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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예 Oct 18. 2022

그 여자가 울고 있다

수다 떠는 아줌마 


글쓰기 강좌를 신청했다가 한 번 듣고 포기한 적이 있다. 사실 첫 수업 전에 강좌를 소개하는 강사의 이야기에 완전히 감동했던 터라, 나의 이런 ‘변심’에 스스로도 적잖이 실망스러웠다. 그는 세상에는 '글‘이 꼭 필요하다고 했고, 구태의연하지만 자신은 세상을 바꾸는 글의 힘을 믿는 사람이라고 했다. 두근거렸다. 꼭 이십 년 전에 문학수업을 들으며 벅차고 감동했던 그때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내가 찾던 그 수업이구나 싶었다.


첫 수업 날, 알쏭달쏭한 질문을 던지고 본인이 원하는 답을 내놓지 않는 수강생들에게 약간의 무안을 주는 방식으로 수업의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것까지는 좋았다. 본인의 수업 방식과 직설화법에 상처를 받은 학생과의 일화를 소개하는 것도 내가 그 ‘학생’이 되지는 않을까 두렵기는 했지만 괜찮았다. 그런데 문제는 강사의 다음 발언이었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한심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누군지 아세요? 놀이터에 앉아 수다 떠는 아줌마들이에요.”


아줌마들이 나누고 있는 이야기는 당연히 다른 사람에 대한 험담일 것이고, 다른 사람의 험담을 나누며 몰입한 그들의 표정이 너무 한심하고 볼썽사납다고 했다.


나는 당황해서 움찔거렸다. 수업에는 스물여남은 명의 수강생들이 있었고 나와 비슷하거나 나보다 연배가 있는 아줌마 수강생도 분명히 있었다. 물론 그의 의도가 그리 나쁜 것은 아니었을 수는 있다. 정확히 정황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말보다 훌륭한 글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던 것 같고, 한순간도 허투루 살지 않고 열심히 세상을 탐구하는 어떤 젊은이의 일화를 찬양한 뒤에 나온 이야기였다. 내가 아줌마여서, 놀이터에서 수다 떠는 그 당사자여서 그랬을까. 들을 때는 약간 당황만 했던 마음이 점차 분노로 바뀌었고, 결국 그 사람은 글쓰기 강사가 될 자격이 있을까 하는 생각에마저 이르렀다. 문학적으로, 예술적으로 해박한 지식을 가진 사람이었고, 지위와 명성을 가졌고 그냥 보아도 ‘예술하는 사람’의 아우라가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내가 바라는 글 선생님은 아니었다. 글을 가르치는 사람이라면, 어떤 상황에 놓인 인간도 애잔함_삶의 무게를 짊어진 인간에 대한 연민과 애정_을 가지고 바라보아야 하지 않을까? 내가 너무 어려운 것을 바란 것일까? 그가 말하던, 세상을 바꾸는 글이라면.


그의 입에서 유명한 작품의 제목이, 화가의 이름이 쏟아져 나왔었다. 후에 그가 수업 중에 예로 들었던 한 여류화가의 작품을 명화집에서 보았다. 그림 속 여자의 슬픔은 이해하면서 놀이터 아줌마들의 웃음 뒤 감춰진 눈물은 왜 알지 못했을까.


그렇지만 그 일이 있고, 한참이 지나서야 기억이 났다. 나 역시 일하는 엄마였을 때, 늦게 들어와 아이만 겨우 재울 때, 우리 아이의 감정 기복이 하루에도 얼마나 다이내믹하게 펼쳐지는지 몰랐다. 똑같은 일을 끝없이 반복하면서도 좋은 엄마가 되어야 하는 압박감에 사로잡혀 마음이 어려울지 몰랐고, 어제 신랑에게 들은 말이 상처가 되고 시댁의 말도 안 되는 처사에 마음이 아파도 아이에게 웃어주어야 하는 쓸쓸한 엄마들의 마음을 몰랐다. 코로나19에 걸려 내 몸은 죽을 듯 괴로워도 아이 밥은 해줘야 하는 엄마들. 그 엄마들을 몰랐다. 나 역시 어쩌다 카페에 앉아있는 엄마들을 보며, 참 팔자 편한 엄마들이라 부러워했던 적이 있었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사람이면서도 우리는 간혹 사람을 모른다. 글 쓰는 사람은 사람을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끝없이 공부해야 한다. 나도 아직 멀었다.


얼마 전 늦은 밤에 이웃의 한 어린 엄마가 나를 찾아왔었다. 신랑의 폭언에 마음상처가 깊었다. 아이들 때문이라도 이혼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렇지만 이제 본인의 마음은 어찌하면 좋을지 모르겠다며 울었다. 샤워하다가도 울고, 청소하다가도 눈물이 난다고 했다. 나는 어떤 말도 해줄 수 없었다. 그저 그녀의 발등만 쳐다보고 있었다.


다음 날 놀이터에서 만난 그녀가 간식을 만들어 와 아이들을 먹이고 놀아주는 장면을 봤다.  간혹은 아줌마들과 열심히 수다를 떨기도 했다. 그중 한 엄마는 8개월에 첫 아이를 사산하고, 뒤늦게 낳은 늦둥이가 너무 발달이 늦어 고민이 많고, 그중 한 엄마는 징그럽게 말 안 듣는 형제들 때문에 늘 지쳐있다. 그렇지만 그녀들은 웃는다. 때로 남의 흉도 보고, 신랑과 대수롭지 않은 작은 고민까지만 공유하며 깔깔거리고 웃는다. 그리고 날이 어둑해지면 또 아이들을 데리고 “저녁 먹으러 가자!” 들어간다. 그렇게 산다. 난 그렇게 별 공도 없는 엄마 역할을 지켜주는 그들이 고맙다. 그리고 사랑스럽고, 또 애잔하다.






이제 나는 어떻게 살지요?

그 여자가 서럽게 우는데

옆 집 언니인 나는

슬리퍼를 신은 여자의 하얀 발등에

빗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보고 있었다


이 밤에도 호수에 오리들이 있네

애들은 자?

실없는 소리만 지껄였


헤어지고 집에 와서야

왜 안아주지 못했을까 생각했다

잠든 딸의 얼굴을 쳐다보며

이상하게 가슴이 울컥 댄다

그 여자도 아이들 옆에 숨 죽이고 누웠을 것이다


다음 날 놀이터에서

아이들의 그네를 밀어주고 있는 그녀를 만났다

아이들 간식이라며

집에서 해온 호밀빵 샌드위치를

내게도 내밀었다

나는 덥석 베어 물며

하얀 발등을 생각했다

오늘은 날이 맑구나


놀이터에서 아이들은 망아지처럼 뛰고

얼굴이 퉁퉁 부은 여자는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며

웃는다


햇살은 서럽고


문득 놀이터의 벤치에 앉은 여자들을 보니

이상하다,

여자들이 울고 있다

깜짝 놀라 눈을 다시 비벼 보아도

발등이 하얀 여자들이 울고 있다



- 2022.9 <그 여자가 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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