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날 수 있을 때 떠나라.
그냥 궁금했다. 내가 아는 곳을 벗어나면 어떤 세상이 있을까. 그러한 호기심 때문에 초등학생시절 먼 할머니 댁까지 자전거를 끌고 가 어른들에게 혼이난 적도 있었다. 논산에서 나고 자라 중학생 때는 대전을, 고등학교 땐 서울을, 대학생 땐 일본을 스스로 나가보면서 내가 보지 못한 세계에 대한 호기심은 계속 커졌다. 그와 동시에 사회가 주는 나의 책임도 커졌다. 대학을 졸업하면 취직을 하고 취직을 하면 가정을 꾸리라는 무언의 규칙 같은 것이었다.
"나중에 너 짝 만나서 가."
혼자 6개월간 해외여행 좀 다녀오겠다는 말에 엄마는 근심이 찬 얼굴로 나를 설득하려 했다.
"엄마, 나 지금 나가지 않으면 더 못 나가. 내가 책임져야 할 것들은 앞으로 더 늘어날 거야. 특히 내 짝을 만나면 더 하지. 그렇지 않아?"
나의 반박이 좀 통했는지 엄마는 아무 말하지 않으셨다. 어쩌면 부모님 모두 내가 가지 말라고 해서 가지 않을 성격이 아님을 잘 알고 계셨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1년 가까이 백만 원 언저리 월급의 영어보조강사로 일하면서 돈을 모았다. 그 전 직장생활에서 모은 돈까지 합하여 천만 원이 모이기까지 시간은 그야말로 '무풍지대'였다. 매일 일과 집을 오가는 지루한 쳇바퀴 속에서 언젠가 이 발걸음을 다른 곳으로 돌릴 날만을 고대하고 있었다.
"지금 가는 게 맞을까?"
출발이 2주 앞으로 성큼 다가온 겨울날, 한옥펜션의 뜨끈한 아랫목에 여자 셋이서 둘러앉아 진솔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하필 떠날 때가 되어서야 마음에 바람이 조금씩 불어오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보기엔 그 친구 좋아하는 거 맞는 거 같아."
아랫목의 열기와 마신 와인으로 인해 얼굴이 벌게진 한 친구가 내게 말했다. 나는 아니라고 반박하지 못했다. 이미 준비가 다 끝났기에 되돌릴 수 없음을 잘 알면서도 마음속에 들어온 한 친구로 인해 그냥 가지 말까 고민하던 시간도 있었다.
그러나 모든 것은 계획대로 흘러 떠나기로 한 2024년 1월 15일에 이르렀다. 엄마는 일찍부터 삼겹살을 구워 한상 가득 아침밥을 차리셨고 두 다리 뻗고 자게 일찍 오라는 아빠의 당부와 두 동생들의 배웅을 받으며 버스에 올랐다. 그렇게 나는 첫 번째 여행지 베트남 하노이로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