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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수경 Oct 12. 2022

마치 옛 이야기 같았던 거기,
루이샴 블랙히스  

갔다, 거기로 : 너와 함께 가서 더 좋았다  # 2




첫발을 디딘 런던의 외곽,

루이샴 블랙히스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추척추적. 


여기는 런던. 시내 중심가에서 탄 기차는 삼십 분쯤을 부지런히 달리더니 우리를 

[블랙히스 Blackheath]라는 조그만 역에다 내려놓았다. 조금조금 비가 오고 있었다. 

나는 캐리어 속을 뒤적거려 우산을 꺼냈고, 걔는 죽어도 우산 같은 건 안 쓰겠다 하여 혼자서 

그 우산을 썼다. 진짜 이상한 애야, 그러면서. 있는 우산을 왜 안 써? 속엣말로 군시렁 거리면서.





역 앞 정류장에서 영국 특유의 빨간 이층버스를 타고 세 정거장을 지났다. 

고풍스러운 벽돌집과 동화 분위기를 내어 지은 파스텔 톤 주택들이 이렇게 또 저렇게 서 있는 

조용한 마을. 지금부터 일주일을 머물게 될 아파트는 그 집들 사이에 놓여 있었다.




그 집의 문은 이상했다. 번호 키로 무장되어 있어서 찍찍찍 누르기만 하면 되는 우리나라의 현관문과는 

사뭇 달랐다. 열쇠 구멍이 세 개. 서로 다른 열쇠를 일일이 맞춰 가며 문을 열어야 하는 아주 불편한 

시스템이었다. [아니, 참! 아직도 이러고 있는 나라가 있다는 거야?] 아이는 열쇠의 퍼즐을 맞추면서 

투덜댔지만 나는 이미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어라! 무언가 좀 드라마틱하지 않은가. 마치 시간을 

거슬러온 것 같은 이상한 느낌. 이번 여행은 생각보다 더 특별할 것 같다는 삼삼한 기대 같은 것.







집은 편안했다. 다행이야, 라고 생각했다. 일주일이나 살아야 할 집이니 당연하지 않겠나. 

당연히 마음에 들어야지. 암, 그렇고말고. 무엇보다 그 집의 깨끗함이 좋았다. 화려할 필요는 없었다. 

다만 깨끗했으면 했다. 그런데 이토록 깨끗하다니!

화병에 꽃이 있었고, 발자국 옮겨지는 동선에 맞춰서 매트가 깔려 있었다. 지그재그, 지그재그로. 

소파 위의 쿠션들은 누군가 거기 앉았을 때 가장 편안할 거라 생각되는 위치에 놓였고, 

식탁은 단정했다. 풀을 먹여 하얗고 빳빳한 이부자리의 침대는 눈물겨웠고, 

우리 짐을 넣으라고 비워 둔 서랍 속은 깨끗했다. 내 취향이야, 했다.








걔는 오래 된 책상이 있는 방을 나더러 쓰라고 했다. [엄마, 책상 좋아하잖어.] 하면서. 

나는 무심한 목소리로 툭, 고맙다고 말했다. 속으로는 아이구, 이쁜 놈! 싶었지만 티는 안 냈다. 

칭찬도 야단도 너무 티나게 그러면 무조건 엇나가는 아이라서. 만약에 니가 이 방을 쓰겠다고 했으면 

네 머리를 쥐어박았을지도 모른다는 말 같은 것도 안 했다. 좋게, 좋게 가는 게 중요하니까. 




책상 있는 그 방이 좋았다. 열쇠 구멍 있는 책상이 좋았다. 쭉 빼면 삐그덕 소리를 내는 낡은 의자도 

귀여웠다. 그 무엇보다 좋았던 건 창 너머였다. 빨간 꽃 가득 심어져 있는 커튼 너머의 창을 열었더니... 

거기에 푹 내려앉은 구름 낀 하늘과 집이 보여서 좋았다.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니 빨간머리 앤에 

나올 법한 다락방 창문 같은 걸 오종종 달고 있는 벽돌집이 보였는데, 그것도 참 좋았다. 

나는 책상 위에 놓인 빨간 문구함들을 반짝 들어서 창문 한 귀퉁에 숨겨 두었다. 

책상이 깨끗해야 글이든 밥이든 짓고 싶어지니까.


“우리 뭐 할까? 너, 뭐 하고 싶어?”


“물 먹고 싶습니다.”


“아주 낭만적이구나!”







목이 마르다면서 아이가 집을 나서고 나 혼자 남겨졌을 때는 잠시 꿈인가, 싶기도 했다. 

여기가 어디야, 이게 가능해? 싶기도 하고. 뒷짐을 지고선 마치 동네 할아버지처럼 집 안 곳곳을 

찬찬히 돌아보았다. 유독 사진이 많았다. 여행을 많이 다닌 가족인 것 같았다. 

아님, 식구 중 누군가가 사진작가인가? 돋보기를 꺼내 쓰고서 구석구석 이 잡듯 하다가 

주인 부부 내외의 액자 속 사진들을  구경했다. 젊었을 때의 부부 둘 사진과 중년이 된 부부의 사진을 

가까이 진열해 두었더라. 짧은 머리의 아내는 여전히 짧은 머리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고, 

약간 능글맞은 분위기의 남편은 한결 푸근한 모습으로, 별로 살 찌지 않고 나이 들어 있었다.

그런데 거기에서 한 걸음을 옮겼을 때 만난 할머니의 사진 한 장. 아! 세월의 나이! 

하냥 맑았던 할머니는 어쩐지 조금 심술 할머니 같아졌고, 집을 더럽히면 가만 두지 않겠다는 

무언의 눈빛을 날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무섭지는 않았다. 다만, 할머니의 사진 속에 할아버지가 

계시지 않아서, 약 3초 정도 마음이 그냥 좀 짠했다.



사시사철 곁에 있던 소나무 같은 누군가가 난 데 없이 사라진다면, 

그렇게 청천벽력 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남겨진 사람의 얼굴이 달라지는 거랬는데. 

할머니 얼굴이 마치 무말랭이처럼 꼬들꼬들해지신 게 

할아버지 때문은 아닌가, 잠시 생각해 보았던 것 같다. 




아! 맞다! 물 사러 나간 걔가 돌아오기 전에 할 일이 있었다. 나는 두 개의 캐리어를 열어 옷가지들을 

전부 풀어헤쳤다. 속옷, 겉옷, 양말과 화장품, 치약과 칫솔, 부엌용품이랑 사치품들. 그렇고 그런 것들을 동선에 딱 맞게 정비했다. 그러면서 좋았다. 이것이 내가 꿈꾸었던 삶이야, 하면서. 

사실 나는 삶의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어 주기만 바라는 사람이었다. 높이 오르겠다거나 떵떵거리겠다는 마음 같은 거는 먹어 본 적도 없었지, 싶다. 다만 사람이든 물건이든 변하지를 말고 제자리에만 있었으면 했다. 그런데 그것이 그렇게나 어려웠다. 그래서 거기로 떠나 잠깐의 새 삶을 꾸릴 때는 원없이 

내 마음대로 했다. 내가 좋아하는 제자리 정렬 방식으로. 




두 개의 칫솔을 욕실의 빈 컵에다 꽂을 무렵, 걔가 양손에 낑낑 물통을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물만 사 왔어?”


“예.”


“어떻게 그래?”


“지금부터는 원하는 게 있으면 콕 집어서 말씀을 하셔야 합니다.”


“됐다!”


까칠한 아이가 까칠하게 사 온 물통을 보고선 저녁밥은 나가 먹자, 결정했다. 먹을 거를 좀 사 오면 

해 먹을 거였는데 정말 잘 됐지 뭔가. 여기까지 와서 또 밥을 하긴 정말 싫은데!



비가 뚝 그치고 어둠이 덮은 밤의 시간 속을 뚜벅뚜벅, 우리는 밥을 먹기 위해 길 위에 올랐다. 

그 길이 아직 낯설고 어색해서 움찔, 소심해지는 어깨를 흔들며 걸었다고 기억한다. 

적당한 긴장감 흐르는 낯선 공기가 더할 나위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과연 무엇을 먹여 줄 건지도 모를 

어느 식당의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테이블 위에 빨간 꽃 한 송이가 웃고 있었던 것도 

꿈만 같다. 돌이켜보니 잠시, 꿈을 꾸었던 것만 같다. 


- 다음 회에 계속 to be contin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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