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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크기만큼 성장했다(에필로그)

by 이경보

일본 유학을 마치고 남편 따라 무작정 건너온 대만.

그 어떤 미래의 청사진도 없이 몸으로 부딪힌 타국 생활.

결혼은 누구에게나 인생의 전환점이며, 일과 육아 병행은 넘어야 할 산이다.


어차피 지도도 없이 걷는 인생길이라지만, 타국에서 걷는 그 길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기본적으로 갖추고 있어야 할 건강이 결여된 채로 시작했다는 것이 치명적이었다. 아픈 몸으로 일과 육아를 동시에 진행하며 언어의 장벽을 헤쳐나가야 했다. 외국이라는 미지의 세계였기에 나의 하루하루는 낯섬에 따른 긴장감으로 가득했다. 마음의 의지처가 없었기에 외로웠고 초조했다.




몸도 마음도 부서질 대로 부서져 회복 불가능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인간의 생명력과 잠재력은 생각보다 그리 쉽게 무너지지 않는 거였다.

크게 다치고 넘어졌기에 일어서려는 의지 또한 그에 비례할 만치 대단했다.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 정도의 우울증이 들이닥치지 않았더라면, 그 짧은 2-3개월의 시간으로 명상을 배우고 몰입하여, 지금이라도 삼켜버릴 듯한 회오리바람에서 고요한 호수 상태의 마음으로 만들어 놓을 수 있었을까?

일상을 올 스톱시켜 버린 목디스크가 나를 습격하지 않았더라면 40여 년간 길들여온 식습관을 개선할 수 있었을까?




돌이켜 보면, 강도 높은 고통, 역경은 나를 변화 아닌 혁신에 가까울 정도로 바꿔 놓았다.

살기 위해 나는 변화해야만 했다. 변화하고픈 의욕이 최고치로 달했을 즈음에 나는 3일 연속 같은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자신이 자살하고 있었다. 3일째 본 꿈은 아직도 선명히 그때를 기억하고 있다.

아주 높은 고층 빌딩 위에서 내 몸을 던져 자살을 하고 있었는데, 그냥 고층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주 강력한 힘으로 내 몸을 힘껏 내던지는 거였다. 그 힘이 너무나 강력해 떨어지는 과정에서 놀라 눈을 떴다.


놀라 잠에서 깬 나는 한참을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이게 뭐지? 똑같은 꿈을 3일째 꾸었네. 내가 왜 이런 꿈을 꾸었지?"

새벽 2시쯤이었는데, 침대에서 일어나 컴퓨터를 켜고 인터넷으로 꿈 해몽을 찾아보았다.

3일 연속 같은 꿈은 내게 전달하는 강한 메시지라고 하며, 자살은 "큰 변화"를 의미한다고 했다.


나는 변하고 싶었다. 아주 많이 그리고 크게 말이다.

내가 이런 삶을 살려고 유학을 하고, 결혼을 하고, 교수가 된 게 아니지 않을까?




나는 내 자신에게 감사한다. 포기하지 않고 여기까지 버텨 묵묵히 살아온 걸.

언제부터인가 내겐 "인내심"이 장착되어 있었다.

유학 때에도 인내심이 있다는 걸 느꼈지만, 그 인내심은 대만 생활에서 한층 성숙하고 발효되고 있는 듯하다.


힘들게만 느껴졌던 육아도, 어느덧 그 아들들이 성인이 되어 인젠 외국인인 엄마의 보호자 역할을 한다.

일터에서도 젊은 후배 교수들이 들어와 있어, 예전에 내 어깨에 있던 짐들을 다 나눠 짊어지고 있다.

오늘의 여유로움은 치열하게 포기하지 않고 버텨온 날들의 보상이다.




감사해야 하는 건 나 자신만이 아니라, 내게 일자리 기회를 준 대만, 대만 사람들이다.

유학 시절에 생각하지도 못했던 한국어교육에 발을 디딜 수 있게 해 준 이곳 대만에 사명감을 갖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교육일은 내게 있어 많이 버거운 일이자 자신의 정체성을 느끼게 해 준 삶의 활력소이기도 하다.


{<대만에서 분투했던 나날들>의 연재글은 일단 여기에서 매듭을 지으려고 합니다. 그 동안 약속한 대로 글을 올리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많이 읽어주시고 따뜻한 댓글도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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