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 한 뿌리로 함께 건너는 불구덩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도스토옙스키

by 레몬 브리


40년이 지나, 다시 꺼내든 고전.

직장 동료이자, 내게는 딸 같기도 했던, 세대차이를 넘어 서로를 응원해 온 친구 같은 존재인 그녀. 자신의 인생책이라며 생일선물로 건넨 세 권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무겁고 낡은 문장들, 아무렇지 않게 툭 던지는 철학적 문장과 질문들, 그것을 견디기엔 그 당시 내 삶도 버거웠다. 퇴사 후, 나도 그녀의 인생책에 닿길 바라며, 한 줄, 또 한 줄. 곱씹고 생각하고, 다시 덮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그런 인고의 시간을 통과, 끝내 완독 했다.

고전이란,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책인 동시에, 아무도 쉽게 손이 가지 않는 책이기도 하다. 읽고 싶어서가 아니라 읽어야 할 것 같아서 읽는 책. 나에게도 이 책이 그런 책이었다. 그러나 누군가는 말했다. 고전은 인생의 미로에 갇힌 이들을 출구로 이끄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아리아드네의 실’ 같은 것이라고.

책장을 덮고 생각을 정리하며 한 문장 한 문장 써 내려간 뒤에야 그 말의 의미와 무게를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나에게도 인생책이 되었다.


도스토옙스키는 이 책의 서문에서 셋째 아들 알료샤를 ‘위대하고 고결한 인물’로 기록하고자 한다고 밝힌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그의 청년기와 관련된 이야기이며, 위대한 알료샤를 등판시키기 위한 서막에 불과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도스토옙스키는 그가 진짜 하고 싶었던 두 번째 이야기를 쓰지 못했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알료샤의 전기는 미완성으로 끝난다. 작가가 품었던 더 먼 여정, 더 깊은 신념, 더 확고한 희망. 그 모든 것이 이 한 권의 책에, 암시적으로나마 어쩌면 마지막 유언처럼 남겨졌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 요한복음 12장 24절 -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신약성서의 요한복음 12장 24절로 시작된다. 읽는 내내 떠나지 않았던 질문. 그는 왜 이 성구로 이야기의 문을 열었을까? 이것으로 독자인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

삶은 죽음을 통과해 열매를 맺는다는 것? 사랑은 자신을 버릴 때에만 진실하다는 것?

그 물음을 따라, 나는 이 이야기로 들어간다. 내 마음속 질문에 대한 출구를 찾기 위해.



수치심과 함께 시작된 파국

욕망과 분노가 한데 뒤엉킨 가족들이 기어이 한 자리에 모였다. 모든 파국은 같은 피를 나눴지만, 다른 욕망을 품은 가족이 그렇게 수도원 문턱을 넘으면서 시작되었다. 맏아들 드미트리는 아버지 재산을 노리고, 아버지 표도르는 아들보다 더 추악하게 여자에게 미쳐 있었다. 그들 사이의 재산 다툼과 그루센카라는 여자 하나를 두고 벌어진 싸움. 이미 그들의 피 속에 죄의 씨앗은 뿌려져 있었다. 수도원의 조시마 장로는 그것을 꿰뚫어 본 걸까. 그의 눈빛이 아버지 표도르에게 꽂히며, 말한다.

“수치심을 버리십시오. 그게 시작입니다.”

단순하고도 간단한 말인데, 나에게는 칼날처럼 박혔다. 모든 문제 해결의 시작이 ’ 수치심을 버리는 것‘이라고.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마음. 그건 곧 자기 자신을 향한 의심이고, 스스로를 부정하고, 기어이 세상에서 지워버리려는 끔찍한 자기 파괴였다. 수치심은 사람을 그렇게 무너뜨리기 시작한다. 그런 무너짐을 경험한 자가 느끼는 소름이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 채, 가면을 쓰고 살아갈까. 그 가면이 피부에 달라붙어 진짜 얼굴이 사라지는 줄도 모르고. 기만 위에 위태롭게 살아간다. 결국 자기 자신을 갉아먹고, 주변의 모든 것을 오염시킨다. 한 인간의 거짓이 어떻게 공동체 전체를 지옥으로 끌고 갈 수 있는지, 그들이 보여줬다.


아버지 표도르가 장로에게 물었다.

“영생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하지만, 그의 진심은 이렇게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영생? 그딴 걸 얻으려면 대체 뭘 해야 합니까?”

장로는 그에게 시시콜콜하게 느낄 만한 것들을 나열했다.

술에 취하지 말고, 말을 삼가고, 육욕에 빠지지 말며, 돈을 숭배하지 말고,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게 거짓말하지 말라고. 믿음? 신앙? 그건 결국 자기 자신에게 얼마나 진실할 수 있느냐의 문제였다니. 신뢰도, 존경도, 사랑도 모두 거기에서 시작된다. 그게 없다면 사람은 금세 정욕과 비루한 쾌락의 구덩이로 곤두박질치게 된다. 장로의 말은 담백했다. 단순했고, 명료했다. 그 단순함이 오히려 내 안의 온갖 복잡한 덩어리들을 부수고, 무너뜨렸다.



치정과 살인, 그리고 공범이라는 자각

그들이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기어이 살인사건이 터졌다. 사랑? 증오? 이 집안에서는 그런 감정들이 뒤엉켜 있었다. 아버지 표도르는 그루센카에게 미쳐 있었고, 그 여자를 사랑한 건 맏아들 드미트리였다. 그는 또 다른 여자, 카타리나와 약혼까지 해놓은 상태. 그런데 그 약혼녀를 사랑한 건 둘째 아들 이반. 막내 알료샤는 이들과는 결이 달랐으나, 결국 그도 이 불길 속에 뛰어들게 된다.

아버지 표도르는 자신의 사생아, 스메르쟈코프의 손에 죽는다. 그리고 스메르쟈코프 또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드미트리는 있지도 않은 죄를 뒤집어쓰고 시베리아로 끌려간다. 이반은 자신의 사상과 말이 스메르자코프를 자극시켜 결국 살인의 씨앗이 된 건 아닌가 하는 죄의식에 무너진다. 알료샤는 조시마 장로가 죽고 나서야 깨닫는다. 수도원이든 바깥세상이든, 인간 사는 곳은 결국 다 똑같다는 것을. 그리고 수도원을 떠나 세상으로 나온다.

이건 단순한 가족의 해체가 아니었다. 이들은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아버지의 죽음을 ’ 자신들의 죄‘로 받아들인다. 누가 진짜 칼을 꽂았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건 그들이 모두 공범이라는 끔찍한 진실을 깨닫는 과정이었다. 도스토옙스키는 그 자각이라는 시커먼 구덩이 바닥에 아주 작게, 아주 희미하게 '희망'이라는 걸 심는다.


겉보기엔 그냥 돈 때문에, 여자 때문에 벌어지는 가족 치정극처럼 보이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시꺼멓고 끈적한 욕망을 지닌 인간의 구원에 대한 엄청난 철학적 고민을 담고 있다.



밀알 하나의 운명


도스토옙스키는 이 공범들을 통해 독자에게 뭘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구원? 희망? 나는 그가 그 답을 이미 첫 페이지에 등장했던 '요한복음 12장 24절‘에 숨겨놓았다고 믿는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이 문장이, 아니 이 성구가 이 소설의 방향을, 어쩌면 작가의 신념을 암시적으로 드러냈다고 생각한다.


퇴역군인의 아들 일류샤는 마치 ‘한 알의 밀알’을 형상화한 존재로 등장한 둣 보인다. 고통받지만 순수하며, 자신의 상처로 타인의 영혼을 일깨우는 존재. 일류 샤는 이 소설 속 '땅에 떨어져 썩은 밀알'이다. 그 소년의 장례식에서, 카라마조프가의 막내아들 알료샤는 아이들과 함께 잊지 않겠다고 맹세한다. 그리고 아이들은 외친다. "카라마조프 만세!" 그 외침은 욕망과 광기의 상징이었던 그 이름이, 새로운 희망의 가능성으로 변모하는 순간이다. 도스토옙스키는 약하고 힘없는 일류샤라는 소년의 고통과 죽음 앞에 우리는 모두 책임이 있다고 말한다. '연대'란 바로 그런 것이다.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것.

카라마조프적 인간. 욕망과 광기, 자학과 위선, 구원과 연민이 뒤엉킨 그 복잡한 인간상. 선과 악, 강함과 비겁함이 한 몸처럼 엉켜 있는 인간. 도스토옙스키는 우리 안의 카라마조프적 인간성을 있는 그대로 끄집어냈고, 그것을 외면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 카라마조프가의 사람들에게서 우리 자신을 본다.


그가 끝내 쓰지 못한 이야기. 청년 알료샤가 걸어갈 미래. 결국, 그는 땅에 떨어져 썩은 밀알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썩은 밀알은 열매를 맺지 않았을까? 그 열매는 또다시 다른 이들 안에 씨앗으로 떨어졌을 것이다. 희망은, 그렇게 순환된다.

여기에서 사용된 살인, 배신, 치정과 같은 소재는 매우 자극적이다. 하지만 다 읽고 나면 알게 된다. 그 현란한 자극적 소재 너머에 작가의 깊은 철학적 성찰이 있음을. 작가는 이 막장 드라마에 자신의 철학과 신념을 담아낸다. 인간의 선의와 희망, 바로 공동체적 사랑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



자유라는 족쇄, 빵이라는 유혹, 그리고 대심문관


이반은 알료샤에게 자신의 극시 ‘대심문관’을 들려준다. 배경은 15세기 스페인에서 벌어지는 이단심판. 예수? 그분이 다시 왔다고? 기적을 행하자마자 대심문관이 예수를 잡아다가 감옥에 가둔다. 그리고 그날 밤, 예수 앞에서 대심문관의 독백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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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자유를 감당하지 못한다. 그래서 교회에 자신들의 자유를 반납했고, 그 대가로 빵을 받았다. 오히려 당신은 인간에게 그들이 해결할 수 없는 고통을 남겼고, 혼란을 안겼다. 그래서 우리가 나섰다. 그들에게 면죄부와 통제를 주었다.”라고 말한다. 이어서 "우리는 악마와 손을 잡았고, 당신은 방해가 된다. 그래서 당신을 내일 화형에 처할 것이다."라고 본색을 드러내는 말까지 한다.

그 말 앞에 예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다. 다만 그에게 입 맞춘다. 대심문관은 침묵한다. 그리고 예수에게 말한다. "다시는 돌아오지 마라 “.


이 극시가 오늘의 현실과 그렇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 소름 끼친다. 교회라는 거대한 구조. 그 안에 숨은 종교인들의 욕망, 인간의 자유에 대한 공포. 종교인들이 말하는 신? 그것은 교회를 지키기 위해 위장한 껍데기일 뿐. 거기엔 상징뿐인 예수가 갇혀 있다. 오늘도 사람들은 ‘하늘의 양식’보다 당장 입에 넣을 ‘지상의 빵’을 선택한다.



조시마 장로와 공동체의 진실

수도원 장로 조시마, 그가 말한 사랑, 공동체, 그리고 인간 구원에 대한 신념은 절실하고 단호했다.

그는 말했다. 고립, 그것은 인간에게 죽음이며,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사는 삶은 썩지 않는 밀알과 같다고. 결국 썩지 않는 밀알은 죽지 않기에, 열매도 맺지 못한다. 그저 박제된 삶이다. 조시마 장로는 그 고립이란 감옥에서 꺼내줄 세 가지를 제시한다. 기도, 사랑, 그리고 세상과의 접촉.

조시마의 입을 통해 도스토옙스키는 말한다. 인간은 타인을 통해 자신을 비춘다. 그렇게 비로소 인간이 된다. 신을 사랑한다는 건, 이 모든 피조물을 사랑하는 일이다. 그리고 누구도 타인을 심판할 권리를 갖지 않는다. 그 진리를 깨닫지 못한 삶은 결국 지옥이다. 지옥은 사랑할 수 없는 상태, 그 자체라고.


그 메시지들은 내 안에서 오래 떨렸다. 강력했고, 명확했고, 부정할 수 없었다. 결국, 살아 있는 동안 우리가 할 일은 단 하나이다. 사랑하는 것. 충실히, 기꺼이, 끝까지. 도스토옙스키가 말하고자 했던 ‘밀알’이란 그런 것이었다. 혼자만을 위해 살아가는 썩지 않는 밀알이 아니라, 타인을 위해, 타인과 함께 썩어서 열매를 맺는 밀알. 그 안에 그는 구원이 있다고 믿었다. 그 철학과 신념을 이 책에 담아내려 애썼다는 것이 읽혔다. 그리고 그가 독자인 우리에게 묻는 듯했다. 당신은 어떤 밀알로 살아갈 것인가?


파 한 뿌리의 선행


알료샤는 아버지와 큰형이 사랑한 그루셴카에게서, 우화 하나를 듣는다. 한 노파가 생전에 단 한 번, 거지에게 파 한 뿌리를 건넨 적이 있었다. 그게 그녀의 유일한 선행이었다. 죽은 뒤, 천사는 그 파뿌리를 붙잡고 그녀를 지옥에서 끌어올린다. 하지만 그녀는 함께 올라가려는 다른 이들을 발로 차 밀어낸다. 그 순간, 파뿌리는 끊어지고, 그녀는 다시 지옥으로 곤두박질친다. 이 이야기에는 고립의 무력함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같이 건너고 싶지 않은 마음. 종종 우리 안에도 존재하는 마음. 그러나 그건 지옥이다. 지옥은 불바다가 아니라, 타인과의 단절이다.

이 우화를 들은 뒤, 알료샤는 조시마 장로의 관 앞에 돌아와 잠든다. 그리고 꿈을 꾼다. 혼인잔치의 꿈. 잔치에는 위대한 사람들이 초대된 게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파 한 뿌리를 건넨, 작은 선행을 한 것이 전부인 사람들.

신은 위대한 행위를 기억하지 않는다. 작은 선행과 사랑을 기억한다. 그것은 초대받은 자들의 공로가 아니라, 초대하신 분의 은혜였다. 신은 대단한 선행을 요구하지 않았다. 파 한 뿌리면 충분했다.

나는 그 장면에서 희망을 느꼈다. 파 한 뿌리 정도라면, 나도 신의 은혜로 혼인 잔치에 초대받을 수 있지 않을까? 작지만 진심으로 건넨 마음 하나가 세상 어딘가에 닿아 있기를 바라며, 희망을 가져본다.



도스토옙스키가 말하려 했던 것


이 이야기는 도스토옙스키의 죽음으로 2부가 완성되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이미 1부 속에 거의 모든 메시지를 암시적으로 담아두었다. 그것이 전부일수도 있는 그 한마디.

“너 혼자 건너지 마. 누군가와 함께 건너.”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고. 파 한 뿌리라도 함께 나눠야 이 지상의 불구덩이를 건널 수 있다고. 이것이 그가 말하고자 했던 가장 강력한 메시지였다고 생각한다.

우리에게 자유는 버거웠고, 우리는 그걸 포기했다. 대심문관은 빵을 내밀었고, 우리는 기꺼이 자유를 내주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빵도 없고, 자유도 없다. 신이 인간에게 준 선물, 그 자유를 우리가 진정으로 이해했더라면, 그리고 그 자유를 진정으로 누렸더라면, 우리는 지금처럼 ‘빵’을 걱정하며 사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구원은 대단한 선행을 한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메시지. 여기에 희망이 있다. 한 사람을 위한 작은 진심, 함께 건너고 싶은 그 마음. 거기에 희망이 있다.

그러니, 오늘 당신은 누구와 함께, 이 불구덩이와도 같은 세상을 건널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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