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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라토너 거북 맘 Aug 19. 2022

거대한 빙하는 빙산의 일각?

거북 맘의 미국 여행기 11화

공기가 다르다.

살갗에 닿는 차갑고 상쾌한 느낌은 비슷하지만

앞서 들렀던 다른 기항지들과는 사뭇 다르게

왠지 모를 고요하고 무거운 기운이

알래스카의 주도인 '주노(Juneau)'의 새벽을 깨운다.


물빛도 다르다.

쪽빛의 짙푸른 망망대해와는 그 차원이 다른

밝은 녹색의 에메랄드와 곱고 짙은 비취 옥이 섞인듯한

신비롭고 오묘한 물빛 위에

무심한 듯 띄엄띄엄, 혹은 정겹게 옹기종기 모여있는

크고 작은 순백의 빙산들이

현실세계의 풍경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그저 한 폭의 그림처럼 우리 크루즈선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다.

크고 작은 빙산들이 유유자적하게 떠다니고 있다.


의외로 빙산(iceberg)빙하(glacier)의 차이를 혼동하거나

잘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극지방처럼 추운 지역의 산 정상 부근에

오랜 기간 동안 내린 눈이 녹지 않고

겹겹이 쌓이고 다져져서 결국 거대한 얼음층이 형성되고

눈이 쌓여 만들어진 이 두꺼운 얼음층이

서서히 녹아 흘러내려 결국 바다로 향하게 되는데

이렇게 높은 산 위에서 낮은 곳으로 서서히 이동하는 거대한 얼음층을 빙하라고 한다.


마치 살아있는 듯, 천천히 움직이며 여행을 하던 빙하가 해안에 도달하면

빙하의 끝 부분은 바다 위에 떠 있게 되고 

그 일부가 떨어져 나가면 바다 위에 떠다니는 크고 작은 얼음 덩어리가 되는데,

이 얼음 덩어리들을 빙산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빙하가 빙산보다 큰 개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세계 최대의 초호화 여객선이었던

'타이타닉호'의 주요 침몰 원인 중 하나도

바로 바다 위에 떠 다니던 빙산들 중 하나와 충돌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주노의 대표적인 볼거리인 멘델홀 빙하




"경비행기 예약 시간 다 됐어요,

따뜻하게 잘 챙겨 입으시고 어서들 나오세요!"


기왕 돈 쓰는 거

어떻게 해야 이번 크루즈 여행에서

가장 효과적이고 평생 기억에 남을 추억을 만들 수 있을까.


케치칸, 싯카, 주노

우리가 들렀던 알래스카의 기항지들이다.


그동안 정말 무수히 많은 정보를 검색하고 수집하면서

고민하고 의논하며 연구해 온 결과

남편과 나는 결국

어중간하고 소소한 옵션 투어 몇 가지를

기항지들 마다 조금씩 나눠가며 하는 것보다는

다소 금액이 부담되긴 하겠지만

한 번을 하더라도 확실한 거 한 가지를 선택하자고 결론 내렸다.


그 확실한 한 가지가 바로

주노의 대표적인 볼거리라고 일컫는

'멘델홀 빙하 경비행기 투어'였다.

우리는 한마디로 '주노'에 올인을 한 것이다.


일반적인 경비행기와는 다르게

물살을 가르며 물 위에서 뜨고 내리는 수상 비행기(float plane)를 타고

사람의 힘으로는 닿을 수 없는 눈 덮인 산 정상과

거대한 멘델홀 빙하를 감상하는 투어이다.


일 년에 20여 일 정도를 제외하면 늘 비가 내린다는

알래스카의 주도, 주노는

우리가 들렀던 기항지들 중 가장 춥고 날씨가 좋지 않았던 곳이었다.


도착한 그날도 역시 예상을 빗나가지 않고

가뜩이나 춥고 우중충한 날씨에 비까지 제법 내려서

그야말로 뼛속까지 냉기가 파고드는 체험을 해야만 했다.


모두들 에스키모처럼 나름대로 꽁꽁 싸매고 배에서 내려

예약한 수상 경비행기를 타기 위해 비를 맞으며

종종걸음으로 근처에 있는 경비행기 회사 사무실로 향했다.


바로 이 순간을 위해...

오로지 주노에서의 시간을 위해

다른 기항지에서는 굳이 필요 없었던

모자 달린 방수 재킷과 방한복,

방수가 되는 가죽 신발이나 운동화, 우산 같은 것들이 필수적인 준비물이었다.


하지만 우리 김여사.


이 여행이 시작되기 전부터

입이 닳도록 수십 번을 친정어머니인 김여사에게

강조하고 또 강조했었다.

"엄마, 모자 달린 방수 외투랑 두꺼운 신발도 꼭 챙겨 오셔~!"

"우리, 빙하 있는 곳으로 가요, 꼭 준비 단단히 하고 오셔야 돼!"


그러나 간곡한 나의 잔소리를 마치 일부러 무시하시듯

열대지방이나 아프리카로 여행이라도 가는 사람처럼

캐리어 가득 얇고 가벼운 옷들만 잔뜩 챙겨 오신 김여사.


급하게 시애틀에서 모자 달린 외투를 장만했으나

어느새 모자를 홀랑 떼서 버리시고는

머리엔 정수리가 훤히 드러나는 선바이저를 쓰고

굽 낮은 한 여름용 망사 슬립온을 신고

누가 봐도 심란하게 마치 옷 없는 노인네처럼

추위에 부들부들 떠는 모습으로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차가운 주노 항구에 내리셨다.


순간, 속상하고 걱정되는 마음에 앞서

나도 모르게 욱하며 단전 깊은 곳으로부터 화가 치밀어 올라옴을 느꼈다.

"아, 엄마! 도대체 모자는 왜 떼신 거야!'

"설마, 버리셨어?"


망사 슬립온 신발 덕분에 이미 빗물에 젖은 발을 꼼지락 거리시며

추워서 부들부들 떠시면서도 후회 없다는 듯

"난 외투에 모자 달린 거 싫다!"라고 당당하게 말씀하시던 김여사.


억장이 무너지고 화가 나고 기가 찼다.

자식이 억지 부리고 고집 피우며 말 안 들었을 때

부모님의 심정이 이럴까...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아니, 왜 하필...'


'그래, 일단 경비행기를 무사히 타야지.'

'이게 얼마짜리 여행인데...'

간신히 마음을 추스르고

최대한 김여사가 비 맞지 않게 신경 쓰면서

혹시 몰라 챙겨 온 숄을 머리와 어깨에 둘러드렸다.


'안 그래도 어제부터 몸이 으슬으슬 춥고 안 좋다던 양반이...'

걱정이 산더미였지만 김여사만 신경 쓰기엔

시부모님을 비롯한 다른 식구들도 곁에 있었기에

우선은 남편과 내가 심혈을 기울여 선택한

빙하 투어에 집중하기로 했다.





약 40분 동안

우리는 현실 세계를 잠깐 떠나 있었다.

월트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겨울왕국 Frozen의 배경이 혹시 이곳이었을까.


도저히

사진이나 비디오 촬영으로는

광활하고 눈부신 Ice Field

신비하고 오묘한 빙하의 색감과 느낌을 담아낼 수가 없었다.


눈물이 날만큼 아름답고

정신이 아득해질 만큼 감동적이었던 순백의 향연.


'이러다 우리, 이대로 빙하에 처박히는 거 아녀?'


능숙하고 연륜 있는 조종사의 비행 실력 덕분에

더럭 겁이 날만큼 스릴 있는 저공비행과

근접비행을 번갈아 하며

눈 덮인 산등성이와 외로운 산 정상,

역사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기 조차 어려운 세월 동안

거대하고 차가운 비밀을 간직한 채 잠들어 있는

살아 숨 쉬는 빙하를 제대로 감상하며 느낄 수 있었다.


경비행기 투어가 끝나고도 그 감동과 여운은 쉽게 가시지 않았고

역시 탁월한 선택이었다며 모두들 입을 모아 칭찬했다.


감격스럽고 감동적이었던 빙하와의 만남을 뒤로하고

다시 배로 돌아와서는

모두들 꽁꽁 언 몸을 녹이며 쉬는 시간을 가져야 했다.


"엄마, 컨디션이 많이 안 좋아요?"

"어디가 어떻게 안 좋으신데?"


전날부터 몸이 안 좋으시다던 김여사는

경비행기 빙하 투어를 마치시고는

급격히 컨디션이 저조해지기 시작하셨다.


사실, 그동안의 여독이 쌓여 이미 좋지 않은 몸 상태였음에도

당신 나름대로는 사력을 다해 참으며

경비행기 투어까지 마치신 것이다.


"엄마, 이제 이틀만 참으시면 크루즈 여행도 끝나요."

"그러면, 엄마는 배에서 내리자마자

시애틀 공항으로 가서 인천행 비행기 타실 거니까

조금만 더 참으셔."


저녁으로는 따뜻한 오트밀만 겨우 드시고

쓰러지듯 침대에 드러누우신 김여사를 보며

이런저런 상비약을 챙겨 드리면서 위로의 말을 건넸다.


'이제 이틀 밤만 자면, 꿈같았던 알래스카 크루즈 여행도 끝나는구나.'


왠지 모를 섭섭함과 아쉬움.

3주간의 가족 여행도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시애틀, 나이아가라, 캐나다, 그리고 알래스카 크루즈...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주노 항구와 작별하는 크루즈선 안에서

그동안의 추억들을 곱씹어보고

즐거웠던 여정들을 되새김질하며

7박 8일간의 일정 중

크루즈에서의 다섯 번째 밤을 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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