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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수경 Oct 18. 2022

어른의 마음에도 아직,
동화는 있다

갔다, 거기로 : 너와 함께 가서 더 좋았다  # 8 

빨강머리 앤과 함께 컸다.

캔디의 연인, 테리우스를 사랑했다.

달려라 하니와 함께 뛰었다. 

내 안에 살았던 그 즐거운 아이들,

언젠가는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지금으로부터 25년 전쯤의 어느 늦은 밤. 

데친 시금치처럼 

축 처져서 퇴근을 하면 

아직 아가아가했던 아이는 

졸음을 꾹 참고 기다렸다가 

한걸음에 달려나와 내게 안겼었다. 

다다다다다, 총총 달려와 

[엄마!] 하면서 목을 끌어안았다. 


그러면 난 언제 그랬냐는 듯, 

데치기 이전의 그토록 꼿꼿했던 시금치로 

다시 돌아가고는 했었다. 

엄마, 하고 부르는 아이의 목소리가 

실로폰 소리 같았다고 기억한다. 

그래, 그 시절의 나는 참 고단했으나 

그때 넌 참 이뻤었다.



2019년 가을. 9월의 끝무렵에 서른 살을 목전에 둔 아들 아이와 오십대 후반부의 엄마는 

런던 리버티백화점의 고풍스러운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 엄마가 가 보고 싶어 했던 곳이었다. 

값 나가는 리버티 원단, 화려찬란한 그 원단을 거기에서 좀 끊어 오면 몇 만 원쯤 아낄 수 있을 거라는 

주판알이 머릿속을 데굴데굴 굴러다니고 있기도 했던 것 같다.

그런데, 들어갔는데, 캐롤이었다. 9월의 크리스마스였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는데 나는 뭐랑 뭐를 

사겠다, 했던 마음 안의 계획들을 모두 다 지워 버렸다. 그냥 즐기고 싶었다. 느끼고 싶었다. 노란 낙엽 

포슬포슬 떨어지는 가을에 일찌감치 산타할아버지를 모셔다 놓은 곳, 거기의 사람들이 주고 싶었을 

동화 같은 걸 그냥 천진하게 읽고 싶었다. 





“너, 그 동화 기억나?”


엘리베이터가 있었지만 계단을 걸어 올라가자 했고, 우리는 투박한 나무판을 밟으며 오르는 중이었다. 

순금의 마차를 몰고 신이 난 산타할아버지가 보였다. 나는 앞뒤 맥락도 없이 물었다. 혹시 너는 

그 동화가 기억이 나느냐고. 


“무슨 동화지?”


“산타 할아버지의 구멍 난 자루.”


“아!”


“기억나?”


“당연하지. 엄마가 그 제목을 읽어 주던 억양도 기억납니다요.”


산타 할아버지의 구멍 난 자루. 


똑같은 책을, 똑같이 매일매일 읽어 달라고 했었다. 그럼 난, 일하는 엄마였던 난, 어떡하든 내 새끼를 

기쁘게 해 주고 싶어서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계속 읽었다. 잠시잠깐이라도 걔를 충만하게 만들어 주고 싶어서 읽었다. 산타 할아버지의 자루에 구멍이 나서 선물들이 줄줄 새어 나갔다는 아슬아슬한 이야기. 

그 동화 덕분에 우리는 5월에도, 9월에도, 이듬해 1월에도 계속 크리스마스였다. 


“아! 진짜! 내가 지금이니까 하는 말인데 너 때문에 미치는 줄 알았거든!”


“왜지?”


“너, 이상했어. 아니, 책이 그렇게 많은데 그거만 읽으래!!!!! 어우, 꼴통!”



세상의 모든 엄마와 아이에게는 

걔와 나만 아는 비밀이 있다. 

어른 꼴통과 아가 꼴통, 

둘의 비밀 같은 거겠다. 

할머니도 모르고, 

언니 누나 동생도 모르고, 

심지어 애 아빠도 모르는 그런 거. 


사실 그런 건 엄마만 기억한다. 

아이는 금세 까먹으니까.

원래 애들은 애들이었을 적의 

이야기들을 까먹으면서 

어른이 되는 거라고 했으니까.


그래서 엄마들은 간혹 서럽고, 

그립고, 돌아가고 싶다. 

걔가 아주 어렸을 때, 

내가 아주 젊었을 때의 어떤 날로. 




“그럼 엄마는 이거 기억나?”


“뭔데?”


“내가 어릴 때 크리스마스 트리 만들자고 했을 때...”


“그때 뭐?”


“할머니가 그랬어. 우리 집은 불교라서 크리스인지 뭔지 그런 거 없다.”


“푸하하하하하! 맞아맞아, 기억나!”


불교 신자인 할머니가 우리 집에는 크리스마스가 없다고 그래서 짜증이 났다던 아이. 

이제 껑충한 청년이 된 그 아이는 먼 나라에서 만난 9월의 크리스마스에 그냥 친구를 줄 건지, 

여자친구에게 줄 건지 정확히 알 수 없는 선물들을 골랐다. 아마도 여자친구였을 거다

그러니 그렇게도 잡듯, 잡듯 하면서 상세하게 고른 거겠지

엄마도 뭐 사 줄까? 아빠 선물 살까? 한 번쯤은 물어 볼 줄 알았는데 안 그래서 싫기도 하고 좋기도 했다. 마마보이는 아닌 것 같아 다행이면서, 엄마아빠 보기를 돌 같이 하는 것 같아서 섭섭하기도! 

어쨌거나 나도 걔 선물 같은 건 절대 안 사고, 걔 아빠 선물도 홧김에 안 샀다. 대신 우리 회사 애들한테 줄 선물만 신중하게 골랐다. 아휴! 이거 읽으면 우리 집 남자 짜증나겠네.



[톰소여의 모험]을 쓴 작가 마크 트웨인은 빨강머리 앤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참 사랑스럽고 감동적이며 즐거운 아이라고. 


즐거운 아이. 


이쁜 말이다. 꿈 같은 말. 


빨강머리 앤 만큼은 아니겠지만 나도 꽤 즐거운 아이였는데. 

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얘가 나랑 참 닮았다고 생각했었는데. 

들장미 소녀 캔디가 외로워도 슬퍼도 안 운다고 해서 나도 꾹 참았었는데. 

앤서니랑 테리우스가 캔디만 좋아하고 나는 안 좋아해서 슬펐었는데. 

달리기를 그렇게나 싫어했으면서도 난, 달려라 하니 때문에 힘을 내고는 했었는데. 

나는 왜 명작도 수작도 아닌, 그저 이름 없는 들꽃 같은 사람이 되었을까.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렇다.

내가 아이였을 때 순수하게 꼿꼿했기 때문에

그나마도 이만큼의 어른이 되었을지 모른다고.

안 그랬음 망쳤을 걸.





그만 가자 재촉하는 아이를 따라 거기의 문을 열고 다시 세상 속으로 걸어 나왔을 때는 밤. 

하늘은 밤과 낮의 경계인 듯 짙푸르고, 별 대신 불빛이 반짝였으며 젊은 아이들이 골목을 

꽉 채우고 있었다. 


“엄니, 그거 아십니까?”


“또 뭐?”


“오늘 되게 신났던 거.”


“아니거든. 나, 안 신났거든!”


“진짜야. 아까 거기 있을 때 엄마 엄청 신났던데!”



아들아이가 나한테 아까아까

굉장히 신났었다고 했다. 

나는 몰랐었는데 내가 그랬었는가 보다. 


하루 동화. 


괜히 웃고, 이유도 없이 행복했던 

여덟 시간쯤을 보내고 나서 생각했다. 

빨강머리의 앤과 울지 않는 소녀 캔디, 

그리고 지치지 않고 달리는 하니. 

그 즐거운 아이들을 다시 불러오고 싶다고. 

아니, 오늘 낮에 잠깐

그 아이들을 만난 것도 같다고.


- 다음 회에 계속 to be contin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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