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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수경 Oct 13. 2022

몹시도 단순한 장래 희망, 심심한 어른이 되는 것

갔다, 거기로 : 너와 함께 가서 더 좋았다  # 3

왜 가고 싶었는가 하면

심심해 보고 싶어서.

나도 한 번쯤은

심심하게 살아 보고 싶어서.

근데 왜 걔를 데리고 갔냐면

너무 심심할까 봐.



스물두 살 때부터 나는 지독한 야근과 철야에 길들여진 채로 살았다. 밤낮이 없다는 기자질을 

업으로 가진 사람이 되었으니까. 내 이름이 수경인데 회사 선배들은 나를 [의자 두 개, 수경이]라고

불렀다. 책상 의자 두 개만 붙이면 거기가 침대인 듯 맞춤으로 잘 자기 때문이었다. 창 밖으로 푸른색 

동이 터 올 때까지 일을 하다가 두 개의 의자 위에서 새우처럼 잠이 들곤 했던 스물 몇 살의 기억.

서른 넘어까지 기자로 살게 되면서는 침대를 고급으로 바꾸기도 했다. 그 고급한 침대는 다름아닌

스티로폼이었다. 두꺼우면서도 폭신한 그것! 그 발칙한 것을 콘크리트 바닥에 깔아 두고선 치열한 

쟁탈전이었다. 서로 자겠다고, 이제 그만 자라고, 나도 좀 자자고! 아우성을 치며 잠자리 뺏기 싸움을 

했으니까너나   없이 우린  고단했었다. 애들이 대개 다 고만고만했던 서른 몇몇 살의 

기자 엄마들은.


엄마가 그러고 사느라 

집에도 띄엄띄엄 

들어가고 했기 때문에 

 아이는 엄마 없이도 

 우는 습관을 들이면서 

캔디 누나처럼 컸다.

남편은 찡찡거리거나 투덜대도 

우리 애는  그랬다.

나는 그게 고맙고, 그게 싫었다.

걔가 엄마 없어도 너무 괜찮은 .


“일어났어?”


“아니.”


“일어난 거 같은데.”


“자고 있는 겁니다.”




런던의 아침 공기가 아직 어색해서 나는 얼른 친해지려고 베란다 의자 위에 한참 동안이나

앉아 있어 봤다.

심심했다.

멍하니 하늘을 보거나 옆집 창문 속을 가만히 들여다보기도 했었다. 눈을 지긋하게 감고서

바스락, 타박타박, 하는 길의 소리들을 듣기도 했다.

역시 심심했다.

빈둥빈둥 껄렁대면서 애 자는 방으로 들어가 괜한 시비를 걸다가 부엌으로 가서 냉장고를 열었더니 

생수 몇 병뿐이다. 냉장고 속도 심심했다.


좋다. 이런 심심함.


심심하다, 따위의  같은  늘어놓을 겨를 없이 사는  어른이고  엄마다. 그들의 시간은 

해야  일들로  채워져 있고, 사는 집도 개, 사는 짐들 가득차 있다.

냉장고 속에는 먹고 있는 것과 먹어야   그리고 버려야만  음식들이 그득하게 버무려져 있고,

대문을 열고 나서면 상대해야만 하는 사람들이 천지에 있다. 그 중에는 싫은 사람, 미운 사람도

당연히 섞여 있고. 꽉 차 있는 그 모든 것들 중에서 특히 더 감당하기 어려운 건 내 머릿속이었다.

묵직한 덩어리들로 가득한 근심의 머릿속. 거기를 좀 비워 내고 싶었다. 냉동실 청소하듯 싹 꺼내서

버릴 것과 다시 넣을 것을 추려야만 할 시기가 온 거였다. 생각이라는 걸 하면서 살아야 한다.

건강하고 이쁜 생각. 그래야만 이쁜 할머니가 될 수 있다. 이 글을 읽는 누군가 역시 그럴 걸.

아직 아니라면 언젠가 꼭 그런 날이 올걸. 지금의 나를 다 개워 내고 새 사람으로 살아 보고 싶은 날이.




배고파, 배고파, 하면서 아이를 깨워 집을 나섰다. 시끌벅적한 도심과는 다른 공기.

그렇게까지 시골은 아니고 적당한 도시인데도 적막할 만큼 조용하다, 이 동네는.

공원을 건너 아스팔트 위까지 제집인 듯 뛰어다니는 청솔모와 여우, 발에 밟히는 낙엽들.

환한 색깔로 칠해 놓은 집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 있는 걸 보면서 동화책 같아,

나도 모르게 소리 내어 말했다.


대문을 나설 때는 해가 쨍했었는데 몇 걸음 걷는 동안에 갑자기 빗방울. 또 시작이다.


“얘, 여기는 10초마다 한 번씩 비 왔다가 갰다가 그러는 거 같지 않어?”


“10초는 아닐 걸.”


“그런 뜻이 아니잖어. 너, 과장법 몰라?”


“아이쿠! 내가 아주 크게 잘못했군.”


“알면 됐다.”


“근데 엄마, 여기 사람들은 우산 잘 안 써. 아주 큰 비 아니면.”


“니가 그래서 그랬구나.”


“내가 뭐를 그래서 그랬지?”


“어제 비 오는데 우산 안 쓴 거. 여기 사는 척 할라구 그런 거지?”


“그렇군.”


거기 사람인 것처럼 우리도 약간의 비를 맞으며 역 앞에 있는 베이커리를 향해 걸었다.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느릿느릿.








몹시도 커피가 고팠던 터라 커다란 잔에 라테 한 잔과 과일 한 사발. 걔는 밀크티. 소곤거리는

뒷자리 사람들의 영어를 듣고 있자니 영화 보는 기분이 들었다. 한 여자가 손으로 턱을 괴고서는

뭔가 아주 흥미롭다는 듯 앞에 앉은 한 여자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자막이 있으믄 좋겠네. 이 사람들은 아침에 무슨 얘기를 하는지.”


“별 얘기 아닐 걸.”


“영어로 말해서 그런가. 뭔가 되게 있어 보이는데? 외국 영화 보는 거 같고.”


샌드위치를 받으러 갔던 아이가 돌아와서 말해 주었다.


“거 봐. 별 얘기 아닐 거라고 했지? 변비가 너무 심해서 큰일 났다, 뭐 그런 얘기를 하고 있던데?”


“켁. 똥 얘기였구나.”





나는 고릿한 염소 치즈 위에 버섯과 달걀 프라이를 수북하게 얹은 바게트. 평소에 별로

많이 먹지는 않는 타입인데 딱 한 입 남기고 그걸 다 먹어 치웠다. 걔는 두 알의 달걀 프라이와

베이컨을 인심 좋게 올린 베이글. 맛있는 건 많이 먹고, 맛 없는 건 손도 안 대는 아이인데 접시를

다 비운 걸 보니 괜찮았구나, 싶었다.


“맛있었구나.”


“아닌데. 그냥 베이컨이랑 달걀이던데.”


“근데 어떻게 다 먹었어?”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니까.”


“왜?”


“여행이 원래 그런 겁니다요.”


한방 먹었다. 아이가 나를 가르친다. 그런데 이상하게 기분이 안 나쁘고 듬직하게 느껴졌다.

집에서만 까탈이고, 세상 속으로 나가면 계속 그러지는 않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찬밥 더운밥 너무 가리면 눈치 없는 어른이 될 거니까.



누군가 와서 상을 다 치우고도 우리는 한참이나 그냥 앉아 있었다. 숟가락 놓으면 벌떡벌떡 일어나고,

이러지 않아도 된다 싶으니 비로소 내가 여행자라는 게 실감이 났다. 아무 말 안 하고, 비가 오락가락

그러는 창밖만 바라보는데도 지루하거나 불안해 하지를 않는 느긋한 나에게 고마움이 밀려오기도 했다.

잘했어. 잘하고 있어. 당분간 계속 이러자.


그런데 아이 손에서 핸드폰이 떠나질 않는다. 나는 엄마답고 어른스럽게 한 마디 했다.


“얘, 여행 와서까지 꼭 그렇게 핸드폰한테 그래야 되니? 너도 그냥 좀 느긋하게 있어 봐.”


“모르는 말씀입니다. 내가 느긋하게 있으면 우리 여행 망칠 걸!”


“어머머! 아니거든!”


“엄마랑 어디 갈지 찾고 있는데... 관두나?”


“아... 아냐! 하던 거 계속해.”


또 한방 먹었다. 당분간은 얘한테 까불지 말아야겠다. 여기에선 얘가 나의 보호자 아닌가.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길. 빨간 벽돌 우체국, 분홍 꽃이 담장을 타고 넘는 어떤 집 그리고 예배당도.

눈에 보이는 것들마다 뭐라고 평을 하면서 걸었는데, 그 말들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 걸 보면 아마

죄다 쓸 데 없는 농담 같은 게 아니었을까, 싶다. 아! 맞다. 내가 욕실용품 파는 어떤 가게에 있던

구리 욕조를 사 가고 싶다고 했었고, 아이는 그렇게 큰 거를 사 가겠다는 건 정말 좋은 생각이라고

칭찬해 주었던 것 같다. 그리고 생각나는 거 하나 더! 바느질 공방 같은 가게에 수 놓아 만든 천이

걸려 있었는데 그거를 보더니 내 아이가 이런 걸 묻기도 했었다.


“저기 있는 참새, 꼭 엄마 같은데?”


“내가 참새면 너도 참샌데?”


쓸 데 없는 농담 따먹기나 하면서 그저 이렇게 걷고 싶었다. 정말 해 보고 싶은 일이었다.

배가 터지도록 아이를 품어서 세상으로 끄집어 낸 뒤 삼십 년 가까이를 사는 동안, 그 녀석한테

이렇게 해 볼 시간을 내 주지 못해서였다. 아마 엄마라는 직책이 너무나 무거워서였을 것이다.

너무나 바빠서였을 것이다. 너 말고도 챙겨야 할 게 아주 많아서였을 것이다.

지금까지 사는 동안 단 한 번도 온전히, 우리만의 시간을 즐길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되돌릴 수는 없지만 만회할 수는 있으니까. 그래서 굳이 이렇게 긴 여행에 걔를 불러들였다.

잘한 거야, 싶었다. 얼마의 돈이 깨지든, 그 돈을 어떻게 마련했든, 똑같이 반복되어야만 하는

우리들의 일상을 토막 내는 일이 얼마나 어려웠든지... 무조건 참 잘한 거다, 했다.

내가 너랑 이렇게 먼 데로 떠나온 것은.




어디로 가고, 뭐를 먹으면 좋고, 어떤 거를 조심해라 하면서 안내하는 여행기가 아니다.

나는 쿨하거나 핫한 언니도 아니기 때문에 재미가 없을 수도 있다. 그래서 글을 읽다가 뭐래? 하면서

짜증을 내는 사람들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하는 수 없지, 뭐. 부슬부슬 비 내리는 런던에서의 첫 아침.

이 여행이 모두 다 끝나면 글을 쓸지도 모르겠다 여기면서 부연 하늘 아래를 걸을 때, 나는 생각했다.

내 말들에 귀기울여 줄 이가 몇이나 될까, 세어 보고 있었던 것 같다.


- 다음 회에 계속 to be contin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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