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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부부 둘과 떠난 달랏 2

by 져니박 Jyeoni Park Nov 29.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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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금슬금 들어온 햇살에 눈을 떴다. 여전히 저만치 제사상이 놓여있는 방이었지만 따스한 빛 때문인지 어젯밤에 느꼈던 서늘한 기분은 더 이상 들지 않았다.

밖은 일찌감치 분주했다. 1층 식탁엔 주인집 할머니와 터 언니가 담소를 나누고 있었고 손자 부부는 주방에서 알 수 없는 과일 음료를 만들고 있었다. 나는 준비를 마치고 내려와 슬그머니 식탁에 앉았다.

"할머니가 너 예쁘데."

터언니가 내게 통역을 해왔다. 할머니는 인자하게 미소를 지었다. 큰 주택에 주인답게 마음에 여유와 고상함이 느껴졌다.

"깜언(감사합니다)"

나는 어색히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대문밖을 나오니 오토바이 세 대가 주차되어 있었다. 아침부터 내 여권을 가져가더니 남편 둘이서 오토바이를 빌려온 것이다. 아직 운전이 서툰 나는 터언니 뒤에 탔고 언니 남편은 홀로 오토바이를 몰았다.

친구 부부네는 낭만 있게 둘이 붙어 달리는데, 내가 혹여 끼어들어 그들의 사이를 방해한 건 아닌가 잠깐의 미안함이 들었다.

고기가 큼직이 들어간 쌀국수를 한 그릇씩 하고 외곽으로 나갔다. 고산지대라 날씨가 가을날처럼 선선했다. 저지대의 풍경들이 내려다보이도로에 오토바이가 줄지어 달렸다. 고개를 높이 드니 동남아에서 보기 드문 소나무가 산을 뒤덮고 있었다. 꼭 한국에 온 것 같았다.


커피농장을 지나쳐 몽골리안 파크에 도착했다. 그곳엔 주말에 나들이를 나온 현지인들로 북적였다. 그중엔 몽골전통 의상을 입은 사람들도 종종 눈에 띄었다. 그들은 복슬복슬한 모피에 화려한 분장을 하곤 화보모델처럼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처음 베트남에 와서부터 느낀 사실이지만, 이곳 사람들은 사진에 우리보다도 더 심인 것 같았다. 다들 쉼 없이 포즈를 취하고 사진을 찍었다. 우리도 그랬다. 토끼 농장 한가운데 놓인 거울에서, 알파카와 낙타 앞에서.

그러면서 나도 자연스레 그들 무리에 일원이 되어갔다. 특히 이곳 명물인 레인보우 슬라이드를 타고부터 더욱 그랬다.

"별로 안 무서운가 봐, 다들 소리를 안지르네."

대기 줄에서 터언니가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우리 차례가 다가와 일렬로 튜브에 올랐다. 출발과 동시에 다들 비명이 난무했다.

"누가 소리를 안 지른대!"

깜짝할 사이 튜브가 멈추자 언니가 소리쳤다. 우리는 초췌해진 몰골로 깔깔 웃었다.


2박 3일 동안 달랏에서 그들과 특별한 곳을 간 건 아니었다. 테마파크에서 돌아온 우리는 낮잠을 자고 해 질 녘에 나가 밤거리를 돌아다녔다. 야경이 보이는 광장에서 여러 콘셉트로 사진을 찍으며 놀았다. 그중 몸개그 넘치는 터언니 남편덕에 나도 또래들과 어울리듯 같이 즐거워했다.

그리고 호숫가에 있는 노점카페에 들렀다. 오토바이 뒷좌석을 개조해 젊은 사장님이 음료를 팔고 있는 곳이었다. 주변은 변변한 식탁이나 의자하나 없이 그저 찬기를 막아줄 카펫 몇 개만 깔려 있었다. 거기서 베트남 젊은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달랏의 밤을 즐기고 있었다.

우리도 따뜻한 음료를 한잔씩 받아 들고 다섯이서 모여 앉았다. 터언니 남편은 알아들을 수 없는 농담을 계속했고 나머지 사람들은 따라 웃었다. 어쩌면 그들에겐 늘 그렇듯 평범한 시간이었겠지만 혼자 여행을 하던 내겐 그들 사이에 있는 게 아주 특별하고 따뜻했다.


이별의 날은 금방 찾아왔다. 도시가 구름으로 뒤덮인 모습을 볼 수 있는 카페가 있다며 우리는 새벽에 밖을 나섰다. 차는 점차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느 산속으로 들어갔고, 거기엔 정말 불이 켜진 카페가 하나가 있었다. 몇몇 사람들은 벌써 밖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고 우리도 음료를 시키고 앉았다.

추위와 졸음이 밀려오는 가운데 날은 서서히 밝아갔다. 언니가 미리 보여준 영상만큼은 아니었어도 어느 순간은 구름 위에 땅이 떠있는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차분히 가라앉은 공기에 내내 투닥거렸던 터언니 부부는 손을 잡고 한참 풍경을 감상했다. 그리고 친구부부는 사진을 찍느라 바빴다. 나는 잠시 자리를 빠져나와 카페 잔디밭을 거닐었다. 여기저기 베트남 젊은이들이 앉아 있는 가운데 강렬한 아침 햇볕이 구름사이로 새어 나왔다. 과연 터언니네와 달랏을 오지 않았더라면 내가 이런 아침풍경을 볼 수나 있었을까. 헤어져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만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베트남식 우렁요리를 점심으로 먹고 우리는 헤어졌다. 터언니 남편이 나를 숙소로 데려다 주기 전 언니와 아쉬운 작별의 말을 나눴다. 언니는 열심히 돈을 벌어 자신이 한국에 가든지 아니면 내가 백만장자와 결혼해 이곳에 다시 오라고 우스갯소리를 했다. 나는 언니에게 그간 고마웠다고, 언젠간 다시 보자는 말만 연신하다가 차에 올랐다.


숙소로 돌아간 나는 또다시 혼자가 되었다. 원래 혼자 떠난 온 여행이었지만 며칠 사람들과 같이 있었다고 혼자 남겨진 게 이상했다. 명절날 자식 손주가 떠난 후 홀로 남겨진 할머니의 심정이 이런 것일까. 넓고 조용한 방에서 창문으로 달랏의 아름다운 도시풍경이 내려다 보이는데 괜히 야속한 마음이 들었다.

참다못한 나는 다시 밖으로 나가 목적 없이 거리를 걸었다. 그러다 목이 말라한 주스가게에 멈춰 기웃거렸다. 메뉴판도 없는 작은 노점은 신선해 보이는 야채와 과일들을 기호대로 갈아주고 있었다.

"뭐 시키고 싶은데?"

어떻게 주문해야 할지 몰라 난감한 나를 본 한 여자가 영어로 말을 걸어왔다. 그리고 나 대신 주문을 해주었다. 나는 자리를 잡고 앉아 음료를 기다렸고 그새 주문을 도와준 여자와 말을 텄다. 달랏에서 딸기를 판다는 여자는 녹색 주스를 마시고 있었다. 그게 식사라고 했다. 사람은 소식을 해야 한다며 자신의 동안비결도 적게 먹는데서 온다고 말했다. 실제 마흔이 넘은 그 여자의 외모는 삼십 대 초반이라고 해도 믿을 만했다. 여자는 과식의 안 좋은 점에 한참 말을 이어갔는데 얼마 전 과식으로 배탈이난 내 모습이 떠올랐다. 한 번도 해외에 나가보지 않았다는 여자는 영어를 곧잘 했고 나름의 삶의 철학이 확실해 보였다.

그러다 여자는 먼저 떠났고, 나의 외롭고 쓸쓸했던 기분은 잠깐의 대화와 신선한 주스로 인해 누그러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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