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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라토너 거북 맘 Aug 07. 2022

시아버지와 추억 만들기

거북 맘의 미국 여행기 10화

"아버님! 여기, 마라톤 하는 며느리가 있지 않습니까!"

"힘들지 않게 천천히 갈 테니, 쉬엄쉬엄 따라오셔요~"

"사실, 저도 박물관이나 유적지 둘러보는 거 좋아하거든요~"


"내 걱정은 하지 말아라, 어멈아."

"내가 아직까지 골프도 거뜬히 치는 사람인데,

그 정도 걷는 건 전혀 문제없다!"


첫 번째 기항지 '케치칸'에 이어,

알래스카 크루즈의 두 번째 기항지였던 '싯카'

7박 8일의 크루즈 일정 중 네 번째 날 아침.

1867년 알래스카가 미국 영토가 되기 전 러시아 소유였을 때,

한때 알래스카의 주도이기도 했다는

바닷가의 조용한 마을 '싯카'의 항구에 도착했다.


다른 기항지와는 달리

싯카 항구 근처에는 특별히 관광할 만한 장소라던가 쇼핑 타운이 없었기 때문에

미리 준비된 셔틀버스를 타고 15분 정도 시내로 나가야만 했다.


전날 들렀던 기항지, '케치칸'에서

그저 쇼핑센터만 잠깐 둘러보고 서둘러 크루즈선으로 돌아왔던 것이

못내 섭섭하고 아쉬우셨던 아버님께서는 이번엔,

뭔가 역사적이고도 교훈적인 정보 수집과 함께

뭐 하나라도 배워올 수 있는 교육적이고 유익한 일정을 바라셨다.


하지만, 다른 가족들의 입장은 시아버지와 사뭇 달랐으니...


우선 남편은 나이아가라에서 돌아온 이후로

아직까지 정상 컨디션을 회복하지 못해서인지

크루즈에 승선한 직후부터 골골거리기 시작하더니만

여전히 계속되는 피로감을 호소하며 약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때문에, 아버님의 교육적인 관광코스 제안에 난색을 표하며

슬며시 내게 다가와 사인을 보냈다.

'아버지한테는 그냥 적당히 둘러대고

근처 쇼핑몰이나 들렀다가 배로 얼른 돌아가면 안 될까?'


시어머님의 입장은...

"아니, 어제부터 으슬으슬 오한이 들고 몸살 기운도 있다는 양반이..."

"그냥, 근처나 대강 둘러보고 들어갑시다, 무리하지 말고..."

"나도 피곤해서 거기까지 걸어갔다 오기 싫어욧!"


원래부터, 역사적이고 교훈적인 관광 코스 같은 데는 그다지 관심이 없으시고

오로지 쇼핑에만 진심이신 친정어머니, 김여사

"저는 아시다시피 수술받은 다리 때문에..."라고 불편한 다리를 강조하시며

아버님의 교육적인 일정에 동참하기 어렵겠다는 입장을 밝히셨다.


감기 기운으로 컨디션이 좋지 않아

이번 기항지 투어에는 동참하지 않고

배안에 머물며 쉬기로 한

두 거북이 녀석들도 없는 상황.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제 공은 결국 내게로 넘어온 모양새가 되었고,

남편과 시어머님, 친정어머니는

'당연히 너도 적당히 둘러대야지?' 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여기까지 일부러 여행 와서 말이야,

맨날 쇼핑몰이나 둘러보고 간다는 게 말이 돼?"

"내가 집에 돌아가서 우리 사위나 손주들한테 해줄 말이 없잖아."

"뭐라도 하나 배워가는 게 있어야지, 이건 뭐..."


마땅치 않다는 표정으로 시무룩하게 말씀하시던 아버님은

갑자기 치고 들어오는 며느리의 씩씩한 목소리가 반갑고 기쁘셨는지

이내 남편과 두 어머니들께 손짓을 하며 말씀하셨다.


"나는 우리 며느리랑 한 바퀴 둘러보고 갈 테니, 다들 먼저 배로 돌아가서 쉬고 있으라고~"



한때, 러시아 식민지로써의 행정 중심지이자 활발한 모피 무역의 무대였던 싯카.

동서양의 문명을 잇는 길이 '비단길(Silk Road)'이었다면

당시, 금만큼이나 가치 있고 귀한 모피 원정을 위해

시베리아에서 출발하여

북태평양 베링해협에 위치한 알래스카의 싯카가 종착지가 된

'모피 로드(Fur Road)'의 역사와 흥망성쇠.


그래서인지 싯카에는 러시아 정교회 성당을 비롯해

당시, 러시아인들의 집 짓는 기술이나 생활방식, 문화 등을 보여주는

다양한 박물관이나 유적, 유물 등이 남아있었다.


팔순이 한참 넘은 시아버지와 쉰 살을 코 앞에 둔 며느리는

싯카의 고즈넉한 바닷가를 끼고 있는 관광 코스를 따라 함께 걸으며

중간중간 기념사진도 찍고 이런저런 대화도 나누면서

교육적이고 유익한 관광코스를 순회하고 있었다.


"어멈아, 그러니까 이게 지금 러시아가 미국한테 알래스카를 양도할 때

주고받았던 문서란 말이지?"

"네, 아버님! 이쪽도 한번 보세요.

이게 그 당시 모피 사냥을 위해 죽였던 해달의 가죽인가 봐요!"


사실, 싯카의 역사나 모피 로드 따위는 내게 큰 관심거리가 아니었다.


미국과 사이판.

한번 가려면 비행기를 몇 번씩 갈아타고 20여 시간이 훨씬 넘게 가야 하는 곳.

때문에 결혼한 지 20년이 다되어 감에도

시부모님을 뵌 횟수가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

한 번씩 뵐 때마다 세월의 흐름을 느끼게 할 만큼

점점 연로해지시는 시부모님.


덕분에, 또래 아줌마들이 고부갈등이나 시댁 스트레스를 하소연할 때마다

자주 찾아뵙지 못해 죄송스러운 마음과 함께

오히려 늘 시부모님의 안부가 궁금했던 나였다.


며느리라고는 하나밖에 없는데

특별히 며느리로서 시부모님과의 추억을 떠올릴만한

좋은 기회나 시간들을 갖지 못했던 것이 늘 마음에 걸리기도 했었다.


"아니 뭐, 꼭 며느리가 시부모와 좋은 추억을 쌓아야만 하는 건가?"

"그냥 자기 아들 뒷바라지 잘하고 살림 야무지게 하면서

손주들 건강하게 키워내면 할 일 다 한 거 아닌가?"

혹자들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건... 맞는 말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내가 착한 며느리 증후군이 있는 사람이냐면

절대 그런 스타일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그저 내 마음은

아버님과 꼭 한 번은 단둘이 오붓한 시간을 가지며

작고 소박하지만 알콩달콩한 추억을 만들고 싶었다.

단지 그것뿐인 것이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흐뭇해하시는 아버님을 보며

덩달아 같이 즐거워지면서도

왠지 모르게 서글픈 생각이 들었던 것은 아마도,

눈에 띄게 수척해지신 아버님의 얼굴과

저만치서 부지런히 며느리를 따라오시던

백발노인의 휘청이는 걸음걸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말이다 어멈아,

네가 우리 아들 외모를 보고 끌렸을 것 같진 않은데

어떤 점을 보고 결혼하기로 결심한 거냐?"


가슴이 먹먹해지려던 찰나,

아버님의 이 질문 하나로 나는 그야말로 박장대소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니, 결혼한 지 내일모레면 20년이 다돼 가는 마당에

아버님은 갑자기 왜 것이 궁금하셨을까?

그것은 모르긴 해도, 아버님의 며느리에 대한 애정과

고마움 같은 것들이 함축된 우회적인 표현이 아니셨을지...


깔깔거리며 웃은 뒤, 이런저런 설명을 드리니

그 대답이 무척이나 흡족하신 듯 허허 웃으시던 아버님.


이 정도는 끄떡없으시다던 아버님은

그러나 결국, 배에 돌아오셔서는 제법 몸살을 앓으셨다.

하지만

절대 아들과 며느리에게 당신의 몸살을 알리지 말라는

아버님의 신신당부가 있으셨다는 시어머님의 귀띔을 전해 듣고

우리는 그저,

아버님의 좋지 않은 안색과

감기 기운으로 조금씩 흐르던 맑은 콧물을 보고도 모르는 척해드려야만 했다.


'아버님! 아버님만큼이나 저도 너무 즐겁고 행복했습니다!'

'아버님과 함께했던 시간들, 그리고 수많은 이야기들...

늘 마음속에 간직하겠습니다, 사랑합니다, 아버님!'


며느리와 시아버지의 추억을 소중히 실은 배는

꽁꽁 언 빙하가 기다리고 있는 알래스카의 주도, '주노'로 향하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이면 도착해 있을 새로운 기항지를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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