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드럽고 따뜻했다
세월이 흘러도 20대 중후반에 다녔던 회사 상사가 종종 생각났다. 그는 고집이 세기로 유명했고 자신이 옳다고 믿는 일에서는 좀처럼 물러서지 않았다. 나 역시 잘못된 일을 보고 가만히 있지 못하는 성격이라 상사와 부딪치는 일이 잦았다. 우리 사이에는 크고 작은 충돌이 있었다. 그때 내가 상사에게 따지는 모습을 본 사람들은 아마 내 무례함에 놀랐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잘못을 알면서도 침묵하는 것이 오히려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작년, 그당시 함께 일했던 동료에게 상사의 소식을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얼마 후 신기하게도 동료가 도봉산 산행 중 우연히 그 상사를 만나게 된 것이다. 둘이 연락처를 주고 받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예전 직장 동료 두 명과 상사 그리고 나까지 넷이 다시 모였다.
오랜만에 마주한 상사는 세월의 흔적이 묻은 편안한 얼굴이었다. 수십 년이 흘렀지만 상사와 나는 마치 계속 만나온 사람들처럼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눴다.
한때는 상사 곁에 있기만 해도 숨이 막혔는데 세월이 나를 다듬었는지 까칠하던 나는 어느새 넉살 좋은 아줌마가 되어 있었다.
대화가 무르익자 나는 그때 왜 나를 그렇게 힘들게 했느냐며 장난스럽게 물었다. 상사는 잠시 생각하더니 자신은 괴롭힌 적이 없다고 했다. 오히려 잘해주고 싶었는데 내가 그만둔다는 소식을 듣고 속상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일이 하나 있었다. 그건 바로 내가 벙커C유 탱크에 올라가야 했던 일이었다.
그 시절 내 업무는 물류 입출고 관리, 경리, 원자재 관리까지 폭넓었다. 거기에 자판기 관리와 사내 식당 식자재 영수증 확인까지 맡고 있었다. 때로는 벙커C유 차량이 들어오면 전표와 입고량을 확인하기 위해 직접 차량 꼭대기까지 올라가야 했다. 거래처 직원들은 “왜 여자가 이런 일을 하느냐”고 놀라워했다.
게다가 약 6미터 높이의 벙커C유 저장탱크에도 올라가 재고량을 확인해야 했다. 사다리를 타고 오를 때마다 바람이라도 불면 몸이 휘청였다. 떨어질 것 같은 두려움이 밀려오자 나는 결국 더는 할 수 없다고 상사에게 말했다. 그제야 상사는 이제는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그때는 내가 상사에게 자꾸 따지다 보니 상사가 괘씸해서 일부러 나를 괴롭힌다고 생각했다. 억울함과 서러움이 쌓이면서 건강도 악화되어 대상포진과 심한 결막염을 겪었다. 결국 질병이 악화되어 퇴사할 수밖에 없었다.
내 이야기를 다 마치자 상사는 잠시 말이 없었다.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연 그는 내가 엄마 없이 아픈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를 강하게 키워야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도 어린 시절 어머니 없이 아버지와 함께 살아왔다며 말끝을 흐렸다. 내가 그렇게 힘든지 몰랐다며 묵묵히 일하던 내 모습을 보고 사장님께 이야기해 승진까지 시키려 했다고 덧붙였다.
상사는 고개를 숙인 채 여러 번 사과했다. 그 진심 어린 사과에 마음이 울컥했다. 내가 단단해지길 바라는 마음에서, 그때 그런 일을 시켰다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서로의 진심이 오가자, 오랫동안 가슴 한켠에 있던 억울함이 순식간에 풀리는 듯했다. 기분 좋은 느낌이 가슴 가득 채워졌다. 그날 밤의 공기는 부드럽고 따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