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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라토너 거북 맘 Oct 28. 2022

선물 같았던 여행의 추억

거북 맘의 미국 여행 에필로그

'사람은 추억으로 살아간다'는 말이 있다.

물론 각자의 '추억'들은

개인의 경험이나 사연에 따라 천차만별이겠지만 말이다.


엄마는 아무리 자식이 나이 먹고 장성해도

옹알이하고 이쁜 짓 하던 때의 추억을 평생 기억하며 살아가고

수십 년을 함께 한 노부부 역시

그들의 가슴 뛰던 연애시절과 신혼 기간,

자식들을 낳고 키우면서 울고 웃으며 동고동락했던

크고 작은 추억들을 곱씹으며 살아가니까 말이다.


'여행의 추억' 역시

시간에 쫓기고 일상에 허덕이며 사는 우리 삶에 작은 활력을 주고

지친 몸과 마음에 에너지원이 되는

필수 영양소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생전 처음으로 부모님 품을 떠나

친구들과 몇 날 며칠을 낯선 곳에서 함께 보내며

묘한 짜릿함과 자유로움을 느꼈던 수학여행의 추억.


결혼 전, 계절이 바뀔 때마다

엄마와 함께 고속버스나 기차를 타고 훌쩍 떠났던

온천, 벚꽃 놀이, 단풍 구경, 해돋이 여행의 기억들.


큰 딸내미와 함께하는 생애 최초의 해외여행이었던

태국, 홍콩행 케세이 퍼시픽 항공의 창가 좌석에서 와인잔을 부딪치시던 엄마...

너무 행복하고 기쁜 나머지,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으시다며

감격의 눈물을 글썽이시던 김여사의 모습은

어느덧 2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음에도

바로 엊그제 일처럼 생생하기만 하다.


만난 지 두 달만에 서로, '이 사람이 내 짝이구나' 확신을 하고

6개월 만에 일사천리로 진행된 결혼식.

9박 10일의 여유 있는 일정으로 방문했던 발리에서의

좌충우돌 티격태격 알콩달콩했던 허니문 여행의 추억들.


연년생 두 거북이들을 데리고 여행 좀 가 보겠다고

돈 주면 그냥 다 현지에서 살 수 있는 것들을 굳이

캐리어가 미어터지도록 꾹꾹 쑤셔 넣으며

촌티 팍팍 내던 여행 준비.

애들도 어리고 남편과 나도 어설펐던,

그러나 왠지 모르게 아련함이 남는 초창기의 가족여행.


거창하고 화려한 여행이 아니어도 좋다.

동행이 없는 나 혼자만의 여행이면 어떠한가.

재밌고 즐거운 추억 대신, 힘들고 고생스러운 기억이 더 많았던 여행이라도

훗날엔 그것마저 아련한 추억이 되기도 한다는 걸 경험해 본 적 있는가?


다음에, 좀 더 사업이 자리 잡으면...

나중에, 지금 코앞에 닥친 이 힘든 고비를 넘기고 나면...

한 5~6년 후에, 지금보다 시간적인 여유가 더 생기게 되면...

그때는, 이때까지 제대로 못 해본 여행도 다니고 느긋하게 여기저기 둘러보자.

그때 가서 여행 다녀도 충분하고 전혀 늦지 않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여행객들이나 여름휴가철 피서객들의 모습에

유난히 과민 반응을 보이며 심지어 불같이 화를 내시던 아버지.

어렸던 그때는 그저

엄마 아빠 손 잡고 어깨에 알록달록 튜브 메고 해수욕장 가는 친구들이 부러웠고

'왜 우리 아빠는 여행을 싫어할까' 원망스럽고 짜증스러웠었다.


하는 일이 잘 풀리지 않아 가장으로서의 삶이 녹녹지 않았던 아버지는

'가족 여행'이라는 단어 앞에서는 항상 예민해하며 다음을 기약했었다.

올해는 힘드니까, 내년에... 조금만 더 있다가... 애들 좀 크고 나서...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동생들과 나, 그리고 엄마는 더 이상 가족 여행을 기대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더 이상,

아버지와 한 가족으로서 여행을 갈 수 없는 상황이 되었고

그래도 언젠가 한 번은 갈지도 모른다고 기대했던 가족 여행은

그렇게 결국, 영원히 갈 수 없게 되었다.


아버지를 통해 깨달은 내 나름의 여행에 관한 교훈 내지는 철학 몇 가지 있다.

그중 일부는, 이름이 널리 알려진 사람들의 명언이기도 하다.


'지금'이 아니면 '나중'은 없다.

여행에도 때가 있다.

여행은 나 자신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다.

언제든 떠날 수 있는 게 여행이지만

실행에 옮기지 않으면 평생 떠날 수 없는 것 또한 여행이다.


약상자에는 없는 치료제가 여행이다.

여행은 모든 세대를 통틀어 가장 잘 알려진 예방약이자 치료제이며

동시에 회복이다. (대니얼 브레이크)

여행은 목적지로 향하는 과정이지만, 그 자체로 보상이다. (스티브 잡스)

여행은 다른 문화, 다른 사람을 만나고 결국에는 자기 자신을 만나는 것이다. (한비야)

인생은 짧고, 세상은 넓다

그러므로 세상 탐험은 빨리 시작하는 것이 좋다. (사이먼 레이븐)

여행은 정신을 다시 젊어지게 하는 샘이다. (안데르센)



코로나 바이러스의 기세가 한풀 꺾이고 수그러들어서라기보다는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본의 아니게 오도 가도 못하던 사람들의 불만과

그동안 쌓였던 여행에 대한 갈증이 극에 다다른 나머지

이젠 조금이나마 숨통이라도 트이게 해 주자는 차원에서 다시 열렸던 하늘길.


우리보다 더 급했던 사람들이 먼저 여행을 다녀온 후 남긴 후기들을 샅샅이 검색하고

이런저런 정보들을 수집하고 참고하며

나름대로 철저하게 준비했던 3주간의 미국 여행.


시애틀, 나이아가라 폭포, 알래스카 크루즈...

여정과 동선 자체가 만만치 않았던,

자그마치 1년 동안 기획한 야심차고 스케일이 제법 컸던 여행.

몇 년 만에 만난 친정 엄마와 시부모님, 반갑고 감동적이었던 가족 상봉.

하루하루가 아깝고 소중했고 가는 곳마다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었던 여행.


하지만, 여행의 끄트머리에서

미처 예상치 못했던 돌발상황이 발생하고

결국, 이번 여행의 대미를 장식하게 된

친정 엄마의 나 홀로 시애틀...


어느덧 미국 여행을 다녀온 지도 4개월이 훌쩍 지나고 있다.


여행 후, 핸드폰에 저장된 사진들을 하나하나 선별해서 인화한 후

액자를 사서 끼워 넣고 여기저기 배치하는 일도

제법 성의가 필요하고 공을 들여야 하는 작업임을

새삼 깨닫게 되기도 했고...


고작 4개월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수시로 집안 곳곳에 걸려있는 사진들을 둘러보면서 

여행 당시를 회상하며 상기시키지 않으면

여행을 다녀온 지가 족히 몇 년은 지난 듯 까마득하게 느껴져서

아쉽고 당황스럽기도 지만

역시, 남는 건 사진밖에 없다는 진리를 다시 한번 확인하기도 했다.


배우자와의 여행, 자녀들과의 여행, 연로하신 부모님과의 여행...

가족들과 여행하기에 가장 완벽하고 적당한 때가 언제냐고 묻는다면

'바로 지금'이라고 조언해 주고 싶다.


경험상, 모두의 조건과 상황에 딱 들어맞는 완벽한 시기라는 건 애초에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떠날 준비가 되었다고 해도 상대방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고

그 사이에 마음이 바뀌거나 여러 가지 상황들이 달라져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단언컨대, 소중한 사람과의 여행은

어떤 금전적인 것들보다 훨씬 가치 있고 보람 있는 투자이고

나 자신에게 주는 가장 귀하고 멋진 선물이다.


이번 여행은 친정 엄마나 시부모님을 위한 효도 여행이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엄밀히 말하면, 나 자신을 위한 선물 같은 여행이었다.


'여행의 추억으로 계절을 살아간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래, 그럴 수 있지... 아니, 가만 보니까 그 말이 맞는 것 같은데?'


이제는 벌써 추억이 되어버린 이번 여행의 사진들을

유난히 스트레스받고 힘들 때마다 바라보면서

나도 모르게 다음번 여행의 목적지를 고민하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곤 한다.


여행을 하며 쌓은 소중한 추억들이 얼마나 내게 힘을 주는지...

여행을 통해 깨닫는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

돌아갈 집이 있기에, 나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기에

그 여행이 더 즐겁고 소중하다는 사실.


소중하고 행복한 선물 같았던 이번 여행을 마무리하며

이 자리를 빌어서 몇몇 분들에게 감사를 드리고 싶다.


1945년생 김여사가 혼자서 무려 12일 동안 시애틀에 머물 때

진심으로 도움 주신 시애틀 한인 택시의 조재선 기사님...

김여사가 한국으로 돌아가는 그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 도와주시고 마음 써 주셔서 깊이 감사드립니다.


캐나다에서 트레일 러닝 대회를 마치고 돌아오다가

자동차 바퀴에 제법 심각한 문제가 생겨서

본의 아니게 큰 신세를 지게 된 착하고 순박한 캐내디언 총각들!

당신들 덕분에 세상은 아직 살만하다고 느꼈답니다.


여행? 그까짓 거 뭐 별거 있어?

아무튼 그냥 떠나고 보는 거야!



지금까지 거북 맘의 코시국 가족 여행 읽어주신 독자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1화부터 시작된,

작가인 제 자신도 예상치 못하게 방대해진 분량의 기행문을

꾸준히 읽어주시고 응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을 계기로, 웬만하면 시리즈물은 연재하지 말아야겠다는

귀한 교훈도 얻었습니다.


다시 한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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