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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예 Oct 21. 2022

세 번의 육아휴직 (1)

그 사이, 하룻밤은 지난 것 같다


남자는 여자에게

털모자를 씌어주며

춥지 않냐고 물었다

턱 밑에 여드름이 가득하던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여자에게

남자는 첫눈에 반했다 했다


반하는 일은

어쩌면 예상치 못한 화학반응 같은 것이다


그때 남자는 주름이 없었고

여자의 눈은 맑았다


남자와 여자는 더 이상 서로를 보지 않는다

남자의 낮은 코와

여자의 긴 눈매를 반반 닮은

밤톨 세 개를 나란히 웃으며 바라본다

그리고 둘은 서로 서운타 하지 않는다


그 사이, 하룻밤은 지난 것 같다


남자는 여자에게 춥지 않냐고 묻는다

여자는

털모자가 생각나 빙긋이 웃는다



- 2022. 10 <그사이, 하룻밤은 지난 것 같다>






제대로 된 직장 잡기에 조금씩 초조해질 20대 말 무렵, 나는 한 중견기업에 늦깎이로 정착했고 신입 사원 연수에서 만난 동기와 결혼을 했다. 그리고 첫째를 낳고 한 번으로 끝날 줄 알았던 육아 휴직을 세 번이나 했다. 난 세 아이의 엄마, 그리고 한 회사에서만 무려 세 번의 육아휴직을 알뜰하게 빼먹은 셈이다. 첫째 아이는 벌써 열세 살, 그리고 이제 마지막이어야 할 아이가 생후 21개월. 나도 내가 다둥이맘으로 살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

.


바쁜 맞벌이 부모 밑에 우리 첫째는 그야말로 산전수전을 겪었다. 우리 부부는 영업부서에 속해 있었고, 저녁 9시는 되어야 일이 끝났다. 시댁으로 아이를 찾으러 가면 밤 열 시. 아이는 엄마 아빠를 눈 빠지게 기다리다 잠들어 있기 일쑤였다. 그냥 여기서 재우라는 부모님 만류를 뒤로 하고 아이를 둘러업고 집으로 오곤 했다. 집에 오는 차 안에서 잠깐 잔 아이는 집에 오면 눈이 반짝 떠졌다. 하루 종일 못 본 엄마 아빠와 놀고 싶은 아이 마음이 오죽했을까. 아이가 안쓰러워 잠깐 놀아줘도 아이 성에 차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자고 싶지 않은 아이와 재워야만 하는 엄마 아빠의 전쟁은 한두 시간은 기어이 이어졌고, 아이는 항상 엄마 아빠와의 시간에 주린 채로 잠이 들었다.


아이에게도, 우리 부부에게도 고된 일상이었다. 빨리 분가하고 싶은 마음에 복직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세가 저렴한 곳을 찾아 시댁에서 30분가량이나 떨어진 곳에 얻은 아파트였다. 돈도 돈이었지만 제대로 살림 장만하고, 구색 맞춰 가구를 놓을 시간조차 없었다. 아이 공부상으로 쓰는 앉은뱅이책상이 하나 있었는데 평상시에는 32인치 TV를 그야말로 ‘얹어’ 놓는 TV 받침대로 쓰였고 아이 공부할 땐 공부상으로, 밤에 아이 재우고 나면 술상으로 분할 정도로 살림살이도 못 갖추고 살았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그 아파트와 책상은 자꾸 생각이 나고 그립다. 좁은 거실에 오붓이 앉아 아이 재롱에 숨 넘어가게 웃던 기억, 잠든 아이 옆에서 고달픈 회사 생활 안주 삼아 소주 한잔 기울이던 부부만의 시간. 우리 형편대로 대출 없이 장만한 첫 보금자리여서 더 그랬는지, 돈 모으는 재미가 있었고 힘들어도 이대로만 열심히 검소하게 산다면 금방 부자가 될 것도 같았다.


그런데 그즈음 둘째 생각이 났다. 


어느 주말, 우리 부부가 밀린 청소를 하던 중이었고 당시 세 살이었던 아이가 혼자 앉아 무릎에 책을 펼친 채 졸고 있었다. 창문으로 스며든 햇살이 아이 머리 위로 쏟아지고 있었다. 순간 행복감에 눈이 부셨다. 그 느낌을 아직도 잊지 못하겠다. 


갑자기 미친 듯이 아이를, 또 갖고 싶었던 것 같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승진해서 연봉이 올라가면 대출해서 작은 아파트 하나 마련할까, 꿈에 부풀어 있기도 했다. 아이가 하나 더 생기면 난 휴직을 해야 했고, 집 장만의 꿈은 멀어질 수도 있었고 승진은 포기해야 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랬다. 아이의 찬란한 이 시절이 이대로 지나는 것이 겁났다. 서툴고 어렵겠지만 또 한 아이의 엄마가 되고 싶었고, 내 가족을 더 만들고 싶었다. 아이가 너무 예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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