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어가며
시적 세계를 형성한다는 말은 몹시 매력적이다. 좋은 소설가는 좋은 배경에 좋은 캐릭터를 집어넣어 좋은 이야기를 만든다. 독자는 소설을 읽을 때 그 이야기에 빠져든다.
설령 독자가 이야기에 비쳐보이는 저자를 읽더라도, 그것은 간접적인 독해일 뿐이다.
그러나 시는 그 자체로 이미 저자의 세계다. 좋은 플롯을 짤 필요도 없고, 개연성을 신경쓸 필요도 없다. 표현을 가다듬고 장치를 배치할 수는 있겠지만, 본질은 삶의 한 조각, 내가 내 눈 앞에 바라보았던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글 한 조각 안에 담아내는 것이지 다른 어느 것이 아니다.
많은 소설 지망생들은 몹시 따분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신이 문학가가 되기를 바란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들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기술자가 되는 것이다. 좋은 이야기를 생성해내는 기계. 소설 안에 자기 삶을 담든 지향점을 담든 그것은 소설가의 자유다. 그런 자유를 마음껏 누리는 소설가들은 단지 ‘재밌는 이야기’, 서사와 관계 구조, 문체를 기술적으로 잘 짜놓아 ‘몰입하기 쉬운’ 소설을 쓰는 부류와는 다르게 이마에 확연한 표를 지닌 채 살아간다. 이미 있는 담론, 이미 있는 방법, 이미 있는 규칙 안에서는 자유가 아닌 방목만이 가능하다.
나는 이제 기술을 배우는 데에 지쳤다. 암기에 지쳐서 대학교를 왔고, 코딩에 지쳐서 철학과를 왔지만, 제도 안의 모든 것은 이미 제도 그 자체가 되어버린 듯하다. 가슴 졸이는 압박감은 어른이 된 후 많이 나아졌지만 무언가 질식해가는 느낌은 여전하다.
이미 울타리에 길들여진 소는 완전한 자유를 되찾았을 때 야생을 방황하다가 곧 죽어버리고 만다. 그러나 나는 울타리에 길들여진 적도 없고, 애초에 울타리 안에 제대로 속해본 적도 없다. 학창 시절 공부를 하지 못했다. 손에 펜을 잡으면 가슴이 떨려서. 중학생 시절에는 글 읽는 법을 잊어버린 적도 있었다. 어쩌면 나는 이미 울타리 안에서 병들고 죽어가던 소였던 것이 아닐까. 어차피 죽는 거, 한 번 밖으로 나가보자.
나는 분명히 무언가가 되어갈 것이다. 큰 물에 들어갈수록 점점 더 큰 사람이 되어갈 것이다. 재능 없이 태어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단순한 자만일 수도 있겠지만 오랜 관찰의 결과이기도 하다. 그래서 말만 하는 것을 넘어 정말로 무언가가 한 번 되어보고자 한다. 뭐라도 하면 뭐라도 될 테니까. 이제는 상처받는 것보다도 멈춰있는 게 더 두렵다.
내가 시로써 무언가를 해보려는 기획은 ‘뭐라도 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기도 하고, 유희이기도 하고, 자기 치유이기도 하고, 객기이기도 하다. 동시에 아무것도 아니다. 어떤 글을 쓸 때에는 하던대로의 의미를 담았고, 어떤 글을 쓸 때에는 조금 더 결이 다른 의미를 담았고, 또 어떤 글을 쓸 때에는 아무 의미도 담지 않았다. 이제는 왜 글에 의미가 있어야하는지를 잘 모르겠다. 의미는 근본적으로 어떤 의미도 갖지 못하는 것이고, 정 의미없이 글을 읽을 수 없다, 살 수 없다 싶으면 알아서 찾는 것이다. 필자를 포함한 다른 사람이 제시해줄 수 없는 것이 아니다. 물론 이 ‘무의미함’ 또한 내가 찾은 의미 중 하나다. 의미가 없으면 사람은 정말로 살 수가 없다.
사람 앞의 세계는 어떻게 형성되는가. 세계의 확실한 지반 -감각, 감정, 사고의 가장 기초적인 토대는 해봤자 운동장 위 구슬 하나 부피를 지닐 뿐이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뛰어놀 운동장이 필요하다. 그래서 빈 공간을 스스로 메운다. 사람이 찾는 모든 이론, 모든 의미, 모든 가치, 모든 격언은 공백을 메우는 인간 정신의 주체성이 작용한 산물이다.
그런데 여기서 사람은 정신이 아니다. 오히려 정신의 능동성에 의해 구성된 세계의 일부, 사물 하나일 뿐이다.
자기 암시는 정신에게 보내는 일종의 기도다. 신이 이 세계를 만든 조물주를 의미한다면, 이 관점에서는 정신만이 신이다.
사람은 어떤 방식으로든 정신과 소통하며 자신의 세계를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형성하려한다. 그 노력이 실현되는 궁극적인 방법은 정신이 공백을 메우는 방법을 바꿔놓는 것. 신이 세계를 주재하는 방식에 변화를 일으키는 것. 기독교인은 세상의 가장 큰 공백을 하나님으로 메운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 사람이 기독교인이 아니기를 마음먹는다면, 창조론을 진화론으로, 천국을 무로, 창조주를 빅뱅으로 새롭게 바꿔놓을 수 있다.
가장 깊이있는 사람은 공백을 이미 있는 이론으로 단순하게 메우지 않는다. 사유를 통해, 작문을 통해, 소통을 통해 유능하게 자기 정신의 방법론을 개선하고 발전시켜 어느 한 곳에 정체하지 않도록 한다. 동일한 내용을 입력받더도, 이런 능동성을 갖춘 사람은 완전히 다른 출력값을 산출해낸다. 이런 이들이야말로 가장 인간적인 ‘천재’ 기준에 부합하는 인물이다.
우리 아버지는 스스로의 열등감을 채우기 위해 자식들에게 불안을 심어주었고, 어머니는 단호해야할 때는 유약했지만 유약해야할 때는 단호했다. 나에게는 금전적, 신체적 안전을 보장하는 집이 언제나 있었지만, 정서적 안정을 보장하는 집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이어져오던 가정 분위기로 인해 나는 언제나 정체되어있는 인물이었다. 세상에 절대적인 진리가 있을 것이며, 반드시 내가 그걸 아는 사람, 가장 지적인 동시에 도덕적인 사람, 한 마디로 가장 우월한 사람이 되어야한다 -이런 믿음을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지반이 흔들리는 불안정을 느꼈다.
도통 그런 진리는 세상의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머릿속에는 있는데, 눈 앞에는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을 믿는 믿음. 분명 그것은 종교적인 믿음이다.
나는 내가 앞서 말한 ‘천재’의 인간상을 좇고자 모든 믿음을 던져버렸다. 나는 공부를 하지도 않을 것이고, 완결된 글을 쓰지도 않을 것이다. 설득하기 위한 말을 하지도 않을 것이고, 주기적인 안부 인사를 전하지도 않을 것이다. 이런 압박감을 떨쳐내기 위한 노력도 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지금 내게 의미있는 이론을 전개한 후 필요없어지면 그것을 부수고, 다시금 새로운 이론을 전개하는 과정을 무한히 반복할 것이다.
그것이 내가 찾은 가장 투명한 인간의 자세다.
표현의 목적은 다른 것이 아니다. 내가 당신에게 보여주는 글에는 공백이 있다.
당신은 이 공백을 어떻게 메우는 사람인가? 나에 관해 비어있는 부분을 어떻게 채울 것인가? 이 글을 읽음으로써 당신 앞에 새롭게 놓이게 되는, 그래서 당신의 세상을 크든 작든 변화시키는 빈 공간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사람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이고, 언제나 다른 세계가 지니지 못하는 부분을 자기 안에 갖고 있다. 몇몇 사람들은 예외적으로 특유하고 광활한 세계를 갖고 있다. 그런 세계는 언제나 타인의 세계 안에 주입되어 기존의 것과 구분할 수 없이 녹아내리고 섞여 완전히 새로운 색깔을 만들어낸다. 사람과 사람이 나눌 수 있는 가장 깊은 교감. 내가 바라는 것은 그러한 방식으로 당신의 장작이자 친구가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