뭘 어쩌려고... 아들과 둘이서 마흔 날의 유럽
언제부터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하여튼 그때 나는 마치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아이 같았다.
괜한 원망이 들거나 계속 신경질이 났다. 마음이 칼에 벤 듯 쓰라리거나 딱히 이유도 없는데
울고 싶을 때가 많았다. 밥을 하는 것이 싫고, 밥을 먹기도 싫었다. 좋아서 했던 일이 하나도 좋지가 않고, 싫어도 그냥저냥 잘 참고 했던 일들은 이제, 죽으면 죽었지 못 하겠는 일이 되었다.
나한테 뭘 해 달라 하는 사람들은 죄다 미웠고, 나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도깨비 같았다.
돈도 벌기 싫었고, 머리를 빗기도 싫고, 잠도 오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하나도 사랑스럽지 않고,
내가 날 간수하는 일조차 푸념거리였다. 다 귀찮았다. 다! 전부 다.
어쩌면 아팠었나, 한다. 마음이, 마음이 앓고 있었을 거라고. 대체 그 무엇이 그렇게 아팠던 걸까.
나의 나이가 아팠을까. 돈도 벌고 밥도 하면서 살아 온 날들이 문득 싫어졌을까.
뭔가 대단한 사람이 될 줄 알았는데 못 그러고 나이만 먹었다는 게 깨달아져서 속상했던 것은 아닐까.
잘하려고 애썼는데 잘한 게 하나도 없는 것 같아 허탈했을까. 좋은 엄마, 좋은 딸, 좋은 아내이거나
좋은 며느리, 좋은 친구 혹은 좋은 나. 참 좋은 나로 살고 있지 못해서 뼈가 시리고, 근육이 쑤시고,
마음이 그토록 맹랑하게 들고 일어났던 것은 아니었을까. 어쩌면 그저 내 마음의 반란 같은 것.
“선배가 이상한 게 아니야. 그냥 그럴 때가 온 거야. 우리도 곧 그럴 걸, 뭐.”
후배의 말에 문득 용기를 얻은 난 아들아이를 눈앞에 앉혀 놓고 당당히 고백했다.
“있잖아. 엄마가 좀 아픈가 봐. 속상한가 봐. 그러니까 가끔 이상하게 굴어도 그냥 좀 봐 주라.”
나의 고백에 걔가 덤덤히 말해 주었다.
“그럴 때도 있는 거지, 뭐. 잘 알아들었습니다요.”
누구에게나 ‘그럴 때’가 온다. 죽어 넘어질 것 같은 때. 스무 살엔 앞이 안 보여서 그렇고, 서른 살이 오면 나의 앞날이 어떨 건지가 훤히 보여서 죽을 것만 같다. 마흔이 되면 첩첩산중이 오고, 쉰이 되니까
엎친 데 덮치면서 인생이 깨달아졌다. 머지 않아 예순을 맞게 되면 울화증이 터지면서 기가 찰 거고,
기억이 까무룩해지는 일흔이면 황당하기도 할 거다. 이 모든 ‘그럴 때’를 견뎌야 하는 것이
우리들의 삶이겠지. 물론 아직은 잘 모르지만 왠지 그런 것 같다.
조금 멀찌감치 떨어져서 나란 사람을 보고 싶었다. 도대체 난 어떤 사람인지, 정체가 무엇인지, 사기꾼은 아닌지. 그러기 위해서는 어디로든 가야 했다. 모든 것을 다 놔 두고 가 보면 내가 지금 어디가 아픈지,
무엇을 찾고 있는지, 어떡하면 행복할 건지 보일 것만 같았다.
아니, 무엇보다 나는 좀 쉬어 갈 필요가 있었다. 일분일초가 아깝다 하면서 안달복달, 허둥지둥 사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아무 것도 안 해 보는 시간이 필요할 것만 같았다. 그래서 걔를 꼬셨다.
혼자인 건 무서우니까 내가 참 좋아하는 걔를.
“얘, 너 말이야. 엄마랑 어디 갈래?”
“어디?”
“아무 데나 아주 먼 데.”
“나야 좋지.”
그렇고 그렇게 난 걔를 데리고 떠났다. 그렇게 딱 마흔 날만 공백이기로 하자고 마음먹은 다음에
대출을 받았다. 이담에 우리 부부 늙었을 때 쓰려고 야곰야곰 모으던 보험금 중 절반을 뚝 떼어
비행기표를 사고, 집을 얻었다. 이다음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다. 이다음을 어떻게 점치나.
지금 나에게 가장 중요한 때는 지금이었다, 바로 지금.
거긴 영국이었다.
우리는 영국의 첫 집에 막 당도한 참이었고,
이제 여행의 시작이었으니 어디든지 갈 수 있었고,
더 이상 아무 데도 안 가고 가만히 머물러 있을
무한의 자유도 있었다.
아무런 목적지도 두지 말자 하면서
헐렁헐렁 떠나 온 참이었으니.
/
영국의 그 집에서 걔가 나한테 이런 말을 했다.
/
해 주셨으면 하는 숙제가 하나 있습니다.
뭐지?
이 영화를 끝까지 보는 거.
/
[리스본 행 야간 열차]
하품을 쩍 하면서 그 영화를 시작했던 나는
영화의 엔딩 타이틀이 오를 무렵,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있었고
하, 그러면서 걔한테 말했다.
/
그래 한번 가 보자. 거기가 어디든!
-다음 회에 계속 to be continu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