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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져니박 Jyeoni Park Sep 13. 2024

어리바리 오토바이 가이드 쥐옌 (하)

하장루프투어

 장대비가 쏟아지는 이튿날 아침이었다. 과연 출발할 수 있을까. 숙소 처마 밑에서 비로 뿌옇게 번진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데, 쥐옌이 우비를 건넸다. 상의, 하의, 신발까지 나누어진 꼼꼼하고도 철저한 우비였다. 나는 우주복을 입은 사람처럼 뒤뚱뒤뚱 빗속으로 나아갔고 쥐옌은 짐을 오토바이에 묶으며 출발채비를 했다.

 숙소를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빗방울이 수없이 날아와 내 눈을 때렸다. 눈도 못 뜨고 달리기를 한참. 커버가 달린 헬멧을 쓴 쥐옌이 나중에야 백미러로 내 모습을 발견하곤 오토바이를 멈춰 세웠다. 그리곤 수납함에서 보호안경을 꺼내주며 진즉 말하지 않았냐는 듯 히죽 웃었다.

 그렇게 세상을 다시 볼 수 있게 되자 아찔한 광경이 펼쳐졌다. 구불거리는 도로에 안개가 빽빽해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상황에서 쥐옌은 사납게 경적을 울려대며 질주했다. 간혹 맞은편 오토바이가 안갯속에서 불쑥 튀어나올 때면 몸이 자동으로 움찔거렸다. 부디 살아서 돌아갈 수 있기를. 뒤에 탄 나로선 간절히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비가 그치자 이번엔 혹독한 추위가 찾아왔다. 한국의 겨울이 싫어 동남아로 피신을 온 것도 있었는데, 하장의 1월은 한국의 한겨울과도 견줄만한 날씨였다. 중국 국경 근처를 지날 땐 심지어 한국에서도 제대로 보지 못했던 우박이 떨어졌다. 살을 에는 듯한 차가운 바람을 고스란히 견디며 몇 시간을 달렸다. 장갑을 꼈음에도 손은 벌겋게 부르텄고 입은 마비되어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쥐옌은 들려할 곳에서 충실히 멈춰 섰다. 중간중간 꽃을 손질하던 요정 같은 몽족아이를 만났고, 사파이어 빛깔의 성녁꾸이 호수를 탐험했으며, 집채만 한 베트남 국기가 바람에 펄럭이는 전망대에 올랐다. 꼬치를 파는 노점에서는 쥐옌도 알아들을 수 없다는 몽족사람들의 말에 귀도 기울여 보고, 고구마를 굽던 소녀와 제기차기 같은 민속놀이 다꺼우도 찼다. 그러다 보니 우리의 얼굴은 겨울날 동네를 쏘다니는 코찔찔이 어린이들 마냥 되어있었다.


"사우나."


 글징글한 추위 속에 숙소를 간다고 하니 신이 나있던 참이었다. 쥐옌은 큰 가마가 있는 곳에 멈춰서 사우나를 하자고 제안했다. 그사이 감기가 걸린 쥐옌은 어쩌면 나보다 더 간절히 사우나를 원하는 듯했다. 나 또한 뜨끈한 목욕물에 몸을 담글 상상을 하니 마음이 절로 녹아내렸다.

 그런데 문제는 욕조가 한 방에 두 개였다. 옷을 입고 들어가야 하나? 샤워는? 불편한 걱정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지만 말이 통해야 말이지. 그도 다 생각이 있겠다 싶어 그냥 그러자고 했다.

 다행히도 사장님은 각 방에 물을 받아놓았다. 욕조에 알맞게 받아진 암홍색 물 위로 거품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그 물의 정체가 무엇인지 몰라도(나중에 담뱃잎 냄새가 내내 몸에서 진동했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 따질 겨를 없이 몸을 담갔다. 따뜻한 기운이 퍼짐과 동시에 꽉 조여있던 매듭이 스르륵 풀리듯, 고단했던 하루가 행복한 기억으로 빛났다.


"유 오케이?"

"굿!"


 벽 너머로 물 트는 소리와 함께 쥐옌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몇 마디 나누다 어느샌가 조용히 각자의 시간에 잠겨 들었다. 반 시간 정도를 푹 들어 있다 나오니 쥐옌이 대기실 탁자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내게 미리 준비해 둔 생강차를 한 잔 따라주었다. 그리고 둘 다 피로가 말끔히 씻겨나간 얼굴로 건배했다. 잔에는 삼 일간 동고동락한 동료애가 가득 담겨 찰랑거렸다.

 숙소에서 저녁을 먹고 모닥불에 둘러앉아 마지막 밤을 보냈다. 이제 쥐옌은 내 진짜 가이드이자 친구였다. 못마땅한 마음으로 시작한 투어였으나 끝날 때쯤이 되니 아쉽고도 고마운 마음이 장작불에 타닥거렸다. 같이 그간의 사진을 돌려보는 중에 주인집 아기가 뒤뚱뒤뚱 걸어왔다.

 푸우우! 꺄르륵!

 쥐옌이 아기의 배에 바람을 넣는 시늉 하니 고요하던 밤이 한바탕 웃음바다였다.  


 하노이로 다시 돌아가는 날, 하장에 온 첫날 내렸던 광장에 쥐옌과 서서 버스를 기다렸다. 헤어짐의 순간은 '굿 럭'이란 말로 짧고도 간결했다. 나중에 버스에서 문자로 나눈 이야기지만 쥐옌도 언젠가 나처럼 세계를 여행하고 싶다고 말했다. 언젠간 꼭 그런 날이 오기를. 쥐옌도 그날을 꿈꾸며 하장 어느 가파른 산길을 신나게 내달리고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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