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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에누 Nov 29. 2024

[일과 놀이 사이]           은교*의 복직기

백수의 구직활동 다큐픽션

퇴임한 지 일 년이 지났다. 적어도 이삼 년 동안은 일을 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맨날 집에서 딩굴거리다 보니까 뭔가라도 일을 해야 할 것 같은 강박증이 발동한다. 온라인 강의나 기고 정도론 성이 안 찬다.


티브이를 틀면 나오는 유명인들, 지금도 활발히 활동하는 친구들을 보면 은근히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부럽기도 하고 초조감도 든다. 이렇게 자꾸 나이가 들면 영영 안방 늙은이가 되어버리는 건 아닐까? 일에서 완전히 멀어져 버리는 건 아닐까?


누군가는 후배가 대표로 있는 회사의 고문을 하기도 한다. 친구의 배려로 사무실에 출근해서 무보직이지만 수당도 받고 법카를 쓰기도 한다. 하지만 나한테는 안 맞는 일이다. 그럴 만큼 인복도 없고 감당도 안 되는 호사다.


봉사활동이라도 하고 싶다. 무료 강의나 돌봄 활동, 전철 배달, 주차봉사, 편의점 알바 같은 것들도 떠오른다. 수련병원에서 전공의 하다가 사표 내고 자발적 실업자가 된 딸은 한동안 시급 알바를 했다. 출퇴근 도우미 운전을 하다 보니 나도 일하고 싶어졌다.


돈은 중요하지 않다고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사실 용돈도 벌 수 있으면 좋겠다. 연금을 받고는 있지만 살짝 아쉽다. 강연 수당이나 심사비, 원고료 같은 거면 금상첨화다.


요즘 들어 연세대 퇴임하신 김형석 명예교수님 이야기도 예사롭게 보아 넘겨지지 않는다. 백세가 넘게 장수하시는 건 크게 부럽지 않다. 나도 자칫하면 그 나이까지 살지 모른다. 아직은 몸이 말을 들으니 교수님보다 더 다이내믹하게 사는 듯하다. 요즘의 나는 지. 덕. 체 중에서 체육이 가장 잘 되고 있다. 그래도 강연이나 저술 같은 일을 하시면서 자존감 높은 삶을 누리는 걸 보면 보기가 좋다.


그런저런 생각 끝에 구직활동에 돌입했다.




면접일이 다가왔다. 꽤 괜찮아 보이는 회사 같다. 깔끔한 양복을 차려입고 면접장에 들어섰다. ‘이 구역에서 가장 어린 사람’ 포스를 한껏 뽐내는 면접관이 대기 중이었다. 나를 보며 실눈을 뜨는 그 표정, 어쩐지 완장을 찬 듯 기세가 당당하다.


면접관은 시큰둥했다. 내 나이쯤 되면 다들 일 처리 빠릿빠릿 못할 거라는 편견이 작용했으려나? 입가에 미소를 지었지만 살짝 주눅 들고 말았다. 단지 젊다는 것이 권력인가? 자괴감 쓰나미... 십 년만 젊었어도 저 사람에게 저자세일 일은 없었을 텐데.


면접관 앞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자신의 모습에 자괴감이 든다. 이게 뭐라고 떨리기까지 할까? 대학에서 교수를 했다는 이야기는 안 하게 된다. 오히려 일을 구하는 데는 방해만 되는 스펙일 테니까. 여유로운 미소로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저는 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사회 경험을 쌓아왔습니다. 차분히 업무를 처리할 자신이 있습니다.”


그럭저럭 자기소개와 업무계획 등은 잘 말한 것 같다. 그래도 면접관의 반응은 썩 좋은 느낌은 아니다. 아무래도 나이가 문제일 거다. 자기들의 밑에 두고 관리하기도 편하지 않을 것이다. 빠릿빠릿 일을 잘하지도 않을 거다. 그래서 괜히 주눅 들게 된다. 암튼 일주일 후에 연락이 오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면접이 끝난 후, 마치 학창 시절 성적 발표를 기다리는 마음처럼 설렘과 긴장이 교차했다. 채용 결과는 일주일 내로 연락을 준다고 했다. 막상 집에 돌아오니 온갖 상상이 머리를 채웠다.


‘합격하면 무슨 일을 하게 될까?’ 생각하다가도, “그런데 불합격이라면?” 하는 불안이 따라왔다. 그래서 지원할 만한 다른 일자리들을 찾아보기로 했다. 노인 돌봄 활동, 도서관 자원봉사, 심지어 편의점 아르바이트까지도 눈에 들어왔다. 그동안 들어보지도 않았던 업계 용어들에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나이 들어서도 유연함을 잃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다시금 마음을 다잡았다.




일주일 후, 드디어 전화가 왔다. “축하드립니다! 합격이십니다.” 생각지도 못한 소식에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그런데 담당자가 말했다. “근데... 면접관님이 선생님과의 대화에 너무 만족스러워하셔서요. 편하게 나눈 커피 타임때 해주신 이런저런 말씀이 재밌다고 하셔서...”


잠시 머뭇거리더니 덧붙였다. “그래서 선생님이 새로운 ‘사내 멘토 프로그램’을 도맡아 주시면 좋겠다고 결론이 났습니다! 강연도 몇 차례 해주시면 더할 나위 없겠습니다. 젊은 직원들에게 굉장한 영감을 주실 것 같아요!”


예상 밖의 반전에 마음이 살짝 풀렸다. 직장인들 사이에서 내가 멘토로 자리 잡게 될 줄이야. 취업을 한 게 아니라 오히려 인생 경험을 전수하러 오게 된 셈이었다.


기쁨도 잠시, 문득 내일부터 정식 근무라는 소식에 긴장이 찾아왔다. “뭐, 어쩌겠나! 이력서는 화려해도, 신입은 신입이지!”


그렇게 나는 작은 회사의 ‘사내 멘토’로서 일하게 되었다. 뭔가를 가르치는 자리가 아닌, 조언자이자 인생 경험을 나누는 사람. 연륜 있는 경험을 나누는 자리에서 나름의 자부심을 느끼게 되었다.




출근 첫날,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사 들고 사무실에 들어섰다. 사람들이 하나둘씩 나를 힐끔거렸다. 늙수그레한 신입이 들어올 거라곤 상상도 못 했으리라. 다소 어색하게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건넸지만, 직원들의 표정에서 약간의 당혹감이 묻어 나왔다.


업무가 시작되고, 아침 미팅 시간이 되자 누군가 찾아와 속삭였다. “선생님, 오늘은 팀장님께서 중요한 프레젠테이션을 부탁하셨어요.” 아니, 첫날부터 프레젠테이션이라니! 주춤거렸지만 강단에서 쌓은 경력이 있어 크게 당황스럽진 않다.


갑자기 긴장감이 도파민으로 올라오는 기분. 오전 내내 준비한 슬라이드를 넘기며 성심성의껏 발표를 마쳤는데, 문득 보니 직원들의 반응이 미묘했다. 발표를 너무 진지하게 한 나머지, 다들 숨죽이고 있었던 것. 아, 회사 프레젠테이션에서는 너무 엄숙한 분위기를 피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둘째 날엔 점심시간에 회사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젊은 동료들이 모여 있길래 끼어들어 내 청년 시절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런데 막상 얘기를 하다 보니 다들 이미 알고 있는 SNS 트렌드나 최신 유행이라, 괜히 혼자 구세대처럼 보였을까 민망해졌다.


셋째 날엔 복사기를 사용하려는데 어딘가 작동이 수상하다. ‘역시 신식 기계는 어렵다...’ 복사기 앞에서 꽤 오랜 시간 씨름하던 끝에, 젊은 직원이 다가와 다정하게 작동법을 알려줬다. “이렇게 버튼을 누르시면 되는데요, 이건 터치스크린으로...”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 여기저기 소소한 실수를 반복하며 회사 생활에 조금씩 적응했다. 그러다 한 달 후, 사내 멘토 프로그램에서 내 이름이 정식으로 소개되었다. 처음엔 조금 당황했지만, 이내 직원들에게 내 이야기를 편하게 들려줄 수 있는 자리가 생겨 행복한 마음이 들었다.


매일 아침 커피 한 잔과 함께 ‘그 나이에도 멋지게 적응하는 신입’으로 불리게 된 내 모습에 묘한 자부심이 밀려왔다.




첫 주가 지나면서, 젊은 동료들 속에서 종종 위축되는 순간들도 생겨났다. 예전에는 수백 명의 학생 앞에서도 당당하게 서 있던 자신이었는데, 정작 회사에서는 사소한 실수 하나에도 얼굴이 빨개졌다.


#1. 어색한 침묵


팀장이 “우리 생각을 자유롭게 나눠 보죠!”라고 말하자 마음이 움찔했다. 교수 시절에는 의견을 이끌어 내고 주도하는 것이 일이었는데, 막상 신입으로서 발언하는 건 다른 느낌이었다. 용기 내어 의견을 내봤지만, 동료들이 짧게 “그런 것도 괜찮네요”라고 반응하고는 바로 다른 주제로 넘어갔다. 그 순간, 자기 의견이 별로였던 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 내 표정을 본 한 동료가 다가와 “괜찮으세요? 처음엔 누구나 그렇다니까요”라고 위로해 주었다. 그 한마디에 마음이 살짝 풀렸다.


#2. 보고서 소동


보고서를 쓰는데 논문이 되어버렸다. 장황하게 작성해 팀장에게 넘겼다. 팀장은 웃으며 말했다. “선생님, 요즘은 좀 간단하고 직관적으로 쓰는 게 트렌드예요.” 쑥스러움이 몰려왔지만, 그래도 팀장의 말투는 사납진 않았다. 어깨를 움츠리지 않고 바로 수정했다.


#3. 말동무


나와 비슷한 또래의 ‘장년 신입’ 한 분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나보다 몇 년 더 선배이신데, 업무를 익히는 중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많았다. 그날 이후, 둘이 나란히 앉아 업무 얘기를 나누기도 하고 점심도 함께하게 되었다. 특히 퇴근 후 회사 근처의 작은 카페에 들러 커피 한 잔씩 하며 하루 동안의 소소한 실수를 털어놓는 시간이 좋았다.


“오늘 내가 젊은 친구한테 복사기 사용법을 또 물어봤네요. 조금씩 기억은 나는데, 요즘 기계들은 왜 이렇게 복잡한지!”

“저도 그래요! 간단히 말하면 될 걸, 괜히 길게 얘기해서 팀원들이 웃더라니까요.”


그렇게 한바탕 웃다 보면 하루의 피로가 풀리곤 했다. 때로는 두 사람 사이에 나이를 뛰어넘는 공감과 위로가 쌓여가며, 회사 생활이 점차 익숙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느덧 두 달이 지났다. 내가 만든 작은 실수와 배운 것들이 켜켜이 쌓여간다. 동료들과도 조금씩 친해지면서, 처음의 주눅들던 마음이 많이 사라졌다. 그리고 퇴근 후 말동무와의 짧은 대화 시간 덕분에 다시금 ‘나이 들어서도 배울 수 있다’는 긍정적인 마음이 자라나고 있다.




*은교: 퇴임교수=퇴교. 그래서 은퇴교수를

            줄여 써 봤지만 그게 그 말인 것 같다.


*제목도 장난 같지만 이 글도 반은 장난이다.


* 이 글에 과몰입한 몇몇 들이 축하난을    

   보내겠다고 주소를 알려달라고 하네요.

   정중히 사양하고 축하 글과 응원만

   받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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