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빡총에서 만난 영국신사

태국 빡총

by 져니박 Jyeoni Park

빡총의 땡볕 거리를 지나 숙소에서 짐을 풀었다. 혼성이었지만 남자들만 가득한 공간에서 약간의 경계심, 시원한 에어컨 바람의 안락함. 그사이의 감정이 넘나들었다.


침대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데 문이 열렸다. 아까 체크인할 때 보았던 백인 남자였다. 덥수룩한 수염과 넓은 이마를 가진 그 남자는 직원에게 세탁기를 어떻게 사용하냐고 물었는데, 그 모습이 내 눈엔 깐깐하면서도 퉁명스러워 보였다. 그런 사람이 방에 들어와 내 빨간 코끼리 바지가 맘에 든다며 말을 걸었다. 첫인상과는 다르게 말이 꽤나 많은 사람이었다. 우연히도 바로 옆 침대였던 남자는 안으로 기어들어 온 햇살을 등지고 본격적으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이름은 크리스고 영국에서 왔으며 태국 방콕에서 거주 중이고, 결혼 어쩌고저쩌고... 때문에 며칠 있다가 영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나... 그전에 잠깐 빡총으로 여행을 온 것이라고 했다.


"좀 있으면 결혼하는 거야?"

복잡한 문장 속 '결혼'이라는 단어만 명확히 들은 나는 머릿속에 온갖 추측이 난무해 물었다. 결혼을 얼마 남겨두지 않고 왜 홀로 여행을 온단 말인가. 내가 알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니 크리스는 털털한 웃음을 지었다. 그는 사실 친구 결혼식 들러리로 가는 것이었다. 이를 간신히 알아들은 나는 멋쩍게 웃었고 어색한 분위기가 한층 누그러졌다.


"내가 특이한 식당을 찾았는데 너도 저녁에 갈래?"

한참 이야기 하는 중에 그가 식당 사진을 보여주며 내게 물었다. 사진 속 식당은 온갖 레트로 감성의 골동품이 모인 박물관 같은 곳이었다. 나는 '메이비 maybe'라며 계속 망설였고, 크리스는 표현을 'should'에서 'have to'로 바꾸었다. 나는 결국 마지못한 듯 따라가기로 했다.


해가 질 무렵에 나는 크리스와 식당을 찾아갔다. 식당 입구부터 만화 영화 주인공들의 마네킹이 반기고 있었고 우리는 구불구불 여러 잡동사니들에 농담을 던져가며 안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테이블은 계곡물을 내려다볼 수 있는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방콕에 살면서 태국어를 공부 중이라는 크리스는 태국 음식에 대해서도 꽤 잘 알고 있었고 더듬더듬 태국어로 주문도 했다.


우리는 태국식 치킨 카레를 먹으면서 대화를 이어갔다. 크리스의 여러 여행 경험들을 듣는 일은 즐거웠으나 한편으로 영국영어 표현이 무언가 다르고 더 풍부하여 알아듣지 못하는데서 오는 고충도 뒤따랐다. 나는 가끔 알아듣지 못해도 고개를 끄덕이거나 웃음으로 무마하려고 했는데, 크리스는 이를 알아채고는 "너 못 알아 들었지? 그럴 땐 솔직하게 말해. 알아듣는 척하지 말고."라고 말했다. 그 덕에 나는 점점 솔직해졌고 오히려 당당히 그 뜻이 뭐냐고 묻게 되었다.


식사를 마치고는 주변을 돌아다니며 구경했다. 계곡 사이로 이어진 흔들 다리를 건너며 장난을 치고 각종 물건들에 이야기를 불어넣었다. 한쪽에 마련된 게임 공간에서는 에어하키를 하기도 했는데, 치열한 승부 끝에 이긴 크리스가 방방거리며 아이처럼 좋아하기도 했다.


우린 식당을 나와 야시장으로 걸어갔다. 거기서 재밌는 일도 있었는데, 크리스가 한국에서 들어온 초록 농협 모자를 발견하고는 야구모자 같다며 썩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에 파멀 파멀 (farmer)하며 주로 한국 농촌 할아버지들이 쓰는 모자라고 설명했다. 그러자 크리스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한국 할아버지들이 힙하다고 말했다.


나란히 아이스크림까지 먹고 숙소로 돌아가는 줄 알았는데, 크리스는 다음엔 라이브바를 가자고 했다. 난해한 내부장식에 난해한 관객들, 붉고 파란 조명들.

"이렇게 조명에 있으니까 너 되게 바이브 있어 보여."

술기운 때문인지 크리스가 아까와는 사뭇 다른 눈빛으로 뜬금없는 말을 했다. 나는 겉으로 티를 내지 않았지만 서서히 마음속에 가드를 올렸다. 그리고 한쪽에 있는 포켓볼을 치는데 어떤 백인아저씨가 다가와 크리스에게 인사를 건넸다. 단지 같은 유럽사람이어서 그런 걸까. 크리스도 처음 본다는 아저씨는 몇 번 더 다가와 말을 걸었고 나를 크리스의 여자친구로 취급했다. 그리고 시끄러운 음악에 묻혀 듣지 못했지만 말하는 뉘앙스로 봐선 분명 음흉한 농담 비슷한 것을 했을 것이라. 이를 본 나는 점점 기분이 좋지 않았다.


"우린 어제 만났어야 했어. 아쉽다."

크리스는 숙소로 돌아오는 내내 그런 말을 했다. 곧 있으면 비자를 연장하러 베트남에 가는데 내일 떠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맞장구를 치면서도 솔직히 그리 아쉽지 않은 마음이었다. 나는 어딘가 불편한 감정을 빨리 떨쳐버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런 나와는 반대로 어쩌면 그날 밤 외출이 크리스에겐 데이트 같은 기분 좋은 기억으로 남았을지도 모르겠다. 크리스는 떠날 때까지 아쉬운 기색이 역력했고, 나중엔 다른 여행 일정을 취소하고 내가 있는 치앙마이에 오기도 했다. 그러나 난 그 후 크리스의 제안을 대부분 거절했고 그는 그렇게 여행길에서 스쳐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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