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부모님 고향은 평안남도 성천군 통선면 하리다. 아버지는 평양에서 공부를 하고 은행을 다니다 전쟁이 터져 1.4후퇴 때 남쪽으로 내려왔고 이후에 참전도 하셨다. 나의 할아버지는 친척 일가를 모두 대동하고 남쪽으로 피난해 대동강을 건너고 김포를 지나 춘천에 이르렀다. 할아버지는 이 업적을 평생 자랑스러워하셨다. 이후로 내 고향은 춘천이 되었다. 어머니는 피난중 김포에서 큰형을 낳았고 이후로 큰형은 동네에서 이름대신 김포로 불렸다.
아버지는 어린시절 이북의 산천에서 고사리를 캐기도 했던 모양이다. 내가 초등학교 쯤 다닐 때였다. 하루는 아버지가
"운경아, 고사리 캐러 가자"
하고 내 손을 잡아 끌어 둘은야산에 올랐다. 내 기억에 어린 고사리는 완만한 경사의 산 중턱 곳곳에 올라 와 있었다. 다소곳이 고개숙인 고사리의 촉감이 좋았다. 살이 통통하게 오른 고사리대는 부드럽고 꺾기에도 힘들지 않았다. 고사리는 부드럽고 가시도 없어 한 줌 꺾어 움켜쥐기에도 안성맞춤 이었다. 산은 푸르고 저 멀리 농촌의 마을도 눈에 들어왔다. 아버지는 경치 좋은 곳에 걸터않아 담배를 한대 입에 물었다.
"담배는 왜 피워"
나는 담배맛을 전혀 몰랐다.
"응, 아버지가 먹는 과자다"
아버지가 훅하고 뿜은 담배연기가 봄날의 아지랭이와 같이 공중으로 흩어졌고 아버지는 잠시 고사리를 잊었다. 고향 생각을 하는 듯했다.
내게 고사리의 추억은 오래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와의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춘천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쌓인 호수와 강이 있는 아름다운 고장이다. 대룡산의 완만함은바닷가의 밀려오는 파도처럼 구릉을 이루며 춘천으로 산줄기를 뻗는다.
초지 위에 막 세상에 머리를 내민 고사리대와 아름다운 산야 그리고 아버지의 담배연기는 아직도 50년이 지난 지금에도 기억속에 새롭다.
Ⅰ고사리 돋는 언덕Ⅰ
산에 돋아나는 고사리는 <<시경>> <소남> 초충(草蟲)에 전한다. 시에서는 언제 돌아올지 기약없는 님을 기다리는 여인의 애절한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사랑하는 님이 보고 싶어 도저히 방 안에 틀어박혀 앉아 있을 수가 없어 여인은 고사리라도 뜯어보지만 이 일을 어찌할꼬 고사리라도 여인을 위로해 줄수 있으면 좋으련만. 사랑하는 님이 보고 싶어 밖으로 훌쩍 뛰어 나왔건만 봄 바람의 고사리 돋는 전원은 오히려 울적하기만 하다.
저 남산에 올라 고사리를 뜯습니다 / 님 보고 싶어 근심걱정 하는 마음 / 내 님 보고 내 님 만나면 / 이 내 마음 기쁘겠네
*초충:풀벌레
<<시경>> <소아> 사월(四月)의 회화성 짙은 고사리 돋는 봄의 언덕에서 시인은 오히려 울적한 마음을 달랠 길 없어 상심하고만다. 내 님 없는 아름다운 산야인들 시인에게는 다만 황무지요 광야일 뿐이다.
산에는 고사리와 고비 있고 / 들에는 구기자와 대추 있네 / 군자는 노래 불러서 / 슬픈 마음 말하고자 함이네
우리나라의 강강술래는 전라도 지방에서 전하는 민속놀이로 국가무형문화재 제 8호이며, 2009년 9월에는 유네스코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선정되었다. 강강술래의 놀이중 고사리꺽기 놀이는 악보에 가사가 곁들인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는 놀이로 어린이나 처녀들이 산에서 고사리를 꺾는 일을 표현한 놀이다.
본래 시경의 시도 악기로 연주를 하며 읊는 것이었으니 비록 시대는 달리 하였어도 고사리 채취의 풍습이 비슷한 것이 흥미롭다. 강강술래 놀이를 하며 춤을 추다 멋진 사나이라도 눈에 띄면 처녀의 가슴에 불이 당겨질수도 있으리라.
Ⅰ고사리의 서커스Ⅰ
어린시절에는 간혹 동네에 와서 판을 벌리는 서커스가 대단한 인기였다. 커다란 천막을 치고 안에서 벌이는 각종 묘기는 어린 나에게 있어서는 그야말로 지상 최대의 쇼였다. 공중에 그네를 양쪽에 걸치고 허공을 가로지르는 아슬아슬한 남녀의 쇼는 압도적이었다. 커다란 투명한 원통을 설치한 내부에서 오토바이와 자전거를 위 아래 자유자재로 타는 묘기에 갈채를 보내기도 했다.
나는 숲에 관심을 가진 이후에는 매일 서커스를 보는 듯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수목과 화초는 겨울눈을 만들어 봄이면 잎을 내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지극히 상식적이고 루틴적인 현상이지만하나하나의 과정은 수목의 몇 억년에 걸친 자기혁신과 진화의 결과다. 서커스단원의 고된 훈련끝에 다져진 기량과 같이 식물은 무려 3억년 이상의 준비를 마치고현재의 묘기를 부리는 것이다. 식물이 보여주는 계절마다 다른 변화무쌍한 모습은 인간이나 동물은 감히 흉내조차 낼 수 없는 하이테크 묘기이다.
고사리 뒷면에는 수많은 포자낭이 형성되어 포자를 안에 품고 있다(좌). 고사리의 새순이 돋아나고 있다 (우)
고사리가 보여주는 묘기는 실로 흥미진진하다. 고사리는 꽃을 피우는 현화식물이 아니다. 고사리는 번식을 위해 제 스스로 잎 뒷면에 규칙적으로 배열 된 여려개의 포자낭을 만들어 포자를 형성한다. 잎의 뒷면에는물자라가 등에 수많은 알을 지고 다니듯 포자를 싸고 있는 포자낭이 잎에 잔뜩 붙어있다. 실로 신비롭고 경이로운 고사리의 서커스와도 같은 진기한 묘기를 보는 듯하다. 어두운 음지에 난 고사리의 눈에 보이지도 않는 포자를 품은 포자낭에서도 무한한 우주의 기운이 꿈틀대고 있다고 생각하니 오싹한 기분마저 든다.
지구도 우주의 한부분이므로 지구서커스는 곧 우주서커스다. 고사리는 이 포자낭을 만들어 번식에 이용하기 위해 무려 2억년 동안 기술을 연마했다. 우리 인류의 역사가 얼마나 되는가 가늠해 볼 때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각 포자낭의 수많은 포자들은 적절한 시기에 터져 포자를 땅에 떨어뜨려 하트 모양의 전엽체*가 된 후 이 전엽체의 장정기*와 장난기*에서 만들어진 정자가 난자로 헤엄을 쳐 수정한다. 고사리의 정자는 타고난 단거리 수영선수인 것이다.
우리 주변의 수목이나 화초의 잎과 뿌리 그리고 꽃과 열매는 모두 지상에서 벌어지는 서커스다. 수목은 제 몸에 잎을 만드는 혁신을 했으며 몸을 키우기 위한 관다발조직을 개발하였고 종족 보존을 위한 씨앗을 만들기 까지 꽃을 피우고 곤충을 유혹하는 다양한 방법을 고안했다. 자연은 진기한 묘기를 부리는 발명가이며 나는 매일 우주서커스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