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야구를 좋아한다? 안 한다? 한마디로 답하기는 참 애매하다. 야구는 할 줄도 모르고 프로야구 시즌을 손꼽아 기다리는 것도 아니다. 경기가 시작하는 시간을 기다리다 애써 챙겨보지도 않는다. 하지만 어쩌다 TV를 틀었을 때 야구가 나오면 시청하는 건 나쁘지 않다. 주말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야구 경기를 보며 시간을 보내는 것도 꽤 괜찮은 선택이니까.
뜨거웠던 올해의 한국시리즈도 막을 내렸다. 한 때는 야속한 가을비가 내려 경기 시작이 지연되고 급기야 중단되기까지 했다. 그날 하려다 다음 날로 미뤄진 서스펜디드 게임을 기다릴 정도로 재미에 폭 빠진 편이었다.
사실 집에서 시청하는 TV는 유료 스포츠 채널에 가입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야구 경기를 자주 챙겨보지는 못한다. 그래도 응원하는 팀 하나를 고르라면 NC 다이노스다. 나는 대구 출신이라 지역 연고가 삼성이지만 특별한 애착은 없다. 그 이유는 선수들의 스캔들 이후로 팀의 전력이 옛날 같지 않다는 점이 크다.
부산에서 오래 생활했음에도 불구하고 지역 팀 롯데를 응원하지 않았던 것도 아이러니다. 왠지 내가 응원하지 않아도 알아서 잘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십오륙 년 전, 외국인 감독을 석연치 않은 이유로 내친 사건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당시 자이언츠팀을 이끌던 제리 로이스터 감독은 독특한 리더십으로 팀에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성적이 기대에 못 미쳤다는 이유로 갑작스러운 퇴진을 당했다. 많은 팬들이 그 결정에 대해 아쉬움을 표현했다. 팀의 장기적인 발전을 가로막았다는 평가도 나왔다. 그 후로 롯데는 기복 있는 성적을 기록하며 꾸준한 발전보다는 변동성이 큰 팀으로 남아있다.
NC 다이노스에 대한 애정은 사실 만화 <공포의 외인구단>에서 비롯되었다. 이 만화의 캐릭터들이 어딘가 다이노스 선수들과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불우한 환경에서 주인공들이 역경을 딛고 성장하는 이야기다. 당시 독자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NC 다이노스 우승홍보 영상
특히 노진혁, 김태군, 양의지, 나성범, 권희동, 서호철, 박민우, 박건우 같은 선수들은 각기 다른 매력으로 팬들을 사로잡았다. 김태군의 철벽 수비, 양의지의 노련함, 나성범의 파워, 그리고 박민우의 안정된 내야 수비까지... 이런 선수들이 만들어내는 경기는 팬들을 열광시켰다. 그런데 지금은 선수들이 많이 바뀌었다.
스포츠를 좋아하는 이유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좋아하는 팀이 생기고, 그 팀의 선수를 좋아하게 되며, 그 선수의 활약을 보며 경기의 재미를 느끼는 과정은 스포츠 팬들에게는 익숙한 감정이다. 나는 장대높이뛰기의 우상혁 선수에게서 매력을 느낀다.
장대높이뛰기는 대중적으로 큰 관심을 받는 스포츠는 아니다. 하지만 우상혁의 해맑은 미소와 주문을 외우듯 집중하는 모습은 시청자의 마음을 훔친다. 그의 경기를 보면 순간순간의 집중력과 자신과의 싸움을 볼 수 있다. 특히 '할 수 있다!'라는 구호는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그 간절함과 즐거움이 느껴지기에 자연스럽게 응원하게 된다. 실수를 하고도 웃으며 다시 일어서는 모습을 보면 우리가 실패 속에서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는지 배울 수 있다.
또 다른 매력적인 선수는 스포츠 클라이밍의 서채현이다. 정말 독특한 스토리와 카리스마가 있는 선수다. 어릴 때부터 클라이밍에 대한 천부적인 재능을 보였다고 한다. 거침없는 도전 정신으로 국내외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특히 그녀의 경기는 단순한 힘의 싸움이 아니다. 마치 음악에 맞춘 춤처럼 우아하고 리드미컬하다. 손끝 하나, 발끝 하나로 벽을 타고 오르는 모습은 마치 산을 넘는 탐험가처럼 보인다. 우리 가족 중 한 명은 서채현의 열렬한 팬이다. 덩달아 경기를 보며 그녀의 집중력과 추진력에 감탄하게 된다.
스포츠와 예술은 매력을 느끼는 계기나 빠져드는 방식이 매우 비슷하다. 그저 스쳐 지나가는 관심이 계기가 되어 어느새 애정이 생긴다. 시간이 지나면 삶의 일부가 되기도 한다. 영화의 경우도 특정 배우나 감독이 우리의 관심을 끌어들이곤 한다.
나는 한동안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에 푹 빠져 있었던 적이 있다. 그가 만든 <인셉션>을 처음 봤을 때, 마치 꿈속에 들어간 것 같은 기묘한 체험을 하게 되었다.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관객도 영화 속 세계에 점점 빨려 들어간다. 복잡하게 얽힌 시간과 현실의 경계 속에서 '내가 어디에 있는 걸까?' 하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인터스텔라>를 통해서는 우주와 시간의 무한함을 느꼈다. <덩케르크>에서는 전쟁의 긴장감 속에서 인류애를 확인할 수 있었다. 놀란 감독의 영화는 늘 나를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보게 만들었다. 어느덧 나는 그의 신작을 기다리는 팬이 되었다.
배우를 통해 영화를 찾아보는 경우도 많다. 나는 이병헌 배우의 팬이다. 그가 출연한 영화라면 거의 챙겨보는 편이다. 강렬한 눈빛과 섬세한 감정 연기는 때로는 스릴러, 때로는 멜로, 때로는 코미디에서도 다양한 색깔을 보여준다. 특히 <내부자들>에서의 연기는 압도적이었다. 거친 세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분투하는 그의 모습은 영화가 끝난 뒤에도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남산의 부장들>, <비상선언> 등을 통해 다양한 캐릭터를 소화하는 이병헌의 연기는 언제나 기대 이상의 만족을 준다.
우리는 스포츠, 영화, 책 등 다양한 영역에서 사소한 계기로 큰 애정을 키우기도 한다. 좋아하는 선수, 감독, 배우는 우리에게 새로운 세계를 보여준다. 그들을 따라가면서 새로운 취미나 관심사가 생기는 경험은 아주 특별한 기쁨이다.
스포츠뿐만이 아니다. 누구든 자신을 끌어당기는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좋아하는 아이돌 스타가 읽고 있는 책을 따라 읽어보거나 특정 배우가 나오는 영화를 찾아보는 일도 그 일환이다. 사소한 계기가 큰 애정을 불러일으킬 때도 있다. 중고교 시절 선생님의 카리스마에 빠져 어떤 과목을 더 깊이 파고들었던 기억은 누구나 있을 것이다.
누구나 각자의 '홀릭' 순간이 있다. 특정한 사람이나 사건이 주는 영감과 매력은 때로 우리에게 특별한 관심사를 발견하게 해 준다. 세렌디피티(serendipity)라고도 할 수 있다. 그 계기는 사소할지라도 그로 인해 인생의 새 장이 열리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