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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성순 Nov 21. 2023

길고 하얀 구름의 섬, 뉴질랜드(7)

로토루아 - 춤추는 전사 마오리, 그리고 그들의 사랑 노래

로토루아 숙소 근처는 온통 유황 냄새로 머리가 아플 지경이다. 지열 활동이 현재진행형이라 곳곳에서 온천이 솟아난다. 

늦은 저녁 폴리네시아 스파에 갔다. 따뜻한 온천수가 흘러내리는 둔덕에 팔을 괴고 드넓은 호수를 바라본다. 호수에는 점차 어둠이 내리며 물빛이 짙어진다. 호수 위를 낮게 날던 새들은 어디론가 바삐 날아가고 별조차 보이지 않는 수평선 위에는 옅은 안개가 깔린다. 야외온천의 밝은 조명 아래,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근 채 온 세상이 어두워지는 걸 보면 마치 무대에 서서 넓은 관객석을 보는 기분이다. 오늘의 관객은 진중하고 우수에 찬 퇴역군인처럼 서늘한 바람을 일으켜 내 이마를 서늘하게 한다.

   

저녁은 호텔에서 항이식 디너와 함께 마오리 민속공연을 즐겼다. 전통의상과 얼굴 타투를 한 마오리들이 나와 전통춤 하카를 추는데 적을 위협하는 부릅뜬 눈과 표정이 특이하다.

옛날 마오리족은 외부인과 만나면 체격이 크고 험상궂은 사람을 내보내 하카춤을 추었다. 자신들의 상징인 은고사리를 바닥에 놓고 싸울 것인지 우호적 관계를 맺을 것인지 결정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은고사리를 손으로 들면 우호의 표시로 간주하여 코를 맞대는 인사를 하고 환영식을 벌인다. 발로 밟으면 전쟁이다.

 

공연 중 체격 좋은 여가수가 나와 귀에 익숙한 곡조로 노래를 부른다. "비바람이 치던 바다 잔잔해져 오면 오늘 그대 오시려나 저 바다 건너서..." 모닥불과 통기타를 떠올리게 하는 노래, 손뼉 치며 신나게 부르던 노래다. 그런데 지금은 느리고 애잔한 곡조로 불리는데 언어의 경계 없이 슬픈 정서가 느껴진다. 이 노래에 담긴 마오리 설화는 청춘남녀의 사랑 이야기다.

먼 옛날 로토루아의 호수 주변에 마오리 부족들이 흩어져 살았다. 어느 날 한 부족장의 딸 히네모아는 호숫가를 거닐다 아름다운 피리 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피리 소리에 이끌려 뗏목을 타고 호수 가운데 있는 섬으로 갔다. 거기서 피리를 연주하고 있던 트타네카이를 본 순간 둘은 사랑에 빠졌다. 트타네카이는 사랑을 담아 피리를 불고 히네모아는 그 소리가 들릴 때마다 뗏목을 저어 섬으로 갔다. 어느 날 이 사실을 알게 된 추장은 딸을 막기 위해 뗏목을 모두 없애버렸다. 뗏목을 찾지 못한 히네모아는 칡넝쿨로 표주박을 몸에 달고 먼 거리를 헤엄쳐 사랑하는 이를 찾아갔다.  그러나 비바람이 심하게 치는 날에는 서로를 그리워하며 슬퍼할 수밖에 없었다. 이 노래는 넓은 호수 때문에 만날 수 없었던 연인들의 간절한 사랑 노래이다.


이 설화는 마오리의 민요로 구전되어 오다가 지금은 민속공연에서 불린다. 여가수가 부르는 애절한 선율은 여행 중 보았던 아름다운 호수들과 겹쳐지며 긴 여운을 남긴다. 


호비튼 가든 - 동화 속에 비가 오던 날.

영화 속 호빗 마을은 언제나 따스한 햇살이 내리고 있었다. 환한 빛이 쏟아지는 초록 동산에는 빨강 노랑꽃들이 피어있고 하늘에는 솜사탕 같은 하얀 구름이 떠 있었다. 잔잔한 연못 한 귀퉁이에서는 평화롭게 물레방아가 돌아가고 동그란 문 옆 굴뚝에서는 연기가 한가롭게 피어오른다. 


밝고 사랑스러운 호빗 마을을 기대하며 들뜬 마음으로 투어를 기다렸으나 아침부터 부슬부슬 비가 내렸다. 마을로 가는 전용 버스를 기다리는데 비는 더욱 심해져 비바람이 몰아친다. 잠시 기념품 가게로 피신을 했다. 규모가 작고 기념품들도 소박했지만, 한쪽 구석에 내가 좋아하는 간달프가 서있었다. 실제 사람 크기의 모형인데 반가워서 팔에 손을 슬쩍 얹고 사진을 찍었다. 간달프 망토를 구경하고 간달프 소형 등을 샀다. 작은 가게에서 얻은 작은 기쁨이다. 









전용 버스를 타고 호빗 마을에 들어갔다. 동산 곳곳에 동그란 문을 얼굴처럼 내민 집들이 자그만 창문을 닫은 채 있고 집 앞에는 소형 농기구들이나 작은 의자, 커다란 호박이 소품처럼 놓여있다. 햇볕이 쨍했으면 실감 나게 보였을 빨랫줄에 널린 호빗 옷들은 비에 젖어 처량하게 펄럭인다. 

호빗들은 비바람에 놀라 모두들 숨어버린 듯 마을에는 구경꾼들만 시끌하다. 호빗들이 맨발로 돌아다니던 마을 길들을 한참을 걸어 돌아다니며 구경을 했다. 간달프가 마차를 타고 들어오던 연못 위를 지나는 다리도 건너고 빌보의 생일파티가 열린 마을 공터도 지나가고 숨바꼭질하듯 숨어있는 집들도 하나하나 방문해 본다. 오솔길을 따라 올라가 동산 중턱쯤에 오르니 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안개비로 시야가 흐리기는 하지만 연못과 마을을 감싸고 있는 낮은 언덕들이 평화로워 보인다.

마을에 있는 호빗 주막에 도착했다. 무료로 맥주와 음료를 먹을 수 있는 곳이다. 비를 피해 들어온 사람들로 북적이며 시끌시끌하다. 테이블 하나를 차지하고 모여서 수다를 떨기도 하고 구석진 곳 긴 의자에 혼자 앉아 사람들을 구경하는 사람, 오직 상대방만을 눈에 담고 바라보는 한 쌍의 연인, 잔뜩 들떠서 이곳저곳을 휘젓고 돌아다니는 아이들까지 진짜 주막 같은 분위기다. 

주막의 내부와 외부, 주변 모습

맥주 한잔을 들고 바로 옆 천막으로 이동해 점심을 먹었다. 대형 천막 안에 손때 묻은 원목 식탁과 의자가 있고 잔칫집처럼 음식을 푸짐하게 차려놓았다. 쇠고기를 큰 덩어리로 구워 즉석에서 칼로 빚어주는데 맛도 있고 운치도 있다. 잔칫집 같은 식사가 끝나고 기념품 머그잔을 준다. 호빗들이 맥주를 담아 먹었을 것 같은 독특한 모양이다.


투어를 마치고 돌아보는 호빗 마을은 여전히 뿌옇게 흐린 대기 속에 있다. 오늘 내가 본 호빗 마을은 영화 속 상상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영화에서는 볼 수 없는 장면. 어쩌면 그래서 더 특별한 추억일 수도 있다. 삶이 늘 맑음일 수는 없다고, 사랑스러운 호빗 마을에도 비가 오듯이 우리의 삶에 햇빛과 비와 바람이 함께하는 것은 자연의 순리라고, 그래야 가끔은 무지개도 볼 수 있을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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