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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수경 Oct 14. 2022

길 잃어버릴까 봐 그러지

갔다, 거기로 : 너와 함께 가서 더 좋았다  #6


엄마는 혼자 있는 게 무섭고,

아이는 그러는 엄마가 무섭다.

우리, 큰일났다.


나는 자신있었다. 내가 다른 건 다 형편없고 그래도 이거 하나는 으뜸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었다.

이거가 뭔가 하면 [나는 매우 독립적인 사람]이라는 명백한 믿음이었다.

어른들한테 비비적대거나 치대면서 속썩인 적 없고, 괜한 걱정을 끼치거나 민폐될 일을 하는 건 죽기보다 싫었다. 어렸을 때부터 내 머리는 내가 묶었다. 공부를 안 좋아하는 게 큰 흠이긴 했는데, 

대신에 넷이나 되는 동생들을 잘 보살폈기 때문에 엄마는 내가 공부를 못 하는 걸 안 싫어하셨다. 

걱정도 안 하셨다. 공부 대신 뭐든 잘해서 지 앞가름을 하면 되지 않나, 아마도 이렇게 

생각하셨을 것 같다. 

대학을 졸업하기도 전에 취직했고, 혹시라도 딸 많은 집의 골칫거리 장녀가 될까 싶어 결혼도 

엄청 빨리 했다. 빨리빨리 독립을 한 다음, 계속해서 그렇게 독립적으로 살았다.

하지만 그건 나의 착각이었을까. 런던에서의 어느 날, 아이가 던진 질문 하나에 

나의 두 눈이 지진인 듯 흔들렸다.


“오늘 서점 투어는 엄마 혼자 하는 거 어떠십니까?”


“갑자기? 왜?”


“엄마 서점에서 혼자 노는 거 좋아하니까.”


“아니, 아니야.”


“좀 자유롭게 다녀보고 싶지 않나?”


“안 그러고 싶어.”


“왜지?”


“무서워.”


나도 모르는 나의 진심이 말이 되어 나왔다. 무섭다니! 이건 무슨 엄마답지 못하고, 

어른스럽지도 않은 대답일까. 아이가 대체 나를 뭘로 생각할 건가.


“뭐가 무섭지?”


“길 잃어버릴까 봐.”


“아이쿠, 그렇군. 그게 무섭군.”


아이의 얼굴에 옅은 그늘이 드는 것 같았다. 얘는 내가 무섭겠구나, 이 긴 여행 내내 절대로 혼자

있을 수 없다는 지 엄마가 얼마나 무서울 건가. 분명하진 않지만 녀석의 조그만 한숨 소리를 

들었던 것도 같았다. 휴.



그런 말을 해 놓고선 나는 꼭 화가 난 사람처럼 터덜터덜 걸어서 거리로 나왔다. 물론 아이를 눈앞에

대동하고서였다. 낯선 거리, 낯선 사람들로 꽉 차 있는 런던의 한가운데를 터벅터벅, 심술사납게 걸었다. 자기가 말해 놓고, 자기가 상처받은 형국이었다.

아이는 아무 생각 없이 해맑았다. 배가 고프다고 했고, 엄마도 꼭 먹어 보면 좋을 음식이 있다 했으며

자기가 먹어 본 바에 의하면 나무랄 데가 없는 명품 햄버거랬다. 좀전까지 나름, 스스로의 찌질한 면모에 풀이 죽어 있었으면서 걔가 먹는 걸로 꼬시자 뱃속이 금세 꼬르륵 하는 소리를 냈다.








“여기서는 이 쉐이크를 꼭 마셔야 됩니다. 햄버거랑 아주 잘 어울리거든.”


달았다, 엄청.


“엄마는 여기 햄버거를 절대로 다 먹을 수 없기 때문에 핫도그로 합니다.”


느끼했다, 무지.


그래도 햄버거 담는 봉투에 확 쏟아부어서 내온 감자튀김은 바삭하니, 괜찮았다. 기름이 뚝뚝 떨어지는

핫도그를 어떻게 먹어야 옷에 안 흘릴 수 있을까, 궁리하면서 감자만 물고 씹고 하다가 보니 아이는

무아지경이다.


“너는 이게 그렇게나 맛있니?”


“예에. 저는 이게 그렇게나 맛있습니다.”


“그렇구나.”


“어디든 이거 있는 나라로 가서 꼭 다시 먹겠다, 생각했었거든.”




아마도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걔의 최애 햄버거라던 그 브랜드가 우리나라에 입성했을 수도

있겠지만, 그때는 아니었다. 그래서 미식 여행 좋아하는 아이는 이 햄버거를 찾아 어딘가로

다시 떠나고 싶었댔다. 녀석, 참! 단순하게 맛있는 생각이네!

햄버거 다 먹고, 감자도 싹 비우고, 쉐이크도 끝장 보고, 내가 남긴 핫도그까지 덤으로 먹은 걔의 얼굴이 행복해 보였다. 좀전까지 마음을 뒤덮고 있던 뒤숭숭한 구름이 걷히는 것도 같았다. 먹고 싶어 죽을

뻔했던 걸 먹고서 흡족해진 아이 얼굴 덕분에.



길을 잃었다, 싶은 때가 종종 있다.

당연하지. 삶의 길이란 게 골목골목

구비구비 그런 건데 길을 잃기도 하겠지.

그러면 난 동굴을 깊숙하게 파고 납작 엎드려

몇날며칠 스스로를 다독이고는 했었다.

뾰족한 수는 없는 거야, 지금도 괜찮아, 잘하고 있어.

구태의연한 답안을 주문처럼 배터지게 주워 먹다 보면

마음이 약 먹은 것처럼 서서히 치료되는 기분이었다.

아, 여러 주문들 중 으뜸은 이거였다.

“길을 잃으면 지도 펴고 찾아가면 되지, 뭐! 까짓!”



까짓! 했던 용기가 줄어들고 있다.

까짓! 하며 코웃음칠 자신감이 부스러지고 있다.

나이를 먹어서 그러는 걸까 봐,

나이를 먹는 게 두려워지는 걸까 봐,

나는 그게 좀 무서웠던 것 같다.

용감하게 나이 들고 싶은데.

꼭 그럴 생각이었는데.





런던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서점, [Hatchard Book Shop]은 1797년에 태어났다니 이백 살도

훨씬 더 먹었다. 꼭 가 보고 싶다면서 밑줄 그어 두었던 거기로 갔다. 갔더니 중후한 입구에서 벌써

두근두근이었다. 이럴 줄 알았어.




삐그덕 하는 나무 계단을 올라가고, 올라가고 그러면 계속 책이 나온다. 매끈한 새 책에서 나는 석유

냄새 비슷한 건 세월이 덮어서 그런지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오래 된 다락방의 온도 같은 걸로

채워졌다. 책장도, 테이블도, 낡디낡은 지류함도 다 뜯어가고 싶다. 간혹의 책에는 서점 MD의 손글씨

이름표가 달려 있기도 했는데 그 모양을 볼 땐 피식, 웃음도 났다. 내가 우리 가게에 하고 있는 짓 같아서.


“엄마, 엄마? 저기요, 어무니!”


아이가 나를 찾는 소리를 듣고는 두 번도 생각 안 한 채 말했다.


“너, 나가서 놀다 와. 걱정 말고 놀다가 와. 엄마도 혼자 놀 테니까. 알었지?”







헤어졌다가 만났다. 잠깐 만났다가 또 헤어졌다. 서점과 문구점으로 이어지는 그날의 일정에서 나는

대개 혼자였다. 아니, 아이가 옆에 있으면 걸리적거렸다. 그만 좀 보라 그럴까 봐 조바심이 나고,

걔가 지루해서 짜증을 낼까 봐 신경이 쓰였다. 왜냐하면 내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책방과 문방구만

찾아 다니는 날이었으니 난 당연히 머리에 커다란 꽃을 달고 탭댄스를 출 게 아닌가.

괜한 걱정을 했다. 혼자 나가 보라는 아이한테 그러마고,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고 멋있게 대답할 걸.




석양이 내릴 무렵. 손에 든 책보따리가 무거워 죽을 지경이었을 그 무렵. 걔가 혜성처럼 나타났다.

무거운 거 절반을 아이 손에다 들려 놓으니 살겠다, 싶었다. 배도 엄청 고프고.


“아시아식당 있던데 거기로 갈깝쇼?”


“좋아!! 배고파!!!”


인도 커리의 야릇한 향신료 맛에 눈쌀을 좀 찌푸리다가도 시원한 맥주 한 모금 벌컥, 하면 또 좋고.


“서점들이 다 좋았어. 특히 나이 많은 서점은 정말 멋있더라.”


“당연하지. 원래 오래 될수록 명품인 거 아닙니까?”


아이가 숟가락질을 하면서 내게 확인시켜 주었다.



못 할 것은 없다.

다만, 약간의 거리를 좀 두는 거다.

집착은 하지 말자.

너무 무거운 희망도 쌓지 말자.

그러면 두려울 것도 없겠다.

다시 돌아갈 곳이 있다는 확신만 있으면

어디로 떠나든,

길을 잃든 아니든,

그건 껌이다.

용기 있게 나이 들 용기.

어쩐지 그런 싹이 트고 있는 듯했다.

마음이 간질간질한 것을 보니.


- 다음 회에 계속 to be contin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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