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수경 Oct 17. 2022

바퀴벌레보다 더 징그러운 영어

갔다, 거기로 : 너와 함께 가서 더 좋았다   #7

그때 영어를 시작했어야 했다.

쭈뼛거리지 말고 덤볐어야 했다.

무언가를 다시 시작하기에

너무 늦은 때란 없는 법이라 했으니.


이건 굉장히 오래 된 얘기다. 내 나이 서른 중반쯤이었나. 그때 내가 일하고 있던 잡지사에서

영어회화동아리를 만든다고 했었다. 들어올 사람 손 들라면서. 외국인 강사를 회사로 초빙해서 일주일에 두어 번 영어 교실을 연다는 내용이었는데 나는 꿈도 안 꿨다. 실력이 어지간해야 도전을 하지.

good morning, good afternoon, how are you, nice to meet you... 유치원에 다니는 애들이랑

눈높이가 딱 맞는 정도의 저질 회화밖에 구사할 줄 모르는 아주머니가 괜한 데 들어가서 체면 구길 일이 뭐란 말인가. 가만 있으면 중간이라도 갈 건데 괜히 나섰다가 영어 실력 들통 나면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있겠나, 생각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우리 부서의 수장이자, 오십대 여성이자, 최고령자인 국장님이 저요, 저요! 하더라.

참 순수한 어른이라 여겼었다. 그 어른이 영어를 못하기로는 남부러울 데 없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갑자기 이런 얘기를 왜 하냐고? 나도 모르겠다. 그냥, 그때 내가 그 어른처럼 해맑은 마음으로

영어동아리에 들지 못했던 게 후회되는가 보다.


“국장님, 영어 공부 열심히 하신다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재밌으세요?”


어느 날, 둘이 같이 점심밥을 먹으러 가면서 내가 불쑥 물었다. 국장님은 재밌고말고! 그랬다.


“저는요. 제 허접한 실력이 들통날까, 겁나서 못하겠더라구요.”


“어우, 얘! 그럼 어때! 그게 뭐 대수니? 나는 열심히 해서 퇴직하면 세계일주를 할 거야.”


“와! 정말요?”


“꼭 할 거야. 그게 내 꿈이거든. 그러려면 말을 할 수 있어야 해.”





서른 몇 살은 이미 너무 늦은 나이라면서 지레 포기했었다. 그런데 쉰 너머의 어떤 사람은 부끄러움

같은 걸 개의치 않고 도전했다. 그래서 어떻게 됐냐고? 아주아주 오래 전에 퇴직을 하신 그 어른은

지금 영어를 줄줄 읊어 대면서 자유 여행 중이시고, 창피한 꼴을 모면하려고 도망쳤던 나는 지금도

여전히 영어 앞에만 서면 지레 기가 죽거나 체면을 구긴다.



우리들의 긴 여행을 런던에서부터 시작하자고 했던 것은 [노팅힐]에 가 보고 싶어서였는데,

그래서 우리 집 애가 어이없어 하면서 비웃고 그랬었는데! 어쨌거나 드디어 거기로 가게 되었다.


“얘! 근데 노팅힐 가기 전에 한 군데 들러도 되니?”


“버로우마켓 들러서 노팅힐 가기로 했습니다.”


“아니, 그러니까! 그 마켓 가기 전에 어디 쫌 가도 되냐고.”


“예에. 됩니다. 근데 어딥니까?”


“라보 앤 웨이트라고, 엄마가 굉장히 좋아하는 영국 브랜드가 있거든. 거기 매장에 가 보려고.”


“레이버.”


“뭐라고?”


“라보 아니고 레이버입니다요.”


“그냥 다들 그렇게 읽거든!”


“레이버입니다. 레이버 앤 웨이트. 노동과 기다림이라는 뜻입니다, 어머니.”


아니, 라보든 레이버든 발음 한 끗 차이일 건데 얘, 왜 이래? 진짜 피곤한 스타일이야!


“근데 니가 라보 앤 웨이트를 어떻게 알어?”


“레이버 앤 웨이트입니다요.”


“아, 진짜! 이럴래?”


“그게 맞으니까요.”


“너는 그런 게 문제야!”


“내가 뭐가 문제지?”


“잘난 척 하는 거!


“아! 잘난 척. 아주 큰 문제군.”


“한국 사람이면 한국 사람답게 적당히 콩글리시를 해야 되거든!”


“예에.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요!”



좋은 말씀 감사하다면서 지 엄마를 놀려먹는 아이를 따라서 거기로 갔다. 라보 앤 웨이트. 아니지.

레이버 앤 웨이트! 해가 쨍쨍할 때 전철을 탔는데 몇 정거장쯤 가서 내렸을 때 비가 내리고 있었다.

하여튼 영국은 문제다. 해 떴다, 비 왔다, 그러면서 변덕스러운 거! 우리 집 애를 닮았나 보다.

잘난 척이 하늘을 찌르는 걔가 아주 큰 문제인데.

역 입구로 나왔을 때 소원을 들어 준다는 어떤 벽, 그래서 여행객들이 소원의 자물쇠를 꽉 채워 두고

간다는 콘크리트 벽을 보았다.

[만약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서른 몇 살로 돌아가서 영어회화동아리에 들어가게 해 주세요!]

나는 아주 참하게 소원을 빌었다.



아들의 지적을 존중한 이름, 레이버 앤 웨이트!

노동과 기다림이라는 뜻을 가진 그 매장은 아주 조그맣더라. 하지만 그래서 더 좋았던 것 같다.

명품이라 이름 붙여진 상식적인(?) 매장들처럼 굉장히 거창하고 그러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세계 사람들을 꿈꾸게 할 수 있는 브랜드의 힘이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내가 만들고 꾸려가는 나의 브랜드도 그렇게 되었으면 싶었다. 물론, 어렵겠지만.

그날 나는 내 평생 그래 본 적 없을 만큼 뭐를 열심히 샀는데 계산을 하다 보니 에코백 하나가 카운터에

함께 놓여 있었다. 아이의 옆구리를 찔러서 빨리 말해 달라고 했다.


“어? 엄마는 이거 안 샀는데... 말해 줘. 이 가방은 안 샀다고.”

 

진짜 짜증이 솟구친다. 그때 국장님 따라서 같이 영어를 시작했으면 얼마나 좋았겠나. 머릿속으로

계산기 두드리듯 문법의 짝을 맞추느라  입밖으로 꺼낼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으니 나 원 참!


“이건 선물이라는데?”


“정말? 이거 요즘에 우리나라에서 인기 많은 가방인데! 엄청 비싼데!”


“엄마가 오늘 여기서 큰손이 된 거지!”


가방을 선물해 준 남자, 사장님인지 직원인지 알 수 없는 그 사람한테 결혼하자고 할 뻔했다.

얼마나 센스가 넘치던지! 선물로 받은 까맣고 시크한 에코백은 아이에게 주었다.  

영어 발음 운운하면서 따지고 들던 아들놈은 그 깜장 가방을 메고 으리으리하게 돌아다녔다.

이제 우리는 또 그 집채만 한 가방에다 또 뭐를 막 사서 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홍홍홍, 흥겹게

시장으로 갔다. 유명한 시장, 버로우마켓으로.






노동 후 기다림. 잠시의 기다림.

나는 이 말이 왠지 우리 삶의 정답 같다.  

50분 동안 공부를 한 다음에는 10분을 쉬었지 않나.

우린 아주 어릴 때부터 학교에서 이렇게 배웠잖나.

그러니 있는 힘껏 살고 난 다음에는 쉬어야지.

그래야 또 다시 불끈 힘을 내어

다음 골목을 향해서 씩씩하게 갈 거 아닌가.

그런데 아무리 주위를 둘러 봐도

노동 좀 했다고 기다리거나 쉬어 갈,

그런 여유를 가진 어른은 없던데.

다들 하나도 안 기다리고 그저 쭉 그렇게 계속 가던데.

속상하다, 문득! 사는 게.

기다릴 줄 모르는 어른으로 산다는 것이.


영국에서 만난 시장, 버로우마켓.

거기의 어느 빈 계단참에 앉아서

빵인지 도넛인지 하는 걸  손에 들고

쩝쩝쩝 먹으면서 나는 생각했다.







노팅힐, 노팅힐, 하면서 자꾸 노래를 부르니까 아이가 그러지 좀 말라고 했었다. 분명 실망할 거랬다.

괜찮다고 우기면서 기어이 거기로 갔는데 아이의 말대로 역시 그냥 그렇더라. 예뻐 보였던 그 서점은

이미 북새통 관광지로 변해 버렸으니 그냥 그랬고, 휴 그랜트의 파란 대문 집 앞에도 역시

전 세계에서 모여든 관광객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또 그냥 그랬다. 계속 기다리다가

자기 차례가 오면 사람들은 그 대문에 찰싹 붙어 손가락으로 브이 자를 그리면서 사진을 찍었다.

나는 그 집보다 외려, 그 집 앞에서 행복해 하는 여행객들이 더 마음에 들었다.

거기가 어디든 거기를 찾은 이가 웃는다면, 조금 쉬어갈 수 있다면 그럼 된 거지... 하면서.

영화 속에서 낭만적으로 북적이던 그 시장 골목이라고 다르진 않았다. 마침 벼룩시장 같은 게

열리고 있었지만, 온통 젊은 상인들의 성지처럼 보여서 나 같은 늙은이가 끼어들면 민폐일 것만 같았다.


“엄마, 어떡할까? 사진이라도 한 장 찍을 건가?”


“됐다.”


난 그저 아까웠다. 막연히 품고 살았던 로망 하나가 사라졌으니.



“우리, 쪼꼬렛 먹고 갈까?”


노팅힐의 거리를 어깨 부딪혀가며 수고롭게 걷던 난, 수제 코코아 가게 앞에서 걔한테 물어 봤다.


“쪼꼬렛 아니고 초콜릿입니다.”


하마터면 그놈을 때릴 뻔했다.


- 다음 회에 계속 to be continue


이전 07화 길 잃어버릴까 봐 그러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