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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예 Mar 20. 2022

곶감

빨강이는 누가 지킬까


내 기억 속의 할매는

작은 방을 등에 업고 더 웅크린 몸으로

꾸덕해져 가는 마른 곶감을 씹고 있었지

틀니에 곶감이 부딪히는 소리

딸그락딸그락 밤을 울리면

함께 시간을 견디던 낡은 텔레비전도 치이- 소리를 내고

ㅡ 할매 배고프나?

ㅡ 어언지, 내 잠이 안 와 이래 안 씹어보나

흐릿한 동공에 물이 어린 눈으로 내게 그렇게 말했지

어스름한 새벽빛에

방을 두드린 어린 손님이 반가워

화투장을 내밀어 보던 

할매,

우리 할매


나는 웬일로 이렇게 달 저무는 소리에 깨어

우두커니 앉았다가

할매 마주하고 화투장 도란도란 뒤집고

할매 참 맛나다, 곶감 같이 우물거려 보는 거지

곶감 말라가듯 쪼그라들던 할매 얼굴은 분꽃처럼 피고

우물우물 정다웁게 곶감을 같이 씹는 거지

이 밤,

달 저무는 소리가 도무지 쓸쓸해서 깬 이 밤에

나는 이렇게 시들어가는 것들을 그리워하고 있는 거지 

잊혀지지 않는 것들을 

우물우물

씹어보고 있는 거지



- 2021. 1 <곶감> 






나에게는 90살이 넘은 연세의 친한 이웃이 한 분 있다. 우리 첫째의 친구, 경훈이의 왕할머니다.


할머니의 곱슬곱슬한 파마머리는 항상 하얗게 반짝인다. 턱에는 살이 넉넉하게 붙으셨지만 이목구비가 오목조목하고, 금색 줄이 달린 안경 너머로 눈빛이 아주 고운 분이다.


할머니는 항상 걷고 있다. 노인 보조 보행기를 의지하고 시간보다 느리게 걷는다. 누군가를 만나면 보조기를 아주 천천히 멈추고,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바쁘지 않을 때는 할머니와 걸음을 맞추며 이야기를 하지만 아이 하원 시키러 가는 길, 마음이 급할 때는 "할머니 죄송해요!" 혼자 중얼거리며 멀찍이 돌아가기도 한다.


걷지 않을 때 할머니는 생태공원 벤치에 앉아 계신다. 생태공원은 주민들이 사랑하는 작고 아름다운 호수 공원이다. 궁둥이를 호수 표면에 붙이고, 날개를 이따금 퍼덕이며 아이들을 감동시키는 오리들은 가끔 들리는 귀한 손님들이고, 원래 그곳을 지키는 터줏대감들은 호수 아래에 있는 어른 팔뚝만 한 굵기의 잉어들이다. 호수를 만들 때부터 방생했던 것 같은데, 주민들의 지극한 사랑으로 포동포동 살이 붙어 지금은 입이 떠억 벌어지는 크기의 대왕 잉어로 자랐다. "물고기에게 밥을 주지 마세요. 생태계가 파괴됩니다."라는 현수막이 한동안 내걸리기도 했다.


늘 동무들과 함께이던 할머니가 언젠가는 혼자 서서 호수를 내려다보고 계시는 모습을 봤다. 가서 인사를 드렸더니, 할머니는 환하게 웃으며 들뜬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저기 내 빨강이여!"

빨간 빛깔의 가장 잘생긴 잉어가 할머니의 잉어이고, 다른 동무들도 하나씩 당신들의 잉어가 있다고 하셨다. 혼자 앉아 계실 때 호수를 그렇게 그윽하게 바라보시는 것에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할머니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에 빨강이가 잠방 잠방 은빛 물비늘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나는 빨강이를 쫓는 할머니의 순진무구한 눈빛을 한참 쳐다보았다.  


할머니들에게 아기가 있는 듯 느껴질 때가 있다. 사물을 바쁘게 바라보지 않고 천천히 공을 들여 바라보실 실 때, 흙이나 들꽃이나 오리나, 들 고양이나- 약한 것들을 마주할 때의 당신들의 그윽한 눈길과 순수한 탄성이 나는 너무 아름답다.


나이가 많이 들어갈수록 아기의 영혼으로 돌아가는 것이 보인다. 눈에는 눈물이 고이고 눈빛은 흐려지지만, 나에게 건네주는 다정한 말과 따스한 눈빛을 갈구하는. 아기들이 으앙으앙 우는 것은 나 좀 안아주세요, 우는 것이고 어르신들이 천천히 걸음을 멈추시고 나를 들여다보시는 것은 당신과 이야기하고 싶어요, 하는 것이다. 세상에 바쁜 일이라는 것이 없어지고, 적적해지면 세상 미물에 대한 순한 시선이 다시 생겨나는 것일까. 오래된 자개농을 쓸고 닦고 어루만질 때도 느껴지고, 아이의 배를 오래 쓸어 보담으실 때도 그렇고, 멀리 저물어가는 노을을 바라보실 때, 거리에 떠도는 새나 고양이나 강아지들에게도 고놈 고놈 봐라 하시며 흐뭇하게 들여다봐 주실 때도 나는 당신 눈 속의 때 묻지 않은 아기를 본다.  


겨울이 깊었던 몇 달 동안 할머니를 잘 뵙지 못했다. 따뜻해진 어느 날 할머니를 만나 너무 반가웠는데 지난겨울 초입 뵈었을 때보다 얼굴이 많이 상하신 듯하여 마음이 덜컹하였다. 내 잉어를 챙기는 할머니와 동무들의 건강한 모습을 오래 뵈었으면 좋겠는데 우리 아기가 자라는 동안 할머니의 세월도 깊어지는 것을 어찌할 수가 없을 테지. 그 생각을 하면 마음이 괜히 쓸쓸해진다. 할머니가 나오지 못하시면, 빨강이는 누가 지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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