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에누 Dec 01. 2024

[일과 놀이 사이]             잘못 온 선물

대한민국 최고액의 원고료가 내 통장에 들어왔다!

발신자 불명의 메일을 받았다.
이렇게 시작되는 사연이었다.

"교수님 안녕하세요? 저 기억하실지 모르겠네요?"

글을 읽던 나는 입가에 흐릿한 미소를 띠었다. 그래, 안다. 기억한다. 그 혼란스럽고도 어딘가 씁쓸했던 사건의 전말을.

"왜 그때, 가수 이현우 씨의 모델 계약금을 교수님의 사보 원고료와 혼동해서 잘못 보내드렸던 일 말이에요. ㅎㅎ"

노래가 떠오르는 순간이다.

'아 옛날이여 지난 시절
다시 올 수 없나 그날
아니야 이제는 잊어야지~'

아니야, 절대 잊히진 않을 일이다.
그리고 두 번 다시 일어나서도 안될 일이었다.
교수직도 끝나고 명예교수지만 학교 이메일 계정은 살아 있다. 그 주소로 온 광고회사 경리팀 여사원의 긴 편지였다.

어느 날 내 계좌에 갑작스레 꽂힌 "8천만 원 미스터리 송금 사건"이 되살아 난다.
이제는 지난 시절의 재미있는 해프닝으로 자리 잡았다. 당시엔 흥미는커녕 초조와 혼란의 연속이었다.


여사원의 후일담은 십 년의 시간을 건너 내게 다시 그날의 긴장을 떠올리게 했다.




1. 혼돈의 시작

금요일 오후였다.
나는 학교 내 은행 출장소의 ATM 앞에서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숫자가 잘못 보였을까? 눈을 비비고 다시 확인했다. 분명히, 1억 가까운 돈이 들어와 있었다. 송금자는 광고회사 사보 담당자였다.

'이 돈, 혹시 내가 모르던 원고료?... 아니지. 대한민국에서 사보 4쪽 원고료로 이 금액을 줄 리가 없다.'

때마침 자리를 지키고 있던 출장소장 앞으로 가서 말을 걸었다.

"소장님 제가 원고료를 받을 회사가 있는데 지금 찍어보니 이해하기 힘든 금액이 들어왔네요. 난감하네요."

내가 조회를 동의해 준 계좌에서 금액을 확인한 여사님이 남의 속도 모르고 너스레를 떤다
부산 사투리를 쓰는 소장은 붙임성이 대단했다. 내 말을 듣더니 살짝 미소를 띠며 대꾸했다.

"와, 교수님 대단하시네예. 원고료가 이 정도라니, 엄청난 작가분을 제가 몰라뵀네예. 흐흐"

"아니, 농담하지 마시고. 이거 송금 착오예요. 바로 돌려줘야지 뭐."

소장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아니, 요새는 금융실명제라 교수님이 굳이 돌려주실 책임은 없심더. 계좌에 잘못 보내는 건 송금자의 분명한 실수지예. 차명 거래일 수도 있고예."

'차명 거래?' 순간 머릿속이 더 복잡해졌다. 소장의 의견은 현실적이었지만, 내 양심과는 정면으로 충돌했다.



2. 하필 금요일 오후

소장의 말을 듣고 나니 단순히 돌려주는 게 문제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누구에게, 어떻게 돌려줘야 하나?
송금 담당자를 찾아낼 수도 없고, 회사로 연락했다간 사건이 커질 테고, 그럼 담당자는 징계를 받을 수도 있다.

금요일 오후 은행 영업시간은 재빨리 지나갔다. 월요일까지 고민할 시간은 충분했지만, 머릿속은 이미 온갖 시나리오로 어지러웠다.
'혹시... 잠깐 내 돈이라 생각하고 그냥 두면 안 되나? 좀 있다 돌려줘도 되잖아.'
하지만 통장 잔액을 볼 때마다 희열보다 불안감이 몰려왔다.



3. 반납도 쉽지 않아!


월요일 아침, 정해진 영업 시작 시간보다 30분 일찍 은행에 도착했다. 출장소 소장은 나를 보자 반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교수님, 그 돈 아직도 계좌에 있지예? 제 말대로 하셨네예. 잘하셨어요! 하하, 제가 잘 키워드릴게예."


나는 웃음기 없는 얼굴로 소장의 눈을 보며 말했다.


"돌려줘야지요. 어떻게 하면 되지요?"


그래도 소장은 뒤끝을 보였다.


"그럼, 경리팀장 한번 내려오라 카이소. 돌려주는 일도 보통 정성이 아닌데 사례를 받아야지예."


문제는 반환 과정이었다. 이 큰 금액은 계좌 이체로도 어려웠다. 한도 초과라서 반드시 계좌를 개설한 지점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니, 세상에 잘못 보낸 돈을 돌려주는 것도 이렇게 어려워야 하나?'


반환 과정에서 회사 측에 연락이 닿았다. 그러나 상황은 공개되지 않았다. 사보팀에 살짝 경리팀 송금 담당직원의 사내 전화번호를 물어봤다. 물론 송금착오 얘기는 입밖에 꺼내지도 않았다.

하필이면 같은 이름, 다른 사람!

짐작한 대로 동명의 행운아에게 온 '잘못된 선물'이었다. 담당 여직원은 그때까지 송금착오를 까마득하게 모르고 있었다. 떨리는 목소리로 개인 통장번호를 불러주었다.


마침 월요일 강의는 오후부터였다.

택시를 타고 30분 거리의 개설지점으로 달려갔다. 이체한도를 천만 원으로 늘려서 8번에 나누어 송금했다.


돌아오는 길에 가야공원 돼지국밥집에 들렀다.

소주 두잔을 반주로 곁들이고 나서야 오후 강의가 있다는 게 떠올랐다. 서둘러 계산을 하고 식당을 나섰다.



4. 늦게 배달된 편지

글은 이어졌다.

"교수님 덕분에 저는 무사히 넘어갔습니다. 팀장님과 의논해서 잘 처리되었습니다. 일이 더 커졌다면 아마도 회사에서 징계를 받았을 거예요.
교수님께 정말로 큰 빚을 졌어요. 십 년이 지났지만 이제 퇴직을 앞두고 이 감사를 전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습니다."

편지는 그렇게 마무리되고 있었다. 그날의 혼란스러운 감정이 다시 떠올랐다. 하지만 금세 차분해졌다.

'고민하고 흔들렸던 거 맞지?
근데 다른 선택이 없었잖아?'

노래 한 소절이 흥얼거려졌다.

'아 옛날이여~ 다시 올 수 없는 그날~
아니야, 잊지 않아도 돼.'




내 원고료는 어디까지일까?
잘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잠시나마 나는 대한민국 최고액의 작가였다.
그 무렵 내 통장을 스쳐간 원고료가 분명히 말해주고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