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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원 Oct 19. 2023

할머니가 원하는 세상

어른은 어른답고, 아이는 아이답고.

   그 이후로 희정은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도서관에 와서 책을 읽었어요. 서리가 늦게까지 있는 점점 추워지는 가을 날씨였지만 희정에게는 새로운 바람이 일 듯 시원한 날씨였지요. 가슴을 뻥 뚫어주는 새로운 일이 생긴 것이니까요. 희정에게는 도서관 가는 날이, ‘이제 나도 집 외에 마음 둘 곳, 갈 곳이 생겼어.’라는 마음으로 기쁨이 넘치는 날이 되었어요. 

   희정의 집에서 갈 때 도서관 정문으로 가면 되지만, 희정은 일부러 도서관 담장길을 더 걸어 후문 쪽으로 걸어갔어요. 백반집이 열었나 확인하기 위해서였지요. 백반집 문이 열렸는지 가게 안에 하얀 불이 켜져 있었어요. 희정은 집에서 타온 커피가 든 보온병을 들고 백반집 안으로 들어갔어요.  


    “어머니~ 안녕하세요. 혹시 커피 드셨어요?”

    “워메~ 이게 누군가? 그때 그 애기 엄마 아녀?”

    “네. 저 거의 매일 도서관에 와서 책 읽고 있어요.”

    “재미지쟈?”

    “네네. 뭔가 살아있는 느낌도 들고, 내가 대견한 느낌도 들고 그래요. 그렇다고 제 삶에 바뀐 건 하나도 없는데 말이에요.”


  가게 문 가장 가까운 테이블에 앉은 희정은 가방에서 보온병을 꺼내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종이컵에 옮겼어요. 향기로운 헤이즐럿 향이 가게 안을 금세 채웠어요.     


    “향기가 억수로 좋네잉.”

    “네. 제가 어머님과 같이 마시고 싶어서 집에서 가장 아끼는 커피 타 왔어요.”

    “고맙네. 나가 늙었어도 커피 맛은 좀 아네잉.”     


웃으며 할머니는 커피 한 모금을 마셨어요.     


    “아이고~ 꼬시고 맛나네. 커피가 쓴 맛이 한 개도 없네그랴. 참말로 꼬시네~.”

    “다행이네요. 입에 맞으셔서... 

     어머니~ 그때... 말이에요. 저에게 ‘억울하냐’고 물으셨지요? 제가 곰곰이 생각을 해보았어요. 나는 왜 그 말에 눈물이 나왔을까?..... 그런데 그 말이 맞았어요. 전 저의 결혼 생활 13년이 행복하지가 않았어요. 듬직한 남편도 있고, 착하고 예쁜 아이들도 있는데... 저는 행복하지가 않더라고요. 그냥 가화만사성이니... 나만 희생하면 남편도 편하고, 애들도 행복할 거라고 생각을 했었거든요.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나만 이렇게 나를 죽이며 살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는데 저 스스로 현모양처를 자처하면서 살았어요. 그런데 그 현모양처... 제가 원하던 건 결혼 생활은 아니었어요. 제 마음속 깊은 곳에서... 억울하다고 생각하고 살았었나 봐요.”

      “그라믄 어뜩케 살았으믄 좋겄다고 생각을 했는가?”

      “음.... 그러고 보니 딱히 생각했던 결혼 생활도 없었네요.”     


희정은 커피를 마시며 미소를 지었어요. 그렇게 말하는 희정의 얼굴은 조금은 편해 보였어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희정은 뭐라고 생각이 났다는 듯이 말을 이었어요.     


      “그냥 행복하게 살고 싶다... 이런 생각만 했었네요. 그런데 승진했다는 회사 동기 이야기를 전해 들으면 속상해 미치겠는 거예요. 그리고 맞벌이하며 돈을 모아 더 큰 집으로 이사했다는 친구 이야기 들으면 잠이 안 오고 그랬어요. 그리고 아이들 친구들이 뭐 잘한다, 무슨 학원 다닌다고 하면 그렇게 못해주는 제 처지가 너무 초라해 보이고, 남편에게도 미안하고 애들에게도 미안하고 그랬어요. 집에만 있는 무능력한 부인, 엄마 때문에 애들도, 남편도 고생하는 것 같아서요. 현모양처는 개뿔... 했지요 뭐.  저 못됐지요? 남들 잘 될 때 축하해 주면 그만인데...”

      “못되기는 뭣이가 못돼? 다 그라고 살제. 그랑께 옛말에 ‘사촌이 땅을 사믄 배가 아프다’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겠는가?  뿌담시 그런 말이 나왔을까? 사람이 원래 그러는 것이네. 나도 잘 되고, 남도 잘 되는 것이 가장 좋은디... 나는 그대로인 것 같은디 남은 잘 되어가는 것 같으믄 셈이 나는 것이 당연하제.”

      “감사해요.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요.”

      “위로하려고 하는 말 아니네. 다 그라고 맘 먹제. 겉으로는 안그런척 연기 하고 살제. 오히려 자네가 솔직해서 나는 좋네.”

      “그런데 요즘 책도 읽고, 재테크 공부도 조금씩 하면서 기분이 좋아요. 내가 나를 성장시키고 있는 것 같아서요. 그동안 남편과 애들만 챙기다가 나를 챙기는 것 같아서 너무 기분이 좋아요.”        


백반집 할머니는 들뜬 듯 이야기하는 희정의 모습을 보고 흐뭇한 표정으로 웃었어요. 희정의 모습에서 누군가의 모습이 보이기도 해서인지 희정의 그런 모습을 기억 속에 담아두고 싶어 오래도록 바라보았어요.   

   

      “나를 키우는 것만큼 재미있는 것도 없기는하대. 애 키우는 재미도 있지만, 애는 내가 아니라 내 맘대로 안되믄 속상할 때도 있고, 화가 날 때도 있지 않은가? 그란디... 이상하게 나를 키우는건 안그래. 재미져. 그라고 이라고 공부하는 에미를 보고 자란 아가들은 잘 크네. 암만! 두고 보소. 을매나 멋지게 잘 클지...”

      “그랬으면 좋겠는데...”  
       “그라고 애만 키운다고 너무 속상해도 마소. 믿을랑가 모르겄지만... 자네는 지금 기업채 3개를 키우고 있는거네. 자슥들한테 내 시간 쓰고, 내 몸 쓰고, 내 돈 쓰고, 내 맘 쓰는디 우째 아가들이 못되겄는가?”

       “네.” 

       “다... 적당한 시간이 있는 것이네. 지금 이라고 자슥들 키우고, 내 시간 뺏긴다고 평생을 그라고 살 것 같은가? 그 자슥들도 곧 떠나네. 난중에는 자슥들 붙잡고 있고 잡아도 못잡어. 지금 엄마 사랑 듬뿍 받고, 엄마 관심 안에서 크고, 엄마랑 같이 배우고 하믄서 엄청난 사람들로 크지 않겄는가? 지금은 자네가 그걸로 돈 벌고 있는거네. 자네가 부모이자, 선생이자, 친구 아닌가? 한 가지 역할만 하기에도 벅찬디... 자네는 지금 몇 가지를 하는가 보란만시. 그리고 막말로 자네가 제일 호강하고 있네그랴. 자슥들 크는 모습 다 지켜보고 사는 것이 을매나 큰 복인디...”          


희정은 할머니의 말을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였어요. 아이들 생각이 나면서 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지요. 아침에 야단을 치고 학교에 보냈던 것이 마음에 걸리기도 했고요.     


        “네. 맞는 말씀이세요.”

        “인생은 코 앞만 보믄 그것이 전부인냥 살게 되네. 우물 안 개구리라고 하지 않던가? 인생 참 기네. 넓고 길게 보고 인생길 걸어가야 하네. 그라니 배워야제. 죽을 때까지 배워야제. 내가 보니까 자네... 여간 똑똑한 것이 아니여. 잘 살겄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뜨거웠던 커피가 식어 마시기가 훨씬 수월해졌어요. 희정은 할머니의 종이컵에 따뜻한 커피를 더 따르며 말했어요.     


       “감사해요. 제가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까지 이야기해 주셨어요. 저 지금 책을 읽고 있거나, 강의를 듣고 있는 것 같아요.”

       “아이고~ 뭐라고 씨부러싼당가? 이 늙은이가 하는 얘기일 뿐인디... 뭐시가 그랴?”

       “명심할게요. 인생 길고, 그때마다 다른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것을요.”

       “그랴. 그라고 사람들이 다 다른거맹키로 다 다른 시간을 보내는 것 같어. 다 같은 시간을 사는 것 같아도 안그랴. 다 각자의 장소에서 각자의 시간을 보내는 것이여. 그러니 빠르고 느린 것도 없어. 얼매나 좋아. 나는 그냥 내 시간 보내믄서 내 속도대로 가믄 되니께. 그라니까 남을 부러워 할 필요도 없고, 억울하다고 생각할 필요도 없네. 근디말씨... 신기하게도 하나를 얻으면 하나는 잃는 건 다 똑같네.”

       “기회비용이네요?”

       “몰러. 나는 그런 어려운 말은... 어찌 되었간그랴. 내 상황에서 제일 나슨 놈으로 선택해서 사는 것이 인생 아니겄는가?”          


희정은 연신 고개를 끄덕거렸어요. 뭐라 더 더해서 할 얘기도, 뺄 얘기도 없다고 생각했어요. 어느 시점에 희정이 말을 해야 하는 것조차 생각하지 않게 되었어요. 울긋불긋 가을산을 힘겹게 정상에 올라 그곳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마을 아래를 바라보는 것처럼 뭔가 인생이라는 것이 보이는 것 같았어요. 희정은 할머니를 조용히 바라보았어요. 할머니의 눈이 붉게 물들어 있는 것을 보았지요. 코를 훌쩍이며 투박한 손으로 훔치는 것이 보였어요.      


     “어머니는 인생을 꿰뚫어 보고 계신 것 같아요. 저는 언제쯤 어머님처럼 될까요?”

     “나는 무식한 사람이라 몸으로 다 겪어봐야 아는디... 자네는 이라고 배울라고 하잖여. 그라니 나보다 훨씬 나슨 어른이 될 것이네. 멋진 어른이 되소. 부탁이네. 나이 많다고 다 어른 아니대. 어른다워야 어른이대. 어른이 많으믄 이 세상이 더 살만하지 않것는가?”     


할머니는 가게 앞 도서관 정원을 바라보았어요. 노랗고 붉게 물들어가는 정원을 보며 할머니는 혼잣말을 하듯 이어 말했어요.     


     “나야... 곧 죽어도 될 나이이니 상관없지만... 젊은이들이 사는 세상이 쪼매만 더 따뜻했으믄 좋겄네. 어른이 어른답고, 아그들이 아그들다우믄 이 세상에 웃음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겄제? 정치사...나랏님들이 한다고 하지만 그게 세상 전부든가? 세상은 우리 같은 작디작은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것이제.”     


도서관 앞 백반집 거리에 부는 가을바람에 은행잎이 춤추듯 날아가네요. 아무도 없는 것처럼 그렇게 춤추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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