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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라토너 거북 맘 Apr 19. 2022

뛰어야 사는 여자

거북 맘의 마라톤 이야기

"영 소화가 안 돼? 어제 삼겹살 먹은 게  말썽인가 보네."


"애들이랑 또 한판 했구먼, 이번엔 무슨 일이야?"


"왜 그렇게 기운 없이 축 쳐져있어, 어디 안 좋아?"


"어젯밤에도 한숨도 못 잔 거야? 왜 그렇게 잠을 못 자지?"


생일이 지났으니 이제 짤 없이 방년 49세가 된...

아니지, 한국도 이제 만 나이를 쓰기로 했다니

아직은 48세인 1974년생 범띠 아줌마에게


갱년기 증상인지 화병이나 우울증인지 노화현상인지...

아니면 그 모든 것들이 믹스된 종합 선물세트 같은 것들인지 뭔지 모를 것들이

부지불식 중에, 혹은 습관처럼 내게 찾아와 힘들게 할 때마다

19년 차 옆 지기인 남편은 명쾌한 처방을 내려준다.


"밖에 나가서 뛰고 와, 우리 마나님... 달려야 할 시간인가 보네."


그렇다.

뜀박질은 내게

최고의 소화제이자 항 우울증 약이고

6년근 홍삼이나 죽은 사람도 살린다는 산삼보다

더 효과적인 보약이며 원기회복을 위한 자양강장제인 것이다.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살기 위해 뛰는 건지, 아니면 뛰기 위해 사는 건지 가끔씩 헷갈리기는 하지만

아무튼 달려야 사는 아줌마임은 확실한 것 같다.



2주 전에 열렸던 하프 마라톤 대회는 내 생애 첫 오프라인 하프 마라톤 경기였다.

난데없는 팬데믹 상황으로 2년 만에 열리는 사이판 마라톤 대회.

2년 전에는 처녀 출전으로 10킬로 레이스에 참가했었다.

그 후로 2년 만에 열리는 이번 대회는

풀코스 마라톤은 생략된 5킬로와 10킬로, 그리고 하프 마라톤 경주만 있는

조금은 규모가 축소된 행사였다.

첫 오프라인 하프 마라톤 참가


제대로 된 러닝에 갓 입문한, 마라톤의 매력을 이제 막 알게 된 시기였던 2020년.

그 해 3월에 첫 출전했던 사이판 마라톤 이후에

일제히 셧다운이 된 각종 오프라인 대회들.


그전까지는 그저 슬렁슬렁 조깅 수준의 나 홀로 뜀박질을 해왔던 나는

대회 참가의 짜릿한 맛을 한번 본 후, 자꾸 도전하고 싶은 욕심과 갈증이 생겼다.

나 같은 사람들이 워낙에 많았던지

급기야 크고 작은 온라인상의 각종 버츄얼 마라톤 대회들이 급부상하기 시작했고

2020년 후반부터 2021년 작년 한 해 동안

정말 원도 한도 없이 다양한 레이스에 도전해 볼 수 있었다.


비록 여러 사람과 함께 호흡하며 경쟁하는 레이스는 아니었지만

혼자 트랙을 수십 바퀴 돌면서

때로는 깜깜한 새벽에 해안도로를 따라 헉헉 거리며 나 홀로 하프 마라톤을 면서

수많은 희열과 성취감과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다.

각각의 레이스를 완주하고 난 후 내게 도착한 눈부신 메달들은

우리 집 거실의 가장 높은 곳에 자랑스럽게 걸린 채

내 가슴속을 환하게 밝혀주며 여전히 빛나고 있다.

포기하지 마!



그러다가 작년 이맘때쯤, 사이판 러닝 동호회인 Run Saipan에 가입해서 멤버가 됐고

한 달에 많게는 세 번, 평균 두 번 이상의 다양한 경기에 참여하면서

개인 기록도 점점 향상되고 더불어 체력도 강해지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 같이 함께 뛰는 즐거움과 재미를 알게 된 것이 가장 큰 수확이라고 할 수 있겠다.


평소, 주변 사람들이나 이웃들과 교류하며

자주 왕래하거나 사교적인 활동을 하지 않고 지내던 내가

유일하게 러닝 이벤트에는 꼬박꼬박 참여하면서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고 가까워지게 된 것은

사십 대 후반, 해외의 작은 섬에 사는 까칠하고 괴팍한 아줌마의 생활을 많이 바꿔놓았다.


그 시점쯤이었을 것이다.

두 거북이들로 인해 받는 스트레스나 그 밖의 분노와 짜증 유발 상황들에 대해

예전보다 관대해지고 낙관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

의학적으로도 이미 검증이 된 효과라고는 하지만

러닝이 주는 수많은 장점들 중

우울증 치료와 스트레스 해소, 마음의 안정과 평화라는

직접적인 치료 효과를 몸소 체험하고 보니

이제 일주일에 서너 번 이상의 러닝이 있지 않고서는

제대로 일상생활을 하고 있지 않은 듯한 불안감과 불편함까지 생기게 되었을 정도이다.


지난주 토요일에는 경기일정이 없었고

그럴 땐 어김없이 나 홀로 훈련을 즐긴다.

때로는 언덕주 훈련을 위해

깜깜한 새벽에 홀로 가파른 언덕이나 산길을 뛰기도 하고

가끔은 도로를 따라 달리며 장거리 훈련을 하기도 한다.


갱년기 증상인 건지,

안 그래도 원체 깊은 숙면을 하지 못하는 예민하고 잠귀 밝은 내가

요새는 도통 밤에 잠을 잘 못 이룬다.

아무리 일찍 자리에 누워서 조금이라도 자보려고 별짓을 다해도

야속한 시간은 그냥 훌쩍 지나가버리고 만다.

특히나 다음날 새벽에 마라톤이나 경기가 있는데 잠을 자지 못할 때는

정말 미치고 팔짝 뛰게 환장할 노릇이다.


거의 한숨도 못 자거나 겨우 한 시간 정도 자고 일어나서

하프 마라톤을 뛰어야 한다고 생각해보라.

정말 울고 싶다 못해 수면제 한알이나 독한 술 한잔이 간절해질 정도이다.

물론, 경기에 지장을 줄 것이 뻔하니 실제로 그런 시도는 절대 할 수 없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런 지독한 불면증 마저도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래서 이젠 설령 잠을 전혀 자지 못했다고 해도

묵묵히 일어나서 달리러 나갈 준비를 한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고 당연히 힘들긴 하지만

어느 정도 익숙해진 요즘의 생활패턴이다.


무겁고 어두운 암막커튼 같은 깜깜한 새벽하늘이

점점 붉어지며 어스름하게 열릴 때쯤이면

어느새 내 머릿속과 마음도 밝아지고 가벼워짐을 느낀다.

'그래, 이 맛이지!'

새벽어둠을 뚫고 산길을 달리는 맛이란!



2주 전의 하프 마라톤 대회는 내게 참 힘든 대회였다.

피니쉬 라인으로 들어서는 사진 속 내 얼굴 표정이 그날의 모든 걸 설명해 주고 있다.

이건 뭐... 얼굴로 마라톤을 뛰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표정만 보면, 42.195 킬로미터 완주자의 그것과 진배없다.

힘들었지만 많이 배우고 즐거웠던 대회.


이번 주말과 다음 주말에도, 2주 연속으로 대회 스케줄이 잡혀있다.

대회를 위해 나는 늘 그렇듯이

새벽 이른 시간이나 해질 무렵에 부지런히 러닝 연습을 하고

러너에게 필요한 영양 섭취와 식단관리에 신경을 쓰면서 나 자신을 돌보며 아끼고 있다.


그렇다.

나는 뛰어야 사는 아줌마이다.

전형적인 소음인 체질 탓인지, 툭하면 체하는 저질 소화력을 가졌지만

밖에 나가서 한바탕 달리고 들어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 식욕까지 돌아오곤 한다.


이유 없이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단전으로부터 심상치 않은 화의 기운이 올라올 때도

땀을 한 양동이 흘리며 뛰고 나면

머릿속이 개운해지면서 세상 모든 걸 용서할 수 있을듯한 관대함과 너그러움이 샘솟는 걸 느낀다.


뛰어야 사는 거북 맘.

좀 더 행복하게 살기 위해 달리는 거북 맘.

나의 달리기에는 이유가 있다.


그 이유가

제법 타당하고 근거 있지 않은가?

누구, 저와 함께 이유 있는 달리기에 동참하실 분?

얼굴로 뛰는 거북 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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