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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져니박 Jyeoni Park Sep 06. 2024

어리바리 오토바이 가이드 쥐옌 (상)

하장루프투어

# 부정하고픈 첫 만남


안스하우스에서의 다음날 아침이었다. 동네 아이들 비질하는 소리와 골목을 부지런히 지나다니는 오토바이 소리가 내 단잠을 깨웠다. 얼굴을 비비며 일어나는데, 정신이 렷해질수록 마음 한편이 무거웠다. 어젯밤 덜컥 결정한 투어 때문이었다. 여행을 시작한 지 일주일, 앞으로 남은 기간은 5개월 하고도 3주였다. 그런데 삼일 만에 36만 원을 쓰다니. 내게는 피 같은 지출이었다. 그냥 안 한다고 취소할까? 1층에 내려가기까지 수없이 고민을 했지만 곧 쓸데없는 생각이었음을 깨달았다. 이미 밑에서 한 남자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남자는 나의 상상과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선글라스를 딱 끼고 가이드로써 전문적인 느낌 풍기는 아저씨를 상상했는데, 웬 학생이 와있었다. 운동복 차림에 맨발슬리퍼, 반듯하게 자른 앞머리는 꼭 영화 신비한 동물사전의 에즈라밀러를 떠올리게 했다. 나는 안 아주머니가 아침으로 내온 찐빵을 먹으면서 눈앞에 서성이는 그를 애써 부정했다. '어쩌면 진짜 가이드는 따로 있을 거야.' 그러나 이변은 없었다. 그는 내 가방을 비닐로 감싸 오토바이 끝에 묶었고 자신 뒤에 나를 앉게 했다. 차라리 단체로 떠나는 투어였으면 덜 어색했을 것을. 안 아주머니만 신나서 뻣뻣한 포즈를 취하는 우리를 여러 각도로 찍어댔다. 그렇게 오토바이는 서먹함을 가득 실은 채 대문을 빠져나왔다.


처음엔 어디를 잡아야 할지 몰라 그의 어깨를 잡았다. 시내 중심지를 빠져나가던 중에 나는 그의 이름이 쥐옌이라는 것과 나이가 서로 같다는 것을 알았다. 한국의 나이 중심문화에 빠지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나였지만 이때만큼은 동갑이라니 어쩐지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Let’s go는 한국어로?”


산길을 올라가는 중에 쥐옌이 내게 물었다. 나는 ‘가자’라는 한국어를 알려줬다. 베트남어로 가자는 ‘디토이’라고 했다. 나는 어딘가 멈췄다 다시 출발할 때마다 까먹지 않고 디토이를 외쳤다. 하지만 쥐옌은 매번 물었다.


“한국어로 뭐였더라?”


‘가’, ‘자’ 이 두 글자가 뭐 그리 어렵단 말인가. 그렇게 얘기해도 기억하기 어렵다는 듯 쥐옌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 괜찮다고 말할 수 있을 때까지


구불거리는 길을 1시간쯤 달렸을까.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지다 말다를 반복했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자욱한 안개가 산을 넘나들었다. 가끔 맞은편 도로에서 거대한 화물차들이 우악스럽게 내려올 때마다 나는 가슴이 철렁거렸다. 그 와중에 쥐옌은 내게 자꾸 커피를 좋아하냐고 물었다. 나는 자주 마시진 않아도 ‘예스’라고 답했다. 그 때문인지 쥐옌은 중간에 어느 전망대에 오토바이를 새웠다. 주차장에는 이미 나처럼 투어를 온 관광객들의 오토바이가 빽빽했다. 그중엔 더러 지인도 있는지 쥐옌은 인사를 주고받았다.  


산중턱 풍경이 내려다 보이는 야외카페는 안개로 인해 축축이 젖어있었다. 메뉴를 보고 있던 중에 쥐이 한 발치 뒤에서 방관하듯 내게 물었다.


“뭐 마실래?”


나는 무엇이 맛있는지 물었으나 쥐옌은 못 알아들은 것인지 겸연쩍게 웃으며 어깨만 으쓱했다. 불길한 예감은 점차 현실이 되었다. 가이드가 모든 걸 살필테니 걱정 말라던 안 아주머니의 말은 순 거짓말 같았다. 쥐옌은 어느샌가 혼자 자리를 잡고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커피값은 옵션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것인가. 따져 물어야 하나 싶었지만 말도 안 통할게 뻔했다. 주문도 안 하고 돌아온 나를 쥐옌은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나는 별로 먹고 싶지 않아 졌다는 의사를 표하곤 자리에 앉아 축축한 세상을 바라보았다. 다들 뭐가 그리 좋은지. 서양인 관광객들과 가이드들의 웃음소리로 카페 안이 왁자지껄했다.

 

도로는 점차 좁아져 산 깊숙이 파고들었다. 어딜 가냐고 물으니 ‘케이브(Cave 동굴)’란다. 지그제그 낭떠러지 같은 길을 쥐옌은 익숙한 듯 막힘없이 내려갔다. 좋지 못한 도로에 엉덩방아를 몇 번 찍으니 어느 마을 초입에 도착했다. 오토바이에서 내려 쥐옌은 나를 진흙탕길로 인도했다. 하필이면 나는 바닥에 구멍이 송송 뚫린 조깅화를 신고 있었다. 몇 발자국 가지 않아서 진흙물이 축축이 발에 스며들었다. 진흙탕구간이 한바탕 끝나고는 염소똥이 널브러져 있는 계단을 올랐다. 이왕 온 거 충분히 즐겨보자 싶어 씩씩하게 걸음을 옮기는데 앞서가던 쥐옌이 얼마 못 가 숨을 헐떡거렸다. 누가 가이드고 누가 관광객인지. 마주 오던 백인 커플의 가이드는 영어도 곧잘 하며 이것저것을 설명해 주던데, 내 가이드는 제 한 몸 간수하기도 버거워 보였다.


쥐옌에 대한 못마땅함이 눈덩이처럼 굴러 거대해졌을 때쯤 동굴 매표소에 이르렀다. 쥐옌이 매표소 직원 아주머니와 얘기 하나 싶더니 내게 돈을 내라는 것이다. 이건 아니지. 커피는 몰라도 입장료는 분명 포함사항이었다. 잘 걸렸다 이놈 하는 심정으로 손짓 발짓 해가며 쥐옌에게 따져 물었다. 쥐옌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안 아주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미안해. 잘 못 알고 있었어."


쥐옌은 이제까지 자신이 그저 오토바이 가이드로만 고용된 줄 알았던 것이다. 맘 같아선 화를 내고 싶은데 그의 표정이 정말 몰랐다는 듯 순수해서 사과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했던가. 동굴에 들어가서 궁금한 걸 물을 때마다 대답은 들을 수 없었지만 사진은 열심히 찍어주는 쥐옌이었다. 동굴을 나와서는 '라이'를 먹으러 간다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라이스(Rice 밥)'를 먹는다는 것이었다. 한참 걸었던 터라 허기가 진 나에게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쥐옌은 계란말이가 맛있는 어느 밥집에 나를 데려갔다. 밥 술을 뜨는 그의 네 번째 손가락에 금반지가 끼워져 있는 거 보니 어느 집안의 가장인가 싶었다.


"여동생 두 명 있어."


반지는 그냥 멋이었나 보다. 가족관계를 물으니 집안에 맏이인 데다 여동생이 두 명이란다. 나도 그와 같은 처지여서 그런지 다시 반가움이 일었다. '세계 어느 곳에 사는 친구는 오토바이 가이드를 하는구나.' 그렇게 생각하니 쥐옌에게 동질감 같은 게 생겼다. 한국에서 일을 하던 나날들이 떠올랐다. 돈을 벌려고 아등바등하던 시간들. 나는 관광을 나온 것이지만 쥐옌에겐 생업의 전선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니 그간 미운 감정이 조금 가시는 듯했다.

 

밥을 먹고 나오니 날씨가 거짓말처럼 화창해졌다. 쥐옌이 내게 에어팟 한쪽을 건넸다. 그가 케이팝 그룹 중에 가장 좋아한다는 블랙핑크의 불장난이 내 고막을 쾅쾅 울렸다. 음악이 고조될수록 오토바이는 속도를 높였다. 쨍한 햇살이 우리를 높디높은 산들 사이로 인도했다. 축축하게 젖은 안개는 물러가고 몽글몽글한 구름이 파란 하늘에  잡힐 듯 떠다녔다. 그러다 다시 강과 들을 가로지르고 광활한 대자연 속에 파묻혔을 때 비로소 나는 모든 게 괜찮아졌다고 말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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