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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라토너 거북 맘 Oct 24. 2022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김여사 2

거북 맘의 미국 여행기 14화 (1인칭 김여사 시점)


"엄마!"

"나한테 한인 택시 기사님 연락처 있으니까 너무 걱정 마시고..."

"내가 항상 카톡 하고 전화할게."

"무슨 일 있으면 시간 상관없이 언제든 연락하시고..."

"이번 기회에 몸도 마음도 여유 있게 푹 쉬신다 생각하고

마음 편하게 맛난 거 사 드시면서 힐링타임을 가지셔."


나만큼이나 심란하고 불안했을까.

시애틀 공항으로 떠나야 할 큰 딸내미가

당최 내 손을 놓지 못하고 폭풍 잔소리를 한다.


큰 딸내미 뒤로 보이는 우리 큰 사위의 표정 역시 심란하고 걱정 가득해 보인다.

그런 딸내미 내외를 보며 애써 태연한 척, 귀찮은 듯 손을 저으며 말했다.

"아, 내가 무슨 젖 먹는 어린애냐?"

"나도 다 알아서 잘할 수 있으니까 걱정 말고 얼른 출발해!"


이른 새벽,

잠에서 덜 깬 두 손녀들을 꼭 끌어안아주고

발길을 떼지 못하는 큰 딸내미와 사위의 등을 떠밀며

그렇게 아쉬운 작별 인사를 한 후 녀석들을 공항으로 떠나보냈다.


드디어 나 혼자다.


종종, 이 꼴 저 꼴 안 보고 조용히 나 혼자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조용한 시골은 어떨까, 아니면 인적이 드문 조그만 사찰은 어떨까...


자식들이 버젓이 있는 엄마가 독거노인도 아닌데

왜 혼자 살 생각을 하시냐고

눈을 까뒤집고 펄쩍 뛰며 거품을 무는 딸내미들 덕분에

내 바람이 현실로 이루어질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그냥 혼자이고 싶을 때가 종종 있었다.


그래도 이런 경우는 미처 예상치 못했다.

얼떨결에 혼자가 된 지금 이 상황...

아는 사람도 없고, 말도 안 통하고, 어디가 어딘지 모르는 낯선 곳에서...


돈 아끼지 말고 먹고 싶은 거 먹고, 사고 싶은 거 사라고

딸내미가 신신당부하며 두둑하게 현금까지 놓고 갔지만

혹여 이 돈 냄새 맡고 도둑놈이라도 오는 게 아닐까...

노인네 혼자라고 우습게 보고 누군가 갑자기 해코지라도 하지 않을까...

별의별 불안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힌다.


그나저나 몇 년 전에 큰 딸내미와 함께 갔던

캘리포니아인지 엘에이인지 그 동네는 날씨가 참 좋았었는데...

이 눔의 시애틀은 6월인데도 어찌 이리 춥고 으슬으슬한지...


심란한 내 마음처럼

차가운 바람에 나뭇잎이 이리저리 나뒹군다.

나 홀로 시애틀 첫날이 그렇게 밝아오고 있었다.



딸내미가 떠나기 전, 한인 마트에 들러 이것저것 잔뜩 쇼핑을 해왔다.

"아니, 내가 여기 몇 달을 있을 것도 아닌데 뭐하러 이렇게 많이 샀어!"


이건 뭐 비상식량 사재기도 아니고...

빵에 떡에 우유랑 요구르트, 과일, 견과류까지...

이걸 언제 다 먹나 싶게 왕창 사다 놓고 갔다.


내가 묵고 있는 모텔 주변엔 다행히도 한인 업소들이 제법 모여있다.

한인 여행사, 식당, 사우나, 미용실...

그리고 길 건너엔 대형 한인 마켓까지 있다.

어련히 알아서 이곳으로 숙소를 정했을라고... 우리 큰 딸이랑 사위가...


딸내미 내외가 떠난 후, 한 이삼일 동안은 불안하기도 하고 겁도 났었지만

이젠 조금씩 적응이 되는지

한결 마음이 놓이고 점점 나아지고 있는 듯하다.

이런 내 마음을 알았는지, 오늘은 웬일로 날씨가 화창한 것이 햇살마저 제법 따뜻한 것 같다.


용기백배하여, 딸내미가 준 현금을 꽁꽁 싸서 가슴에 품고

길 건너 한인 마트에 들러 이것저것 구경도 하고 둘러본 후

기침약과 간단한 먹거리를 사들고 숙소로 돌아왔다.


내가 조금만 더 젊고 건강했더라면...

다리라도 멀쩡해서 걷는데 힘들지만 않았더라면

좀 더 씩씩하게 이곳저곳 돌아다녔을는지도 모르지만...

이젠 사소한 모든 것들이 참 두렵고 자신 없어진 지가 오래인 듯하다.


심지어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그 좋아하던 쇼핑이나 구경을 하는 것도...

때로는 밥 먹고 숨 쉬는 일상조차도

웬일인지 귀찮고 힘겹다 못해 버겁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서글프고 또 서글프다.



"아니, 너는 잠도 없냐? 지금 거기 새벽시간 아니냐?"

"에미 감시하냐? 걱정마라, 잘하고 있으니..."


시애틀 시간 아침 일곱 시.

슬슬 일어나 아래층 식당에 가서 조식도 먹고 커피 한잔 하는 시간.

눈을 뜨자마자 사이판에 있는 큰 딸내미의 전화가 빗발친다.

거긴 아직 한참 새벽 시간일 텐데...


일어났는지, 조식은 먹었는지, 별일 없는지, 오늘은 뭐할 건지...

아침에 눈 뜨기가 무섭게 카톡 보내고 통화를 시작해서는

잠들기 전까지 수시로 연락하고 잘 있는지 확인하고 체크한다.


우리 큰 딸내미... 엄마가 네 마음은 잘 안다만

에미가 무슨 한 두 살 먹은 어린 아기냐?

이제는 마치 모녀간의 위치가 바뀐 듯

나를 물가에 내놓은 어린애 취급을 하며 늘 잔소리하고 걱정하는 우리 딸내미들...

세월이 그렇게나 흘렀나 보다.

자식들은 어느새 저리 든든하게 훌쩍 자라서 내 울타리이자 보호자가 되어주고

나는 이리 힘없이 초라하게 쪼그라들며 늙어가고...


남편복 없는 년은 자식복도 없다고들 하지만

그래도 하늘이 긍휼히 여기셨는지

내가 그래도 자식복은 좀 있는 편인 것 같다.


고맙고 또 고맙고, 감사하고 또 감사한 일이다.

내 진심은 늘 이럴진대

왜 내 말뽄새는 마음과 달리 자꾸 청개구리처럼 반대로 나오는지...

하지만 사랑하는 내 딸들아!

엄마가 비록,

종종 신세 한탄하고 맥 빠지는 소리 하면서 너희들을 실망시키기도 하지만

항상 너희들에게 고맙고 감사하단다.


갑자기 서러운 마음에 눈물이 핑 돌며 울컥한다.

빨리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만이 간절한

시애틀에서의 하루가 또 이렇게 지나가고 있다.



초코파이, 후렌치 파이, 애플파이, 빅파이...

뭐 이런 건 많이 들어봤고 잘 알지만...

당최 그놈의 와이파이는 얼핏 들어보긴 했어도

사실, 무엇에 쓰이는 건지 자세히 알지는 못했다.


굳이 알아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고나 할까.

지하철이든 남대문 시장이든

언제 어디서든 딸내미들과 카톡 하고 전화하는데

아무런 불편이 없었던 한국에서는

와이파이가 뭔지, 패스워드를 어떻게 입력하는지

신경 쓰고 걱정해야 할 일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하필

나 홀로 시애틀에서 와이파이의 위력을 제대로 실감하게 되다니...


어떻게 된 일인지, 내가 묵고 있는 숙소에서는

매일같이 와이파이의 비밀번호를 바꾸는 바람에

아침이면 새로운 번호를 입력해야만 한단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둘째 딸내미가 6년 전에 사 준 핸드폰은 그저 전화를 걸고 받는데만 쓰거나

간혹 카톡이나 간단하게 주고받을 뿐

그 외에 자잘한 기능들은 나와는 상관없는 것들이었다.

심지어 문자를 영어에서 한국어로 바꾸는 것도

사진이나 동영상 촬영을 하는 지극히 간단하고 쉬운 일들도

내게는 무척 서툴고 힘들었던 게 사실이다.


전날까지 딸내미들이랑 카톡도 하고 전화 통화도 하다가

아침만 되면 연락이 잘 안 되니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냐며, 왜 와이파이 연결이 안 되는 거냐고

방방 뛰며 걱정하고 채근하는 큰 딸내미보다...

이역만리 떨어진 타국에서 홀로

자식들과 연락까지 끊긴 채 국제 미아가 되는 건 아닌가...

오히려 내가 더 겁이 나고 불안했다.


프론 데스크에 가서 핸드폰을 보여주며 열심히 손짓 발짓을 해도

그이들도 나도 답답한 건 서로 마찬가지였고

어쩌다 보이는 한국 여행객들에게 도와달라고 부탁을 해도

너무 오래된 핸드폰이라 그런지

몇 번 시도해 보다가 다들 미안해하며 고개를 흔든다.


이럴 줄 알았으면,

둘째 딸내미 내외가 새 핸드폰으로 바꾸자고 난리 칠 때

못 이기는 척 그러마 하고 말을 들을 것을

괜히 골치 아프고 귀찮을 것 같아 고집을 피웠던 게 후회스럽기만 하다.


아무튼 그놈의 와이파이 덕분에

숙소 근처의 한국 여행사와 식당, 미용실 사람들에게까지

적지 않은 신세를 지고 도움을 받게 됐다.


처음엔 이 나이에 홀로 모텔에서 묵고 있는 나를 보고 

신종 고려장의 주인공처럼 버려진 노인네인 줄 알고 놀라던 그들이

내 사연을 듣고는 모두 어찌나 친절하게 적극적으로 도와주던지...

참으로 미안스럽고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엄마! 요새는 엄마보다 훨씬 더 나이 많은 양반들도

핸드폰으로 별거 다하고 이것저것 배우러 다니고 난리야."

"한국에 다시 돌아가시면, 이제 좀 예전과는 다르게 생활해 보셔."

"맨날 세상 다 산 양반처럼 우울하게 집이랑 시장만 왔다 갔다 하지 마시고

사람들도 만나시고 이것저것 새로운 거 배우기도 하시라고요!"


큰 딸내미가 전화로 일장 연설을 한다.

희한하게

큰 딸년이 저렇게 지롤을 할 때면

은근히 무섭고 가슴이 철렁한다.

'그래, 알았다... 나도 이번에 느끼고 깨달은 바가 크다.'

'이제 잔소리 고마해라...'




그렇게 까마득해 보이던 출국 날짜가

드디어 이틀 앞으로 다가왔다.

시간은 어떻게든 꾸역꾸역 흘러가는구나.


시애틀에서의 마지막을 잘 마무리하라고

큰 딸내미가 한인 택시 기사님에게 일일 가이드를 부탁하고 갔다.

시애틀 관광도 할 겸 드라이브도 하면서 바람도 좀 쏘이라고...


아침부터 잽싸게 준비하고 로비에서 기사님을 기다렸다.

단체 관광인지, 로비에 한 무리의 한국 영감들이 모여있었다.

시애틀에 사는 영감들이라던데,

자기들은 오늘 출발하는 크루즈 여행을 위해 모였단다.

내 사연을 듣더니, 나보고 어찌 혼자서 그리 오랫동안 있을 수 있었느냐며 

대단하다고 추켜 세운다.


그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던 중

기사님이 차를 주차하고 로비에 들어서는 게 보인다.


사실, 약간의 폐쇄 공포증 비슷한 게 있는 나는

갑갑하고 꽉 막힌 공간이 싫어서 극장도 잘 찾지 않는다.

그런데 하물며, 마음대로 여기저기 갈 수도 없는 상황에서

거의 모텔 방에서 홀로 보내야만 했던 시간들이

내게는 참 많이 답답하고 힘들었던 게 사실이다.


기사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드라이브를 하다 보니

조금씩 긴장도 풀리고 답답했던 가슴이 뚫리는 것 같았다.


시애틀 시내 전체를 볼 수 있고

최고의 포토존이 있다는 곳으로 안내하겠다며

기사님이 작은 부둣가로 차를 몰았다.


사람도 자동차도 같이 탈 수 있는 작은 훼리호에 올라

바로 건너편에 보이는 작은 섬으로 출발했다.

제대로 된 가이드 역할을 위해 작정하고 준비해 온 듯

그럴듯한 카메라까지 챙겨 오신 기사님 덕분에

멋진 인생 샷도 여러 장 찍었다.

큰 딸내미가 보더니 무척 기뻐하며 너무 잘했다고,

엄마가 다녀온 곳은 이번에 우리도 못 가본 곳이라며 좋아해 줬다.


기사님과 맛있는 점심도 하고 차도 한잔 마신 후

간단한 쇼핑까지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

드디어 내일 아침이면 시애틀을 떠난다는 생각에 감개가 무량했다.



일찌감치 짐을 싸고 아침까지 든든하게 먹고 난 후

이제나 저제나 기사님이 로비에 들어서기만을 기다렸다.


드디어 반가운 기사님 얼굴이 보인다.

이제 정말 시애틀을 떠나는구나.

그동안 고생 많았다, 장하다!

스스로 대견해하며 칭찬했다.


사람 많고 넓은 데다가 복잡하기까지 해서

당최 어디로 가야 할지 난감한 시애틀 공항...

기사님이 끝까지 에스코트를 해주지 않았다면

마지막까지 제대로 고생하고 헤맬 뻔했다.


정말 고맙고 정 많은 양반...

딸내미가 미리 신청한 휠체어 서비스 덕분에

대기 중이던 도우미를 만나 드디어 출국장으로 들어가기 전...


어색한 표정으로 주섬주섬 꾸러미 하나를 꺼내는 기사님.

"이거... 별건 아닌데, 다른 건 드릴 게 없어서..."

"그래도 시애틀에 오래 머무셨는데

기념할 건 하나쯤 있으셔야 할 것 같아서

스타벅스 머그컵이랑 텀블러 하나씩 샀습니다."

"따님들 주지 마시고 꼭 어머님이 쓰세요."

"그동안 혼자서 계시느라 정말 고생하셨고, 대단하세요 어머님..."

"조심해서 잘 가시고 건강하십시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싶어서

기사님과 따뜻한 포옹을 하고 손을 흔들며 작별을 했다.

눈시울이 붉어지면서 마음이 따뜻해짐을 느꼈다.

내가 참 복이 많은 사람이었구나...



내 인생 최고의 모험이었을지도 모를 이번 여행...


큰 딸내미와의 소중하고 행복했던 시간들

아름답고 멋진 풍경과 예쁜 추억들

마지막까지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던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열흘 하고도 이틀 밤...


내가 눈감는 그 순간까지 잊을 수 있을까, 이번 여행을...

내 평생 기억에 남을 소중하고 짜릿했던 여행.

너무도 감사하고 소중한 나머지, 이번 여행의 기억들은 모두

내 마음속 깊은 서랍에 고이 접어 숨겨두련다.


아, 그리고 당분간

비행기 여행은 사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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