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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수경 Oct 12. 2022

갔다, 거기로 :  너와 함께 가서 더 좋았다

뭘 어쩌려고... 아들과 둘이서 마흔 날의 유럽




prologue


그때 나는 조금 무서웠다.

지금처럼 계속 사는 것도,

다른 쪽으로 나아가는 것도!


언제부터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하여튼 그때 나는 마치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아이 같았다.

괜한 원망이 들거나 계속 신경질이 났다. 마음이 칼에 벤 듯 쓰라리거나 딱히 이유도 없는데

울고 싶을 때가 많았다. 밥을 하는 것이 싫고, 밥을 먹기도 싫었다. 좋아서 했던 일이 하나도 좋지가 않고, 싫어도 그냥저냥 잘 참고 했던 일들은 이제, 죽으면 죽었지 못 하겠는 일이 되었다.

나한테 뭘 해 달라 하는 사람들은 죄다 미웠고, 나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도깨비 같았다.

돈도 벌기 싫었고, 머리를 빗기도 싫고, 잠도 오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하나도 사랑스럽지 않고,

내가 날 간수하는 일조차 푸념거리였다. 다 귀찮았다. 다! 전부 다.

어쩌면 아팠었나, 한다. 마음이, 마음이 앓고 있었을 거라고. 대체 그 무엇이 그렇게 아팠던 걸까.

나의 나이가 아팠을까. 돈도 벌고 밥도 하면서 살아 온 날들이 문득 싫어졌을까.

뭔가 대단한 사람이 될 줄 알았는데 못 그러고 나이만 먹었다는 게 깨달아져서 속상했던 것은 아닐까.

잘하려고 애썼는데 잘한 게 하나도 없는 것 같아 허탈했을까. 좋은 엄마, 좋은 딸, 좋은 아내이거나

좋은 며느리, 좋은 친구 혹은 좋은 나. 참 좋은 나로 살고 있지 못해서 뼈가 시리고, 근육이 쑤시고,

마음이 그토록 맹랑하게 들고 일어났던 것은 아니었을까. 어쩌면 그저 내 마음의 반란 같은 것.


“선배가 이상한 게 아니야. 그냥 그럴 때가 온 거야. 우리도 곧 그럴 걸, 뭐.”


후배의 말에 문득 용기를 얻은 난 아들아이를 눈앞에 앉혀 놓고 당당히 고백했다.


“있잖아. 엄마가 좀 아픈가 봐. 속상한가 봐. 그러니까 가끔 이상하게 굴어도 그냥 좀 봐 주라.”


나의 고백에 걔가 덤덤히 말해 주었다.


“그럴 때도 있는 거지, 뭐. 잘 알아들었습니다요.”






누구에게나 ‘그럴 때’가 온다. 죽어 넘어질 것 같은 때. 스무 살엔 앞이 안 보여서 그렇고, 서른 살이 오면 나의 앞날이 어떨 건지가 훤히 보여서 죽을 것만 같다. 마흔이 되면 첩첩산중이 오고, 쉰이 되니까

엎친 데 덮치면서 인생이 깨달아졌다. 머지 않아 예순을 맞게 되면 울화증이 터지면서 기가 찰 거고,

기억이 까무룩해지는 일흔이면 황당하기도 할 거다. 이 모든 ‘그럴 때’를 견뎌야 하는 것이

우리들의 삶이겠지. 물론 아직은 잘 모르지만 왠지 그런 것 같다.


조금 멀찌감치 떨어져서 나란 사람을 보고 싶었다. 도대체 난 어떤 사람인지, 정체가 무엇인지, 사기꾼은 아닌지. 그러기 위해서는 어디로든 가야 했다. 모든 것을 다 놔 두고 가 보면 내가 지금 어디가 아픈지,

무엇을 찾고 있는지, 어떡하면 행복할 건지 보일 것만 같았다.

아니, 무엇보다 나는 좀 쉬어 갈 필요가 있었다. 일분일초가 아깝다 하면서 안달복달, 허둥지둥 사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아무 것도 안 해 보는 시간이 필요할 것만 같았다. 그래서 걔를 꼬셨다.

혼자인 건 무서우니까 내가 참 좋아하는 걔를.


“얘, 너 말이야. 엄마랑 어디 갈래?”


“어디?”


“아무 데나 아주 먼 데.”


“나야 좋지.”


그렇고 그렇게  걔를 데리고 떠났다. 그렇게  마흔 날만 공백이기로 하자고 마음먹은 다음에 

대출을 받았다. 이담에 우리 부부 늙었을  쓰려고 야곰야곰 모으보험금  절반을 뚝 떼어 

비행기표를 사고, 집을 얻었다. 이다음 같은  중요하지 않았다. 이다음을 어떻게 점치나

지금 나에게 가장 중요한 때는 지금이었다, 바로 지금.



Episode



거긴 영국이었다.

우리는 영국의 첫 집에 막 당도한 참이었고,

이제 여행의 시작이었으니 어디든지 갈 수 있었고,

더 이상 아무 데도 안 가고 가만히 머물러 있을

무한의 자유도 있었다.

아무런 목적지도 두지 말자 하면서

헐렁헐렁 떠나 온 참이었으니.

/

영국의 그 집에서 걔가 나한테 이런 말을 했다.

/

해 주셨으면 하는 숙제가 하나 있습니다.


뭐지?


이 영화를 끝까지 보는 거.

/

[리스본 행 야간 열차]

하품을 쩍 하면서 그 영화를 시작했던 나는

영화의 엔딩 타이틀이 오를 무렵,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있었고

하, 그러면서 걔한테 말했다.

/

그래 한번 가 보자. 거기가 어디든!


-다음 회에 계속 to be contin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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