 석회동굴과 비슷하다. 석회석이 흐르는 물에 녹으며 긴 세월에 걸쳐 형성된 특이한 형태의 벽면과 종유석을 볼 수 있다. 서늘한 기운을 따라 좀 더 깊이 들어가면 제법 큰 호수가 나타난다. 호수는 동굴을 따라 물길을 만들고 있고 모험 떠나기 좋을 듯 보이는 배가 어두운 물결에 흔들리고 있다. 배를 타고 동굴 깊이 들어갈수록 어둠은 짙어지고 천정과 벽면에서 흐릿한 빛이 드문드문 보이기 시작하더니 한 굽이도는 순간 그 빛들이 동굴 천장에 가득하다. 동굴 천장의 가장 위쪽에 반디 벌레들이 촘촘히 모여 긴 띠를 이루고 있고 그 주변에 점점이 흩어진 빛이 천장을 채우고 있다. 동굴 곳곳에 박혀있는 작고 희미한 빛들을 보면 은하수가 흐르는 밤하늘에 별들을 흩뿌려진 듯하다. 인공의 빛이 차단된 동굴 안에서 벌레가 내는 희미한 빛이 물 위로 은은하고 부드럽게 퍼진다. 

배는 설치된 줄을 당겨 소리 없이 천천히 움직인다. 배를 타고 있는 사람들도 숨죽이고 동굴의 고요함을 지킨다. 종유석에서 동굴호수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만이 자연의 악기를 연주하듯 경쾌한 음을 만든다. 짙은 어둠 속의 희미한 반딧불 빛과 고요 속 작은 물방울 소리, 서늘한 냉기. 

이곳은 시간이 멈춘 듯 수만 년 동안 봉인되어 있었다. 먼 옛날 반디 벌레들이 이곳에 자리 잡았고 어느 날 사람들 손에 의해 동굴이 열렸다. 그들은 비밀스러운 광경을 대면했을 때 조심스럽게 다가가 낯선 생명체를 위해 섬세한 노력을 기울였다. 소리를 죽이고 인공적인 빛을 들이지 않아 반디 벌레들이 받는 스트레스를 최소화했다. 

이런 태도는 시공간을 공유하며 살아야 할 중생들끼리 의당 지켜야 할 도리지만 흔치 않은 일이라 감동적이다. 그래서 그 여린 벌레들은 지금도 천년의 이야기를 쌓아가고 있었다. 


반디 벌레가 모여있는 거리는 길지 않아 금세 출구가 보인다. 그 아쉬움을 아는지 출구 가까이 갔던 배는 잠시 뒤쪽 어둠으로 다시 들어가 여유를 부리다가 천천히 출구로 나가 관광객들을 내려준다. 20대의 마오리 젊은이들이 배를 끌고 있는데 체구가 튼실하고 인물이 훤하다. '어땠어요? 볼만한 광경이지요?'라는 표정으로 환하게 웃는다. 와이토모 동굴과 자기 일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진다.

와이토모 동굴처럼 마오리족에 의해 운영되는 관광지가 종종 눈에 띈다. '뉴질랜드의 자연환경은 애초에 마오리족의 것이었다'라는 전제하에 천연자원에 대한 우선권을 마오리족에게 주기 때문이다.  

   

아오테아로아 – 길고 흰 구름의 섬, 마오리의 나라

아오테아로아는 마오리어로 '길고 흰 구름'이라는 뜻이다. 14C 경 폴리네시아 지역에 살던 마오리족 한 무리가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 떠났다. 긴 항해 끝에 구름에 가려진 이 땅을 발견하고 '아오테아로아'라고 소리쳤다. 그래서 이 나라의 마오리어 명칭은 ‘길고 흰 구름의 섬’이다. 이렇게 서정적인 국호를 가진 나라에는 착한 사람들만 살 것 같다. 다른 나라들도 ‘흰 곰이 거니는 툰드라’나 ‘해오라기 깃든 삼나무숲’ 같은 이름을 지으면 세상이 좀 더 평화로워지지 않을까 하는 허튼 생각을 해본다.

뉴질랜드에는 마오리의 문화가 많이 남아있고 국가적 차원에서 보존하고 유지,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학교에서는 마오리어와 마오리 전통춤인 하카를 가르친다. 국제대회에 출전한 선수 중에는 승리의 의지를 다지며 경기가 시작되기 전에 하카춤을 추기도 하는데 같이 간 뉴질랜드 선수들은 호응해 주며 함께 즐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주 유럽인들이 원주민의 역사와 문화를 존중하고 계승하려는 경우는 찾기 어렵다. 물리적 힘과 문화적 우월감으로 원주민들을 지배하고 그들의 것을 빼앗았다. <<총. 균. 쇠>>에서는 ‘인류는 우월한 종이 아니라 더 나은 지정학적 환경 때문에 앞선 문명이 생겼다. 그들은 침략자가 되어, 무기와 전염병 그리고 야만적 폭력으로 고립된 지역의 원주민들을 멸절시켰다’라고 한다. 그 예는 인류 역사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런 면에서 뉴질랜드의 경우는 특별하다. 마오리족은 낙천적인 미소와 당당한 자부심으로 문화적 정체성을 지키고 있다. 건장한 체구와 폴리네시아인 특유의 피부색, 활기찬 태도가 어디서든 눈에 잘 띈다. 인접한 호주의 원주민 애버리진이 짐승처럼 사냥당하고 그들의 문화는 거의 사라져 버린 것과 대비된다. 

 

와카레와레와 민속촌도 마오리족이 모여 살던 곳을 관광지로 운영하고 있다. 마을 입구부터 유황 냄새가 진동한다. 개울물에서 김이 오르고 개울가 흙은 불그스름한 색이다. 바위틈에서는 간헐천이 솟아오르고 있는데 가끔은 수 미터까지 치솟아 관광객의 탄성을 자아낸다. 지열이 강한 곳에는 움 같은 것을 만들어 그 열로 생선, 채소, 육류 등을 익혀 먹는다.  마오리 전통요리법으로 항이식 요리라 한다. 항이식으로 쪄낸 옥수수를 잘라 인심 좋게 무료로 나눠주고 있다. 금방 쪄내서 뜨거운 김이 오르는 걸 먹으니 꿀맛이다.


길을 따라 마을로 들어가니 의외로 조용하다. 아담한 집들 창문을 통해 안을 보면 삶의 흔적은 보이나 정작 사람은 보이질 않는다. 다들 일하러 나간 동네에 약속 없이 찾아온 손님처럼, 나는 마을 길을 두리번거리며 올라간다. 골목 끝에는 우리나라 장승과 흡사한 목각인형들이 마을을 지키고 있다. 숲 덤불에 숨어서 지켜보는 목각인형은 하카를 출 때처럼 눈을 크게 뜨고 혀를 내밀어 위협하는 표정이지만 장난스러움이 배어 있다. 우리나라 민화 ‘까치와 호랑이’이 등장하는 덩치 큰 호랑이의 해학적인 모습을 보는듯하다. 

마오리 문양으로 치장된 집과 자그마한 교회, 지열을 이용하는 생활 방식, 이곳은 마오리족의 과거의 삶이 있었던 곳이고 현재의 삶으로 이어지고 있는 곳이다. 


레드우드 삼림욕장 – 자연의 순환에 마음을 맡겨 느릿하게.

불그스름한 낙엽이 깔린 길은 푹신하다. 긴 시간의 더께를 발로 느끼며 나무들의 호흡에 내 호흡을 맞춰본다. 은은하게 퍼지는 신선한 나무 향과 엉클어진 덩굴을 흔드는 한 줄기 바람 속에는 그들만의 익숙함이 스며있는 듯하다. 우리는 늘 이러했다고, 당신들이 와서 새로움으로 만난 거라고, 그러니 새로움으로 가득 채워 신선해져서 돌아가라고. 나무들은 오래된 자신의 영역을 지키며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숲 깊숙이 들어갈수록 공기는 축축하고 서늘해진다. 어디선가 비릿한 공룡의 체취가 퍼져나가고 있을 듯도 싶다. 산책로를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았으나 주변이 어둑해진다. 하늘을 향해 치솟은 나무들이 해를 가려 날씨와 시간을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이곳은 <쥐라기공원 2, 잃어버린 세계>를 촬영한 곳이다. 영화 속에서 인간들을 순식간에 왜소한 생명체로 만들어 버렸던 압도적 크기의 나무들이 곳곳에 보인다. 키 큰 나무 사이에는 티라노사우루스가 짓밟고 지나갔던 양치식물들이 무성하게 다시 자라고 있다. 

숲은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채 자연의 순환을 느릿하게, 쉼 없이 진행하고 있다. 인간들이 지구의 모든 공간을 헤집고 다니며 영향을 끼치고 있는 이 시점에 이곳은 참 소중한 공간이다. 우리의 느릿한 호흡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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