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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예 Oct 19. 2022

외로움을 견디는 법

나의 화요일 교실 (2)


내 새끼손가락을 잡고,

내 볼을 슬며시 만져주는데

그냥 눈물이 나지 뭐야

내가 만든 밥을 먹고

내 노래에 꽃처럼 웃고

내 발걸음을 뒤에서 쫓아오는데

그냥 마음이 온통 그득하지 뭐야



- 2021. 3 <외로움을 견디는 법>






아현동의 마스코트, 준이와 웅이 형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1학년 남자 쌍둥이였던 준이 웅이 형제의 집은 아현동에서도 하늘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다. 그래도 단독 주택이라 부를 만한 이층 집이었는데, 슬레이트 철문 안으로 한 사람만 겨우 오를 수 있는 가파른 계단이 왼쪽으로 뻗어 있었고, 계단 끝으로 바로 작은 방이 이어지는 신기한 구조였다. 옥상도 형제네가 썼는데 따로 난간도 없이 내버려 놓은 한 평 남짓한 아스팔트 바닥이었다. 내가 아현동 수업을 도는 금요일에 골목길을 바삐 뛰어다니면, 할머니는 그 옥상에서 무언가를 부지런히 하시며 멀리서도 나에게 알은체를 하시거나, 준이와 웅이의 행방을 오히려 묻기도 했다.


형제의 수업을 하러 집으로 향하는 길, 옥상에 계시던 할머니가 나를 발견하시고는 어딘가를 향해 소리친다.


"선생님 오신다! 얼른 뛰어와!"


할머니의 눈길을 따라가면, 볼이 발갛게 익은 아이들이 신발주머니를 흔들며 뛰어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1학년 아이들의 걸음은 한참을 뛰어도 계속 제자리 같았지만 헉헉대는 숨소리만큼은 점차 커지며 다가왔다. 아이들의 정수리에는 흙냄새가, 가방에서는 필통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할머니의 목소리는 늘 경쾌했고, 아이들도 밝았다. 준이와 웅이는 지난 자리를 환하게 물들이는 아현동의 마스코트였다. 조금은 늦되고 어눌했지만, 여덟 살의 순수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너무나 예쁜 아이들이었다. 나는 아이들을 힘껏 안아주곤 했다.


아이들 엄마의 얼굴을 본 적은 없었지만 나는 조금은 친근한 느낌이었다. 아이들의 교육비 출금 계좌 등록을 하며 엄마의 이름도, 나이도 알게 되었는데 당시 스물여덟이었던 나보다 몇 살은 어렸다. '나는 아직 결혼도 못 했는데 벌써 여덟 살 형제의 엄마라니!' 놀랐던 기억이 난다.


할머니와 친해진 뒤에는 묻지 않아도 자주 딸 이야기를 해주셨다. 아마 비슷한 또래의 내가 꼭 딸 같아서였을 것이다. 지방 어딘가에서 돈을 벌고 있다고 했다. 두 아이의 적지 않은 회비가 아이들 엄마 이름의 통장에서 꼬박꼬박 한 번도 밀리는 일 없이 잘 빠졌고, 나는 그 기록을 확인하며 아직 어린 나이의 엄마가 그래도 아이들을 위한 그리움의 시간을 견디고 있지 않을까 어렴풋이 생각했다.


할머니는 딸 이야기 끝에 항상 썩을 년, 망할 년, 미친년, 온갖 험한 욕은 다 붙였지만, 당연히 단 한 번도 진짜 미움을 느낀 적은 없다. 아이들 공부를 제대로 챙겨봐 주지 못함을 미안해하셨고, 딸 욕이라도 하며 아이들 선생님인 나에게 면구스러움을 표현하고 싶어 했다. 딸 얘기 끝 정적이 올라치면, 나는 아이들 수업으로 얼른 화제를 돌렸다. 할아버지는 옆에서 흠흠 헛기침을 하셨고 아이들은 무슨 이야기인지 캐묻지 않았다. 글자도 아직 잘 못 쓰는 마냥 해맑은 아이들이었는데, 그리움으로 나이 들어버린 마음 한구석이 있었을 것이다.


둘이 나란히 앉아 무언가를 하겠다고 열심인 모습을 보면 내 눈에도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다. 나는 글씨를 쓰는 오동통한 형제의 손등을 바라보며 항상 둘이어서 다행이다, 생각했다. 하나가 아니라 둘이 함께여서. 엄마 없이 할머니 할아버지와 크고 있는 형제지만 잠들기 전, 엄마가 보고 싶어질 때도 서로의 얼굴 부비고 장난칠 수 있는 형제가 있어 다행이다…. 자다 깨서 무서울 때도 나랑 똑같이 생긴 형의, 동생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어 다행이다…. 학교에서 집까지 어른에게도 버거운 오르막길이지만 같이 손잡고 오를 수 있어 너무 다행이다…. 나는 생면부지의 남인 형제의 엄마에게, 비록 할머니에게는 "자식새끼들 떼놓고 간 인정머리 없는 년"이지만, 가끔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하나가 아니라 ‘둘’이 함께 있게 해 주어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면 옆에서 아이들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계시는 할아버지가 눈에 들어왔다. “썩을 년!” 욕으로 시작했다가, “에휴 오늘은 뭐 해 먹나?” 하며 씩씩하게 털어낼 수 있는 것은 할머니 곁을 지켜주며 황혼으로 함께 물들어가는 할아버지가 있기 때문이었다. 할머니는 그 특유의 씩씩함으로 이 네 식구의 공간을 슬픔에 잠기지 않게 했다.


준이 옆의 웅이가, 할머니 옆의 할아버지가…, 하나가 아니라 둘이라는 숫자가 얼마나 갑절의 안정과 충만함을 가져다주는지! 나도 함께 늙어갈 동반자가 꼭 있어야겠다, 모두 내 손을 떠난 뒤 찾아온 고요함과 적막함을 함께 살아온 추억들로 채울 수 있는, 두런두런 자식들 걱정하고 흉볼 수 있는 내 신랑이 있어야겠다, 그리고 결혼하면 하나가 아니라 꼭 둘은 낳아야겠다, 어렴풋이 생각했던 것도 그 시절부터였던 것 같다.


지금은 형제 곁에 엄마가 함께 있었으면, 하고 바래본다. 할머니의 장독에서 오래 묵혀 끓인 된장찌개가, 할머니의 상추가, 딸을 위한 밥상에 올라갈 수 있었으면 하고 상상해 본다. 지금은 그 모두가 나이 들어버렸을 텐데도, 내 상상 속의 준이와 웅이는 항상 그 모습일 것만 같다. 아직도 씩씩하고 정정하신 할머니와 다정한 할아버지 그 모습 그대로, 너무 늦지 않은 때에 형제 옆에 엄마가 있는 그림을 그려본다. 당연히 그랬을 것이라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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