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져니박 Jyeoni Park
Aug 23. 2024
"모든 게 경험이지, 그냥 가봐, 조심하면서."
필리핀에서 온 케이트와 베트남 하노이에서
케이트는 내가 하노이 올드타운에서 지낼 때 만난 룸메이트였다. 동글동글한 이목구비와 중앙으로 추켜올린 머리가 발랄한 소녀 같으면서도 말투는 차분했다. 아쉽게도 내가 케이트를 알게 되었을 땐 이미 그녀는 내일모레 출국을 앞두고 있었다.
"마지막날을 어떻게 보내려고?"
나의 물음에 케이트는 친구에게 타투를 받으러 간다고 했다. 무료라며 내게도 받을 생각이 있는지 물었지만 나는 정중히 거절했다. 대신 내일 점심이나 같이 먹자고 했다. 그리고 마지막날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같이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케이트와 다시 만난 건 오바마가 다녀간 분짜식당 앞에서였다. 우리는 국수를 국물에 담가먹으면서 대화를 이어갔다. 케이트는 내 다음 목적지를 궁금해했다. 나는 게스트하우스 직원이 추천해 준 대로 '하장'에 갈 것 같다고 했다. 그렇게 말하고 나니 이런저런 걱정이 몰려왔다. 나는 자격시험 이후로 한 번도 안 타본 오토바이를 험난한 산지에서 혼자 끌고 다닐 수 있을지 막막하다고 푸념했다.
"모든 게 경험이지, 그냥 가봐, 조심하면서."
케이트의 조언은 마치 주문처럼 되어 우리를 하루종일 따라다녔다. 반 미에우의 문묘에 도착했을 땐 비가 내렸는데, 우산을 하나 살까 물으니 케이트는 그냥 비를 맞자며 이렇게 말했다.
"just experience!"
나는 이참에 빗속에서 춤출 줄 아는 사람이 되어보기로 했다. 문묘를 돌아보는 동안 빗방울은 더 굵어졌고 얇은 신발이 젖어갔지만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케이트는 눈을 반짝이며 전시에 관한 설명을 빠짐없이 읽었다. 그녀가 그럴만했던 것이 필리핀은 스페인 식민지배 때 천주교가 들어오면서 유교나 불교 유적을 찾아보기 어렵다고 했다. 그때 나는 그 사실이 그저 흥미로울 뿐 내 마지막 여행지가 계획에도 없던 필리핀이 될 줄은 전혀 알지 못했다.
다음으로 케이트가 가고 싶은 곳은 기찻길 카페였다. 기차가 지나다니는 철로 가까이 카페들이 즐비해 있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개인적으로는 출입이 금지되어 외부 중개인을 따라 카페로 들어가야 했다. 중개인은 개구멍 드나들듯 익숙하게 남의 살림주방을 지나쳐 이름 모를 카페에 우리를 대려다 놓았다. 거기서 에그커피를 처음 맛봤다. 그냥 녹은 커피 아이스크림맛이었다. 케이트는 에그커피를 매우 좋아했는데, 이건 진짜가 아니라며 '카페 지앙' 에그커피를 먹어볼 것을 추천했다. 그렇게 한참을 비 내리는 풍경을 바라보다 보니 날이 저물어 카페 홍등에 하나둘 불이 들어왔다.
케이트가 이제껏 한 번도 안 먹어 봤다던 반미를 저녁으로 먹어보고 오는 길이었다. 우리는 비도 피할 겸 소품샵에 들어갔다. 반지를 뒤적거리는 중에 'Carpenters의 Close to you'가 흘러나왔다. 케이트와 나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손가락에 여러 개의 반지를 끼워보았다.
"이걸로 하나 맞추자."
해바라기 세 개가 새겨진 우정반지를 나란히 끼고 다시 빗속으로 나왔다. 서로 알게 된 지 이틀이 채 되지 않은 우리지만 마치 몇 년째 같은 반인 여고생들 같았다. 멈추지 않는 빗줄기만큼이나 수다는 끈질기게 이어졌고 호안끼엠 호수에 이르렀을 땐 아득한 분위기 때문인지 주제가 사랑으로 흘렀다. 고향에 두고 온 사람이라도 있는지 물으니 케이트는 만약 그렇다면 자신이 여기 혼자 왔겠냐고 일리 있는 대답을 했다. 연애, 사랑에 별로 일가견이 없는 사람 둘이 분위기를 빌려 일말의 추억을 내비쳤다. 케이트는 좋아하던 남자가 알고 보니 게이었다는 이야기, 나는 썸인지 쌈인지 알 수 없는 한 친구를 두고 떠나왔단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결국 결론은 '혼자서도 행복하면 됐지'하며 숙소로 돌아왔다.
하루종일 맞은 빗물을 씻어내고 쉬고 있을 때 케이트가 커튼 너머로 나를 불러냈다. 케이트는 알록달록한 무늬가 새겨져 있는 파란색 띠를 내 손목에 둘러주며 말했다.
"내가 사파에서 받은 행운의 팔찌야. 너 줄게"
이는 케이트가 내게 보내는 굿바이 인사이자 앞으로의 여행에 대한 응원 같았다. 그렇게 케이트는 다음날 새벽 비행기로 떠났다. 내가 일어났을 때 옆 침대는 말끔히 비워져 있었다. 나는 거리로 나와 카페 지앙으로 향했다. 어제의 궂은 날씨가 무색하게도 도심 풍경이 산뜻했다. 소문대로 카페지앙은 에그커피를 맛보려는 관광객들로 북적였다. 나는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아이스 에그커피 한 잔을 주문했다. 커피는 주문한 지 몇 분도 채 되지 않아 바로 나왔다. 한 모금 마셔보니 그제야 어제의 케이트말을 좀 알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