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6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별이 되어버린 아이로 인해 모든 엄마들이 아팠던 해. 나도 오랫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고, 순간순간 치밀어 오르는 울분을 참을 수 없었다. 그때 나는 셋째를 임신 중이었고, 갓난아이를 돌보며 재판 과정에 대한 뉴스를 지켜봤다.
아이가 울 때. 입 꼬리를 올리며 빙긋이 웃을 때, 의미 없는 옹알이를 할 때 무언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만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도 그즈음부터였다. 내 몸과 말을 아직 어찌할 힘이 없을 뿐, 말이 트이면서 오히려 세상에 오기 전의 기억을 잊을 뿐, 세상의 비밀은 이 작은 몸짓과 울음에 담겨 있을 것만 같았다. 침대 위에서 강보 속에 싸여 있는 작은 핏덩이가 이야기하고 있었다. 세상에 무사히 오게 해 줘서 기쁘다고, 내가 울 때 바로 달려와 주어 고맙다고, 나는 당신으로 인해 안심된다고.
내 인생에 갑자기 두 가지가 끼어들었다.
첫 번째는, 다시 글이 쓰고 싶었다. 아이들이 살아가야 할 세상은 지금보다 나은 세상이어야 했고 어쩌면 쓸모 없(어 보이)는 것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내가 가진 재능이 아직은 미천할지언정, 언젠가 목소리를 내기 위해 아주 작은 노력이라도 시작하고 싶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아기의 목소리를 저버리지 않은 용감한 엄마들에 대한 유별난 애정이 생겼다.
처음에는 보육 시설에서 어른들의 손길을 기다리는 아기들을 자꾸 훔쳐보며 입양에 대한 꿈을 혼자 몰래 키우기도 했다. 입양이 단지 가지고 싶은 한 사람의 욕망으로 할 수 없는 것임을 절절히 깨닫고 마음을 접은 뒤에는 미혼모 카페를 찾아 나 홀로 '덕질'을 시작했다. 동정도 연민도 아니었다. 고마움. 내 배로 낳은 내 아이와 함께 하루하루를 살아내고 있는 것만으로 너무 귀하고 감사했다. 그들의 삶을 응원하고 싶었고, 작은 힘이라도 보태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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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혼모 카페에는 미혼모가 아닌 일반 엄마들도 많다. 아이가 얼마 쓰지 않은 육아용품들, 쓰지 않은 출산선물들을 더 귀하게 나누고 싶어 온 엄마들도 많고, 돌잔치에 쓸 비용을 모두 미혼모 단체에 기부하러 오는 젊은 부부도 있다. 엄마의 손 편지에는 “아이를 키워보며 처음 겪는 상황에 막막할 때가 많았다. 경제적 상황이 좋지 않을 때는 너무 힘들고 막막할 것 같다. 힘든 상황을 포기하지 않고, 낳아 기르는 멋진 엄마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라고 쓰여 있었다. 아기를 낳고, 초보 엄마로 힘들었을 상황에도 세상의 아기와 엄마들을 생각하며 마음을 모은 엄마. 그 엄마의 예쁜 마음은 오랫동안 카페에서 회자되었다.
오래된 나눔 회원 중에, 절대 얼굴과 이름을 밝히지 않는 한 남성분이 있다. 대체 무슨 일을 하는 분인지는 모르겠지만 본인의 월급 중 꽤 많은 부분을 미혼모 카페 나눔에 쓰는 듯했다. 그는 대학 시절 보육시설에 자원봉사하며, 입양 가는 아이들을 안타깝게 지켜본 경험으로 지금의 미혼모에 대한 마음이 생겼다고 했다. 그는 늘 활기차고 쾌활하다. 댓글로 농담도 잘 주고받으며, 카페에 힘을 불어넣는다. 그리고 그를 추앙(?)하거나 궁금해하는 이들의 글에도 늘 무심함으로 반응한다. 그는 끝내 자신을 밝힐 것 같지 않다.
그리고 나는 지금 빛나 씨와 재휘의 이야기를 하려 한다. (본인의 동의를 얻어 글을 작성한 것임을 밝힙니다.)
빛나 씨에게는 열세 살이 된 아들 재휘가 있다. 재휘는 복지재단에서 주는 장학금을 몇 차례 받았을 정도로 공부를 잘하는 아이인데, 시에도 관심이 많다. 어느 날 빛나 씨의 글 아래에 조그맣게 첨부해 놓은 재휘의 자작시를 읽는 순간 가슴이 일렁였다. 시심을 사랑하는 나여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재휘의 시가 그녀의 글을 온통 ‘빛나게’ 하고 있었다. 나의 꿈을 다시 밝히는 기분이었다.
재휘는 조울증이 심했던 엄마와 떨어져 외할머니와 단둘이 살았다. 그럼에도 너무 똑똑하고 건강하게 잘 커주었다. 살아있음에도 5년이나 보지 못했던 엄마를 “그래도 돌아와 줘서 기뻐.”라며 웃음으로 안아준 아이이다. 순간순간 본인의 결정을 탓하며 엄마가 지난날을 후회할 때면, “괜찮다.”라고 오히려 엄마를 도닥여 주는 아이이고, 친구가 눈치 없이 "너는 왜 아빠랑 성이 달라?"라고 물어도, "나는 그냥 엄마 성을 따랐어."라고 의연하게 대답할 줄 아는 아이이다. 그리고 재휘는, 언젠가 의사가 되어 엄마의 병을 고쳐줄 수 있는 날을 꿈 꾼다. 작은 아이의 마음에 무엇이 들어있을까. 나는 재휘의 시가 기특하면서도, 한편으로 아프다.
얼마 전, 빛나 씨가 검정고시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보았다. 재휘에게 부끄럽지 않은 엄마, 자랑스러운 엄마가 되고 싶다고 했다. 나는 ‘자기 계발을 열심히 하시는 엄마들에게 주는 선물’을 명목으로, 빛나 씨에게 장보기 쿠폰을 나눔 했다. 재휘가 좋아하는 새우를 세 식구가 다정하게 구워 먹었다고 했다. “맛있는 안주에 소주 생각이 난다.”며 재휘 할머니가 소주도 한 잔 기울이셨다는 글에 나도 참 마음이 흐뭇했다.
언젠가 내놓을만한 작가가 되면, 재휘와 빛나 씨와 함께, 또 다른 엄마와 어여쁜 아이들과 함께 글을 쓰고 싶다. 당신의 선택이 얼마나 용감한 것이었는지 세상 방방곡곡 자랑하고 싶다. 좋은 엄마 아니라, 보통 엄마로 살아주는 것이 얼마나 값지고 귀한 일인지 세상에 떠들고 싶다.
시간도 묻어 둔 우주
검고 잠잠한 어둠 속
천천히 천천히 흘러 다니다
사람의 별에 오게 된 건
당신이 나를 불렀으니까요
열 달을 웅크려
낯선 내가 되어가는 동안
내가 곧 만날 곳이 참으로 두려워도
당신의 목소리가 세상을 기대하게 하였습니다
내가 처음 만난 이 세상은
차갑고 딱딱하고 낯설어
크게 크게 울 수밖에요
당신의 목소리를 들려주세요
세상을 만날 용기를 내어 보게요
좋은 집을 바라지 않아요
멋진 당신을 바라지 않아요
나를 불렀던 목소리를 오래오래 듣고 싶은 거예요
그 목소리로 나를 안아 주세요
당신의 표정으로
웃음으로
- 2021. 7. <당신의 목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