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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을 만나다

by 이경보

몇 분 간격으로 밀려오는 감정의 파도에 내맡겨진 체, 하루가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 달이 지났다.

온 세상이 회색 빛으로 물들어져 있다.




그런 와 중에 핸드폰으로 날아온 명상 음악. 대만 지인이 보내 준 것이었다.

그중에는 반야심경 중국어본의 노래도 있었다. 그 불교 음악들을 들으면 이제라도 곧 나를 삼켜버릴 듯한 감정들이 다소 누그러짐을 느꼈다. 그래서 연구실에서 하루 종일 명상 음악을 작은 볼륨으로 계속 틀어놓았다. 집에서도 틀어 놓았고, 그 음악을 들으며 잠에 들었다. 내가 드러누우면 아들이 얼른 와서 카세트를 내 머리맡으로 갖다 놓았다.

명상 음악에 의해 그 감정들이 기승을 부리지 못했지만, 수면 아래에는 언제라도 치켜오를 듯한 그 감정들이 아직도 머물고 있었다.


정신과에 가서 진료를 받아야 하지만, 원래 병원 약을 극도로 싫어했던 터라 병원으로 가려는 마음이 쉽게 생겨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위험한 생각이었고 한편으로는 다른 방법을 찾은 자신에게 감사한다.




3월부터 시작한 우울증이 2달쯤 지난 어느 날, 문득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는 게 있었다. 그건 “명상”이었다. 명상으로 어쩌면 이런 내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지 않을까?


당시 내 주위에서 명상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밤마다 듣던 법륜 스님의 즉문즉설 속에서 명상이란 두 글자를 몇 번이고 들었었다.

막연하지만 심신의 평안을 위해 훗날 퇴직하면 배워봐야지 생각하곤 했었다.


그런데 지금 그 명상이 절실히 배우고 싶어졌다.

그래, 올 여름방학에 한국에 가서 정토회의 "깨달음의 장"에 가서 명상 수련하자.

대만의 대학은 한국보다 좀 이른 6월 중순부터 여름방학이 시작된다.


"깨달음의 장" 수련 신청 첫날, 만반의 준비를 하고는 컴퓨터 앞에 앉아 시간을 기다렸다. 9시 땡 하자 들어갔는데, 아니 이럴 수가! 이미 인원 수가 차서 등록 마감이 되어 버렸다.

1시간의 시차를 깜박하고 만 것이다. 신청하기 어렵다는 정보를 알고 바짝 긴장해서 신청 시작 시간에 들어갔건만, 한국 시간으로 이미 1시간 늦게 들어간 것이다.




자신의 부주의를 탓하며 속상해하고 있는데 대만의 한 지인이 인연이 안 닿아 그런 거라며 그러지 말고 대만에서 배워 보면 어떠겠냐고 했다.


내가 중국어로 다 알아들을 수 있을까 하는 조바심이 앞서 주저했지만, 여기에서 다른 뾰족한 수가 없었다.

용기 내어 노크한 곳은 대만에서 가장 규모가 큰 대승불교 法鼓山의 명상 프로그램이었다.

명상 입문반은 8시간. 일주일에 한 번, 2시간씩의 한 달 코스였다. 명상 자세를 큰 모니터에서 보여주었고, 불교 신자들이 또 옆에서 자세를 교정해 주어, 긴장했던 것과 달리 수월하게 배울 수 있었다. 중요한 것은 배운 후 집에 와서 얼마나 연습하느냐가 관건이었다.



6월 한 달간 입문반에 다닌 후 여름 방학이 시작되었고, 여름 방학 2달 동안, 나는 거의 외부 사람들과의 접촉을 차단하고, 명상 연습에 몰입했다.

한국 가족이 사서 보내준 “금강경”등의 몇 권의 불서를 읽기도 했다. 하루의 일과를 명상과 불서 읽기로 채웠다.


나는 불자도 아니었고, 그저 명상에만 관심이 있었다. 명상을 하면서 자신이 변하는 모습을 보고 왜, 왜 이렇게 짧은 시간에 변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자연스레 불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법륜 스님의 즉문즉설도 세상 사람들의 번뇌를 들으며 내가 품고 있는 이것들이 일반 중생들의 번뇌구나 하는 위안과 깨달음이 있었기에 들어온 것이다.




10분간도 반가부좌를 틀어 앉아 있기 어려웠던 것이, 20분간, 30분간이 되고, 40분간을 앉을 수 있게 되었고, 한 달쯤 되었을 때는 1시간 남짓을 지속해서 앉을 수 있게 되었다. 여름방학이 끝나 학기가 시작한 후에는 매일 아침 새벽 4시에 1시간 동안 명상을 했다. 4시에 일어나는 습관이 이미 몸에 뵈어 있었기에 명상 연습하는데 도움이 많이 되었다.


1시간을 앉아 명상을 할 수 있게 되면서, 회오리바람에 일던 거센 파도는 어디론가 완전히 사라지고, 작은 파도도 찾아볼 수 없는 고요한 호수 같은 마음 상태로 돌아갔다.


지옥에서 천국으로 옮겨 온 느낌이었다. 세상이 아름답고 평온하며, 두 아들이 너무나 사랑스럽게 보였다. 내 삶이 풍요롭게 느껴지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밉던 남편이 불쌍하게 보였다. 그의 힘든 모습을 본 것이다. 인제 껏 나의 삶의 무게만을 바라보며 힘들어했는데 그도 힘들구나.




2달 후, 학교가 개강했을 때 동료 교수나 옆 학과의 교수들이 나를 보고는 ‘즐거워 보인다’ ‘생기가 있다’라는 말들을 하곤 했다. 무뚝뚝하고 사무적인 60대인 교수가 회의 시간에 내 곁으로 와서 조용히 말했다.


"이 교수, 요즘 무슨 건강식품 먹어요?"

"네? 건강 식품이라니요? 저 먹는 거 없는데요."

"그럴 리가요? 얼굴에 생기가 흐르고, 눈빛이 달라요. 지난 학기는 늘 피곤해 보였는데."


강의 시간도 즐거웠다. 학생 한 명 한 명이 다 사랑스러운데 어찌 즐겁지 않고 기쁘지 않을까!




나는 인제 껏 자신의 내면을 주의 깊게 보살피지 못했다. 대만에서의 지난 10년간 나의 일상은 늘 긴장감, 초조함, 무능함, 분노, 갈등 같은 감정과 싸우고, 싸우다 지치면 억누르며 살아왔다. 단 하루도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보듬어 줄 여유가 없었다. 전임 교수라는 자리를 지키기에 안간힘을 쓰고 자신의 무능함에 부딪혀 속상해하고 슬퍼하기만 했다.


정말이지, 행복하지 않았다. 사회적 지위, 명예는 나를 행복하게 해주지 않았다. 그러면서 나는 어제와 같은 오늘을 다람쥐 쳇바퀴돌듯 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조그마한 하찮은 계기에 그 억누르고, 뒤켠으로 내팽개쳐 있던 감정들이 폭발해 버린 것이었다.


생각해 보면, 우울증은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친 게 아니라, 여러 전조 증상이 있었다. 학교에서 집에 돌아올 때, 집에 도착하기 10분 전쯤부터 가슴이 갑갑하고 조여 오는 느낌을 종종 느꼈다. 집에서도 가끔씩 숨을 제대로 쉬기가 힘들 때도 있었다.


나는 명상 수련을 통해 내 감정들에 휘말리지 않고 그 감정들을 거리 두어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일찍이 경험하지 못했던 것들이다.




새벽 명상은 그 후로도 계속 이어졌다.

그동안 나는 몇 번인가 사철의 명상 수련에 참가하기도 했다. 하루 명상으로 시작했던 것이, 1박 2 일 프로그램에 참여했고, 점차적으로 늘려 2박 3일, 4박 5일에 참여했으며, 내가 참여했던 것 중 가장 긴 것은 7박 8일이었다.


명상 수련장에 들어가면 먼저 핸드폰을 카운터에 맡기고, 참여 기간 동안 핸드폰 사용 금지와 더불어 묵언 수행을 한다. 필요한 말은 수련장 앞에 놓여 있는 작은 메모지에 써서 소통을 했다. 수련자들끼리의 수다는 철저히 금지되어 있다. 수련장마다 조금씩 다른데, 어느 한 수련장은 한 방에 두 명이 썼다. 그 방에 둘만 있는 시간에도 묵언은 유지되었다. 참여 기간 내내 나의 호흡, 나의 감각과 마주하는 시간이 된다. 아침 5시에 기상해서 밤 9시까지 하루 종일 명상이다. 밥을 먹든 길을 걷든 모든 게 명상 모드이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반가부좌 자세로 있지 않다 보니 참가해서 이틀까지는 허리, 등이 아프고 다리에 저림을 느낀다. 그러한 불편한 감각들도 명상의 대상이 된다. 그 감각들에 동요되지 말고 관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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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法鼓山의 명상 수련 모습]

[사진: 法鼓山 제공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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