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예 Oct 17. 2022

긍정적인 밥

할머니의 500원


출근길 차가 정체되기 시작하는 신도림역 즈음에 다다르면 꼭 창밖으로 눈길을 끄는 할머니 한 분이 계셨다. 땅에 닿을 듯 굽은 허리는 서글펐고, 몸은 깡마른 아이처럼 왜소했다. 낡은 유모차에는 늘 폐지가 실려 있었지만, 과연 돈이 될까 싶은 적은 양이었다. 할머니가 더욱 안타까웠던 것은 정신이 온전치 못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할머니는 버스정류장 옆의 쓰레기 더미를 뒤지거나 간혹 버려진 음식을 드시고 계셨다. 한 번은 할머니가 천연덕스럽게 하얀 엉덩이를 내놓고 급한 용무를 보고 계시는 장면을 목격하고 말았다. 여자로서의 마지막 자존심과 기억까지……. 모든 것을 놓아버린 할머니가 너무 가여워서 그날은 오전 내내 일이 손에 잡히질 않았다. 퇴사하고 1년이나 나서도 아직 그 할머니 생각이 난다.


나이가 지긋하게 드신 할머니나 할아버지를 그냥 쉽게 지나치지 못한다. 당신들의 행색이 초라하거나 생활이 힘들어 보이면 더욱 그렇다. 할머니와 자라 더 그런 것도 같고, 할머니 마지막 가시던 길의 작고 외로웠던 방을 아직 잊지 못해 더 그런 것도 같다. 폐지 줍는 할아버지, 버스 정류장 앞에서 나물 파는 할머니, 아기 유모차에 의지해 힘겹게 걸으시는 등 굽은 할머니. 손 한 번 잡아 드리고 싶고 다가가서 말동무라도 해 드리고 싶다. 내가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처음 기부를 마음먹었던 곳도 노인 후원 단체였다.


이런 나를 잘 아는 신랑이 그저께 영상 하나를 보여 줬다. 지금 읽고 있는 책의 실제 사례가 담긴 유튜브 영상이었다. 내용을 보고 내가 생각났다고 했다.


허리가 다 굽은 팔십 대 할머니가 폐지가 담긴 수레를 끌고 힘겹게 화면에 들어왔다. 어제는 돈이 없어 하루 종일 굶었고, 너무 힘이 없어 설탕물을 드셨다고 했다. 오늘은 폐지라도 팔아 돈을 만들어서 라면을 살 것이라고 했다. "배가 너무 고파. 라면 살 돈이 될지 모르겠어." 

초조해하며 기다리는 할머니에게, 사장님이 2,500원과 요구르트 한 병을 주었다. 할머니가 하루 종일 주린 배로 힘겹게 주운 폐지에 대한 대가가 1,000원짜리 두 장과 500원 동전 하나였다. 폐지의 가치가 예전보다 너무 형편없어진 것에 대해 사장도 무척 미안해했다. 할머니는 조심스럽게 돈과 요구르트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목이 탔는지 요구르트 한 병을 그 자리에서 너무 달게 드셨다.

그리고 쪼그리고 앉은 할머니가 천천히 땅을 더듬는 모습이 클로즈업되었다. 품삯으로 받은 돈 중 500원을 떨어트린 것이었다. “그 돈이 어디 갔을까. 여기다 떨어트렸는데…….” 그 장면을 찍고 있는 VJ가 훌쩍훌쩍 울고 있었다. VJ의 반응에도 할머니는 500원을 찾는 일에만 집중했다. 할머니는 슬퍼하지 않았다. 다만 땅을 더듬는 할머니의 여위고 굳은 손이 애처로웠다. 처음부터 글썽거리고 있던 나는, 결국 오열하고 말았다. 할머니가 쓴 털모자가, 땅에 붙은 듯 굽은 등이 너무 작았다.


내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집 안 여기저기를 굴러다니던 동전들이었다. 간혹은 허리가 굽히기 귀찮아서 보고도 무심히 지나쳤다. 그러다 동전이 아쉬운 일이 생기면 “꼭 찾으면 없다”라고 투덜대기도 했다. 자동차 기어 밑에, 내 방 화장대, 아이 방 곳곳에 가치 없이 굴러다니던 10원, 50원, 100원짜리가 할머니의 애타는 손길과 겹쳐졌다. 그리고는 애꿎은 사회를 탓했다. 돈이 왜 없냐고, 할머니가 왜 설탕물을 드셔야 하냐고.


영상을 보고 난 저녁, 저금통 하나를 찾아 내 방 화장대 위에 가져다 두었다. 굴러다니던 동전들을 쓸어 담아 하나하나 저금통에 넣었다. 아주 작은 돈이라도 기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랫동안 겸손을 잊고 살았다. 폐지를 모아 오늘 먹을 밥값을 버는 노인들을 안타까워했으면서도, 그들이 어렵게 버는 돈을 아무렇지 않게 펑펑 쓰며 살았다.


내가 가진 것들 중에 내가 특별히 잘나서 받은 것들이 있는가. 나는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다. 삶 앞에 더 겸손해져야겠다. 쓸데없는 소비를 하는 것이 있다면 더 반성하고 줄여야겠다. 

땅을 더듬던 할머니의 야윈 손이 오랫동안 잊히지 않을 것 같다.






19번  마을 버스정류장 앞에

여든 다 된 할머니가 봄나물을 팔아

오천 원 한 장에

냉이를 봉지 가득 담아주시는데

새색시처럼 옆으로 포갠 할머니 무릎이  

바닥에 붙어 꼼짝도 않네

날이 아직 찬데

그 자세 그대로 종일 계시니 굳어 버렸나 봐

이 나물 다 판 돈

병원비에 쓰시면 어쩌나

그 말은 꿀꺽 삼키고

할머니 파마가 참 예쁘시네요 그랬어

오는  길  내내

냉이를 어떻게 무쳐 먹을까

생각을 했지

흙 털고

잔뿌리  긁어내고

흐르는 물에 살살 씻어

끓는 물에 얼른 담갔다가

소쿠리 받쳐 찬 물에 헹궈야지

큰 양푼에

마늘 넣고 간장 넣고

들기름 두르고

조물조물 무쳐야지

나물 싫다는 내 새끼 입에 억지로

넣어주고

쓰고 맛없어!  퉤 하면

퉤 하면……

그때 비로소 눈물이 날지도 몰라

가끔은 몸을 숙여야 하고

버스를 타거나 걷기도 하고

지갑에 카드 말고 잔돈은 꼭 있어야 하고

내 입에 쓴 것도 먹어야 한다고,

그래야 사람답게 사는 것이라고

얘기해 줘야지

그리고 나는 밥에 비벼

맛있게 먹을 거야

세상 어느 곳 뉴스에서는, 나와 똑같은 사람에게 포탄을 겨눈다는데

그리고 누군가는 이런 때에

그 나라 주식을 사야 부자가 된다는데

19번 마을 버스정류장 앞

찬 길거리에 조르르 누웠던

한 줌 봄나물이 얼마나 고왔던가 생각하면서



- 2022. 1. <긍정적인 밥>*



* 함민복 시인님의 시 제목을 차용한 것임을 밝힙니다. 




이전 02화 그 여자가 울고 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