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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에누 Nov 30. 2024

[일과 놀이 사이]              사표의 규격

어쩌면 날개였을 지도...

그만두겠습니다.
1989년 8월 18일
제작 2 본부 이현우​

내가 쓴 최초의 사표였다.
연차휴가를 다녀와서 이틀 후의 일이었다. 다니던 광고회사 본부장한테 제출한 문서였다.

군더더기 없는 문장이었다.
하지만 이 사표는 수리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반려되지도 않았다.


다음날부터 나는 출근하지 않았다. 스스로 사직했다고 믿었기 때문에 당연했다. 하지만 몸은 집에 있어도 마음은 회사에 붙잡혀 있었다. “이렇게 간단히 끝나도 되는 걸까?”

찜찜함이 떠나질 않았다. 일주일이 지나도 회사에서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신참 사원 하나가 사라졌다고 해서 티가 나는 조직은 아니었을 것이다.

사실 휴가 끝날부터 예상은 하고 있었다. 설악산 오색의 공중전화에서 본부장과 통화했을 때, 그의 목소리는 이미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

“대청봉에 올랐다가 오색까지 내려왔는데 서울행 버스가 끊어져서요. 오늘은 여기서 자고 내일 첫차 타고 바로 출근해도 될까요?”
“그럴 필요 없어. 푹 쉬어.”

음날, 나는 첫차를 타지 않았다. 오후 늦게 서울로 돌아와 집에서 푹 쉬었다.  그 다음 날 일찍 회사에 나갔다. 본부장은 나를 보면서도 아무 말이 없었다.

“이 시안 다시 정리해.” 다른 직원들을 향해 바쁜 듯이 업무지시를 이어갔다. 무표정한 얼굴로 서류를 넘기기도 했다. 자리에 앉아 있긴 했지만 할 일이 없었다. 팀장은 내게 말을 걸지 않았고, 팀원들도 나를 모른 척했다.

팔짱을 끼고 한참 동안 눈앞의 하얀 벽만 노려보다가 나는 빈 종이에 글씨를 끄적였다. 사직서라는 글자를 반듯하게 쓴 봉투에 넣어서 본부장의 책상에 던지다시피 올려놓았다. 그렇게 내 인생 최초의 사표는 전격적으로 제출되었다.

의자에 몸을 파묻고 어이없는 표정으로 날 올려보던 본부장. 시선을 뒤통수로 느끼면서 사무실을 유유히 걸어 나왔다.

잠시 후 디자이너로 같이 입사한 동기 하나가 삐삐를 쳤지만 따로 연락하지 않았다.


일주일 정도 되는 날 쯤이었을까?
총무팀 여직원이 집으로 전화를 걸어왔다.

"오늘 회사로 좀 나오셔야겠는데요."
"왜요? 사표 냈는데요..."
"그게~ 팀장님이 사표 형식이 안 맞다고 하셔서... 회사 양식에 맞게 새로 작성하셔서 제출해야 결재라인에 올라간다고..."

헛웃음이 나왔다. 사표 문안이 규격에 안 맞는 카피라고? 카피라이터 짬밥을 먹은 지 일 년 반정도. 콘셉트에 안 맞는 카피라는 이유로 수없이 퇴짜를 맞았다. 밤새워 쓴 카피가 기획서나 브리프의 규격에 맞지 않아서 반려되긴 다반사였다.

직장 이 년 차의 무모한 오기와 만용이 서려있는 찐 날것의 사직서 문안까지 불합격이라니?
규격봉투에 반듯하게 넣어 제출한 최초의 사표가 '규격 외 카피'로 판정된 것이었다.

사표는 수리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공식적으로 반려된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나는 시간을 뭉개며 회사생활을 이어 나갔다. 본부장도, 팀장도 나를 특별히 챙기지도 쫓아내지도 않았다. 공기처럼 떠다니던 나날이었다.

그러고 나서 두어 달쯤 지난 어느 날, 나는 마침내 회사 양식에 맞춘 정식 사표를 제출했다.

“본인은 일신상의 사유로 사직하고자 하오니 허락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본부장이 말했다.

"지난번 사직서가 훨 좋았는데... 네가 쓴 카피 중에 최고였어. 가식 없고 성깔 있고."

진심이 느껴졌다.

사직서는 빠른 속도로 결재라인을 탔다. 그리고 문제없이 수리되었다.


그 뒤 나는 다른 광고회사로 이직했다. 새로운 회사에서도 규격과 콘셉트에 맞지 않는 카피를 수도 없이 써댔다. 퇴짜를 맞는 일은 여전했지만, 살아남는 카피도 많았다. 그렇게 내 커리어는 이어졌다. 지금 생각해도 내 생애 가장 기개 넘치고 시의적절했던 카피는 그때의 일곱 글자였다.

“그만두겠습니다.”

그만두고 싶을 때, 보란 듯이 그만두는 결단. 그때도, 지금도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그 불량 사표는 내게 자유를, 그리고 날개를 달아 주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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