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싹 속았수다를 보면서
폭싹 속았수다는 많은 사람들을 웃고 울리는 드라마였다. 한 가족의 이야기이였지만 그 시절, 그 당시 시대를 겪은 우리 부모님들 이야기 였기 때문이다.
"언니, 완전 우리 아빠 같아. 과묵하게 가족 챙기는 거며, 엄마한테 하는 거며. 걍 아빠야"
동생과 통화하면서 우리가 많이 울었던 이유가 아빠와 너무도 닮은 양관식 역이었다. 어릴 적 아빠를 보면 무쇠처럼 단단하고 절대 꺾이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결혼 후 친정을 갈때면 덤덤하게 '어 왔어' 하고 무심하게 묻는 아빠를 보면 괜스레 가슴이 시큰거린다.
우리 가족 중 세 여자는 성향이 다르고 의견은 제각각 이어도 세 여자의 공통된 아픈 손가락은 바로 아빠였다.
아빠는 언제나 세 여자에게 다정했다. 내가 처음 생리가 터진 날에는 꽃 한다발과 케잌을 사갖고 오기도 했고, 엄마가 힘들 때면 맛있는 요리를 선보이거나 엄마한테 받은 용돈을 조금씩 모아 돌아오는 엄마생일날 큰 돈을 선물 해주고 대학생 때 먼 거리에 일찍 일어날 때면 출근 시간보다 내가 나가는 시간에 맞춰 역 앞에 데려다주곤 했었다. 친척없이 우리가 명절이나 설에 놀러갔던 추억들은 모두 사진으로 인쇄해서 주방 책상에 가득 붙여놓기도 했다.(밥먹을 때마다 부담스러워서 이건 싫었지만)
무엇보다 아빠는 우리 세 여자에게 쓴 소리 한 번 하지 않았다. 화가 나는 날은 일년에 아니, 이 년에 한 번이면 족했다. 화가 많고 예민한 세 여자는 틈만 나면 서로에게 소리쳤지만. 어쩔 때 아빠가 딱 한 번 큰 소리 치는 날엔 세 여자가 그때는 찍소리 못하고 조용했다. 폭싹 속았수다에서도 양관식 아빠가 아이유에게 양근명! 하고 소리친 그 순간 아이유가 뿌엥하고 울었던 그 모습이 너무 공감되서 같이 펑펑 울었다.
엄마는 아빠에게 신장 하나를 받아서 아빠의 건강에 유독 예민했다. 감기라도 걸리는 날이면, 술이라도 많이 먹으면, 건강검진을 하고 오는 날이면 아빠를 살피곤 했다. 자칫 무릎이라도 까져오는 날이면 세 여자가 아빠를 빙 둘러싸 난리 법석이었다. 괜찮다고 해도 다이소 구급함을 열어서 약이며 밴드며 바르고 세 여자의 잔소리를 다 듣고 나서야 치료가 끝이 났다.
강해보였던 아빠가 눈물을 보이셨던 건 세월호 사건이었다. 단 한 번도 아빠가 운 모습을 보지 못했는데 아빠는 그 시기에 뉴스를 틀었다하면 눈물이 나서 집 밖으로 나갔고 어디 놀러갔다가 근처 세월호 납골당이라고 하니 혼자 자리를 비켜서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우리처럼 꽃이었을 그 학생들을 생각하면 감정이 주체가 안된다면서.
나는 또 아빠가 슬퍼하는 모습에 더 슬펐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아빠가 우는 모습은 참 견디기 힘들다. 드라마에서 희끗해지고 나이가 들어간 양관식 모습을 보면서, 언젠가 아빠도 희끗해진 머리를 염색하던 것도 멈추게 됐을 때. 눈물이 많아지는 아빠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때쯤 되면 내 눈물도 지금보다 지금보다 더 많아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이를 비켜갈 수 없다는 건 알지만, 아빠의 얼굴에서 깊어지는 주름을 내가 받아들일 수 있을까. 라며 생각해본다. 내 기억 속, 우리 세 여자의 영원한 양관식으로 아빠가 오래 건강하게 우리 곁에 머물렀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