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봄이면 퍼즐 같은 씀바귀며 고들빼기에 가시상추, 그리고 뽀리뱅이를 구분하랴 머릿속이 복잡하다. 들에 핀 잡초네 하며 신경을 끄면 그만일 텐데 살랑대는 가지에 앙큼하게 피는 노란 꽃은 들판을 물들이며 시선을 잡아끈다.
이때쯤이면 지칭개와 엉겅퀴도 빨강과 보랏빛으로 합세하여 각각 대지의 캔버스에 자리를 잡는다. 봄을 알리는 들판의 잡초라 이름들도 개똥이며 쇠똥이네 하듯이 대충대충 얽어서 지어 붙인듯한 이름들이다. 쓰다고 해서 씀바귀이고 쓴귀물, 싸랑부리, 쓴나물, 싸랭이라고도 불린다고하니 씀바귀로서는 성의 없이 막 던져진 이름을 몇 개씩이나 달고 있는 것이다.
피를 얽히게 한다 하여 엉겅퀴요, 짓찧어 사용하고 으깨어 바르는 풀이라 지칭개라고 한다. 고씨 형제 두 명에 백씨와 이씨가 발견한 풀이라 '고둘백이'에서 ‘고들빼기’가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까지 있는 것을 보면 한결같이 마당쇠 같은 이름들이다.
마당쇠 같은 꽃들은 이름대로 정해진 자리 없이 여기저기 피어난다. 들판에 논두렁에 물가에 그리고 아파트의 화단에 심지어 보도블록의 좁은 틈새에 그리고 바위틈조차 마다하지 않고 피어난다. 막 피어난 들판의 씀바귀를 가만히 들여다 보면 주근깨를 콧잔등에 잔뜩 머금은 순박하고 아름다운 소녀를 보는 듯하다. 그러고 보면 씀바귀라는 이름은 지극히 토속적이고 들으면 들을수록 정다운 이름으로 다가온다. 씀바귀, 보리뺑이, 고들빼기를 뇌까리다 보면 어느덧 친근하게 다가오는 어감에 길가에 핀 꽃들을 도저히 외면할 수 없는 것이다.
노랗고 자주빛으로 피어나는 들판의 꽃들은 소중한 물건을 한참 동안 잃어버린 후 되찿는 기쁨처럼 혹시 잊고 있던 우리 꽃의 아름다움을 재발견 하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쓰다고 하는 고(苦)는 씀바귀를 위해서 생겨난 한자라고 한다. 옛 시에 '엿 뱉고 씀바귀 먹지 않는다'고 했다. 다만 시경의 씀바귀는 쓴 것이 오히려 달수도 있다는 씨름판의 뒤집기와도 같은 언어의 곡예를 보여준다.
《시경》 〈대아> 면(綿)의 한 구절은 비록 씀바귀가 쓰지만 주나라 문왕의 치적에 감복한 백성들은 씀바귀조차 달다고 강변한다.
주땅의 벌판은 매우 기름져서/ 쓴 나물 씀바귀도 꿀맛 같아라
*면:주렁주렁 달린 오이
《시경》 <패풍> 곡풍(谷風)에서는 씀바귀의 쓴맛은 버림받은 자신의 처지에 비하면 오히려 달다고 노래한다. 쓰고 단것은 일견 명확해 보이는 것 같아도 자로 재듯 판별할 수 없음이라. 주어진 상황과 각자의 경험에 따라서 쓸 수도 있고 달수도 있으니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닌 것이다.
누가 씀바귀가 쓰다고 했나/ 그 맛이 냉이처럼 달기만 하구나
*곡풍:산골바람
Ⅰ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Ⅰ
*마음먹기에 달려 있음
김주영은 그의 작품 《홍어》에서 겨울에 하얀 눈을 뒤집어쓰고도 파릇파릇한 잎을 간직한 '씀바귀의 꿋꿋함'을 표현하였다. 수필가 윤오영은 <씀바귀 맛>에서 당대의 시인 두보는 "만인의 고를 대신 노래하며 인생을 새로이 창조해 나갔다"라고 하며 "苦에 살고 苦를 소재로 苦로 엮은 그 苦의 시가 얼마나 아름다운가"라고 하였다. 두보의 시를 읽다 보면 모든 인생고가 그 시의 아름다움에 해소된다는 것이다.
광활한 우주에서 어디까지 길고 어디까지 짧은 가에 대한 논의는 의미가 없다. 달고 쓴 것조차 어디까지 쓰고 어디까지 단것인가. 오로지 사람의 마음에 있는 것이 아닐까?
나는 씀바귀와 고들빼기의 쓰디 단 그 맛을 지극히 좋아한다. 고진감래의 맛이라고 할 수 있을까? 노동 다음에 꿀 같은 휴식 있듯이 씀바귀의 강한 쓴 맛 후에는 달콤한 맛이 혀끝에 전해지는 전율을 느껴보는 것이다. 내가 시경에 눈이 깜깜하고, 두보의 시에 막막하더라도 씀바귀의 쓴맛을 단맛으로 느끼는 것은 오로지 혀끝의 맛을 오래 유지할 수 있게 하는 씀바귀의 덕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