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새벽 4시를 여는 여자

운동 / 러닝 이야기

by 마라토너 거북 맘
"내일 또 새벽에 나가야 하니까, 오늘은 일찍 자야 되지?"


이젠 내게 너무도 자연스럽고 당연해진 토요일 새벽 스케줄인데도

남편은 금요일 밤마다 늘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재차 확인하곤 한다.


"내일 새벽에 비 온다는데... "

"이번 주에 애들 때문에 많이 힘들었을 텐데 어지간하면 무리하지 말고 그냥 쉬지 그래."

"새벽에 혼자 그렇게 나가면 위험할 텐데 참..."


아무래도 남편에겐, 새벽 5시나 6시쯤도 아니고

귀신들이나 돌아다닐 것 같은 새벽 4시에 겁도 없이

여자 혼자서 도로를 달리는 게 영 마음에 걸리고 걱정되는 게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열대 지방답게 아침 7시면 이미 해가 중천에 떠서 이글거리는지라

2시간 이상의 장거리 러닝을 하려면

이른 새벽 시간이나 아니면 해가 지고 난 이후여야 그나마 덜 힘들게 달릴 수 있기에

일주일 중, 아이들의 스케줄이 가장 한가한 매주 토요일 새벽에

꾸준히 나 홀로 장거리 러닝 훈련을 해오고 있다.


매주 토요일 새벽 4시부터 아침 7시 정도... 거의 3시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때로는 LSD (long slow distance) 훈련을 하기도 하고

21.1km의 하프 마라톤 거리를 뛸 때도 있으며

가끔은 Hill training이라고, 제법 가파른 언덕이나 낮은 산등성이를 달릴 때도 있다.


사실, 이렇게 장거리를 달릴 수 있게 된 건 불과 1년 남짓한 시간밖에 안됐다.

10km 러닝 정도가 딱 내 체력에 맞고 적당한 수준이라는 걸 알지만

사람 심리가 말 타면 종 두고 싶어 진다고, 자꾸만 더 멀리 오래 달리고 싶은 욕심에

나의 한계에 도전해 보고 싶은 마음이 솟구치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새벽 4시부터 달리기 위해 3시 20분 정도에 기상하는 나는,

밤손님처럼 부스럭 부스럭 이것저것 뒤져가며 고강도 훈련을 위한 준비물들을 꼼꼼히 챙긴다.

Hydration vest라고 불리는 급수 조끼에 여유 있게 물과 에너지 젤도 챙겨 넣고

안전한 어둠 속 러닝을 위해 반짝거리는 러닝 라이트도 달고

GPS 손목시계와 핸드폰, 그리고 이어폰 까지...

마치 소풍 가는 아이처럼 늘 설레는 마음으로 토요일 새벽 나들이를 준비한다.



내일은 기다리던 토요일이다.

오랜만에 언덕 훈련을 계획 중인 나는

사이판의 유명한 관광 명소들 중 하나인 Suicide cliff에 가려고 한다.


예전 같으면 하루 종일 관광객들을 실은 차량들이 오르락내리락했을 테지만

요즘은 시국이 시국인지라, 너무도 고요하고 한적한 곳이 되어 버렸다.


이곳은 2차 세계 대전의 끝자락인 1944년 6월에서 7월에 걸쳐 벌어진 사이판 전투에서

미군에게 참패한 일본군이 집단으로 자결한 곳이기도 하다.

그 밖에도 2차 세계 대전의 흔적들이 섬 곳곳에 많이 남아 있는 사이판은

역사적이고 비극적인 수많은 이야기들을 조용히 품고 있다.

일본군들이 몸을 숨기고 대포를 쏘던 바위의 구멍들과 포탄 자국들


Max elevation이 785ft 정도 되는, 제법 가파르고 끝없이 굽이굽이 올라가야 하는 코스인 이곳은

아름다운 주변 경치와는 대조적으로

여기서 훈련을 한번 하고 나면, 숨이 꼴깍 넘어갈 만큼 아주 고되고 힘들다.


하지만 정상에 도달했을 때의 짜릿한 쾌감과

섬 전체가 시원하게 내려다보이는 평화로운 사이판의 풍경,

너 오늘 참 잘 해냈다고 칭찬이라도 하듯,

땀으로 범벅이 된 나의 얼굴을 어루만져주는 시원한 새벽바람이

일주일 동안 쌓였던 모든 스트레스와 불만과 뒤틀린 생각들을 한 번에 날려버림을 느낀다.


언덕을 오르며 달릴 땐

마치 뒤에서 누가 나를 잡아당기는 듯, 걸음걸음마다 무겁고 힘들지만

내려오는 길은 룰루랄라 여유 있고, 가만히 서 있어도 그냥 저절로 가는 듯 수월하다.


'그래, 인생 뭐 있어.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도 있고 그런 거지 뭐.'

혼자서 이런저런 잡생각들도 해가며 새벽의 여유를 만끽하는 그 순간은

내게 너무도 귀하고 소중한 시간이다.

내려오는 길은 언제나 나에게 콧노래를 흥얼거리게 한다.

몇 시간 후에는, 새벽 4시의 어둡고 습한 공기를 홀로 가르며 달리는 아줌마 한 명이

산의 중턱쯤을 헉헉 거리며 오르고 있을 것이다.

오늘은 멋진 일출도 느긋하게 감상해 보련다.

예고 없이 내리는 비를 만날지도 모르지만

이미 나에게 그런 일은 익숙하고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실, 가만히 둘러보면 우리 인생에서

갑자기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확 꺼져 버릴 만큼 크고 엄청난 문제들을 만나고 겪게 되는 상황은

생각보다 그리 많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언제부턴가 조금도 화를 참지 못하고 분노하게 되었고,

알고 보면 그다지 심각하지 않은 문제에 절망하고 비관하며

약간의 여유와 미소도 없이 무미건조하고 삭막하게 살아가는데 익숙해져 있는 듯하다.


나 역시 그런 사람들 중 한 명이긴 하지만

새벽 4시의 제법 고된, 나 홀로 나들이가 나를 점점 바꾸고 있음을 느끼는 요즘이다.


경험해 본 사람은 이해할 것이다.

극한의 육체적 고통이나 한계 상황 앞에서는

아무리 심각한 번뇌나 고민, 걱정들도 그저 가벼운 투정이나 잡념에 불과하다는 것을...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호흡은 성난 짐승의 그것처럼 거칠어지며,

다리는 이미 내 것이 아닌 듯 아무 감각이 없고

땀인지 뭔지 모를 것이 몇 번에 걸쳐 온 몸을 적셨다 말랐다를 반복하는 상황이 되면,

이미 머릿속엔 아무 생각이 없어지고 그저 본능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어서 빨리 이 고된 여정을 끝내고 시원한 스무디나 한 잔 마셔야겠다, 아니면 오늘은 머리가 찌르르할 정도로 차가운 아이스커피를 마실까?'

우습지만 내 경우는, 2~3 시간 동안의 러닝 중

중반 이후부터는 계속 저런 생각만 하면서 달린다.

분명히 뛰기 시작하기 전엔 뭔가 마음이 무척 심란했었고 무거웠었던 것 같은데 말이다.


외롭고 힘든 훈련을 끝낸 장하고 기특한 나 자신을 위해

오늘은 어떤 보상을 해줄까...

행복한 고민을 하며 집을 나서 보련다.

새벽 훈련은 역시 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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